죽은 자가 산자를 구하지 못하는 이유

미국과 영국의 중도좌파의 실패가 극우 포퓰리즘의 자양이 되고 있다.

by 왼쪽날개


미국과 영국의 중도좌파가 신자유주의 붕괴 국면에서 왜 극우 포퓰리즘에 밀리며 붕괴하고 있는지를 분석한 Jacobin의 기사.


1990년대 미국 빌 클린턴 이후의 New Democrats, 영국 토니 블리어 이후의 New Labour의 중도좌파 노선은 제 3의 길과 뉴케인지언 경제학의 영향 하에 앵글로권 국가들에서 "독자적인 신자유주의 세력"으로 자리잡았음.


1970년대까지 중도좌파 노선을 관통하던 수요관리 정책이 1970년대 스태그플레이션으로 신뢰를 잃자 공급 측 경쟁력을 높이는 방식으로 정부의 시장개입 방향을 선회한 뉴케인지언 경제학에 기반해 앵글로 중도좌파들은 재정긴축, 독립적인 중앙은행의 금리 조정과 인플레이션 관리라는 신자유주의 국가운영의 기본틀을 형성하고 "우파보다 유능한 체제 관리자"로 자리잡음.


2008년 금융위기와 코로나 위기를 겪으며 중도좌파 노선은 양적완화로 금융 붕괴를 현재까지 지연시킴. 하지만 과잉 축적 문제는 보다 파괴적이고 심각해졌고, 양극화는 임계점에 이름.


2016년 영국의 브렉시트와 미국의 1기 트럼프 당선으로 대표되는 극우 포퓰리즘의 등장은 중도 좌파의 주요 지지 기반인 노동계급 일부가 우익 경제 민족주의로 이동하며 발생한 사건이며 지금의 극우 포퓰리즘의 문제는 신자유주의 체제 붕괴의 현상으로 보아야 함.


중도좌파를 포함한 좌파 전반에서 신자유주의 이후의 체제에 대한 고민 속에서 새로운 좌파노선 수립이 요구됨.



한국의 민주당이 영국의 노동당이나 미국의 민주당보다 이념적으로 오른쪽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민주당의 정체성 논쟁이야 내 알바 아니지만, 국힘의 급격한 극우화로 인해 빈자리가 된 "중도 우파"의 포지션을 차지하는 것은 근시적인 정무적 차원에서는 분명히 영리한 움직임이다. 하지만 이런 움직임이 집권 이후 지금 우리 사회의 끔찍한 정치적 변화를 틀어낼 수 있을까를 생각하면 한치의 긍정의 말도 보탤 수가 없다.


미국 트럼프의 광폭 행보를 보면 마치 대통령에 다시 돌아온 윤석열이 할 것 같은 일들을 거침없이 벌이는 것 같아 보는 내내 아찔하다. 이틀 전 한겨레에 실린 한 칼럼은 "죽은 자가 산 자를 도울 수 있을까?"라는 작가 한강의 화두를 던지며, 미국의 극우가 저렇게 기세를 떨치는 것은 파시즘을 직접 경험하지 않은 미국이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설명한다. 오랜 군사독재를 경험한 대한민국에서는 죽은자가 산자를 도와... 산자들이 그 기억을 되세기고 간직함으로써 결코 극우가 우리 사회의 주류가 될 수는 없다고 한다.


하지만 죽은 자들에 대한 기억이 과거로의 회귀에 저항하는 버팀목이 되어 줄지도 모르지만, 산자들이 자신의 미래에 대한 길을 갖고 있지 않는 한, 과거가 오늘을 대신할 유일한 정치적 경험이고 대안일 때, 이 후퇴를 죽은자들의 영혼을 빌어 막을 도리가 없다. 그건 정치도 운동도 아닌 주술이니까.


극우 포퓰리즘을 비판하는 대부분의 접근들은 민주주의의 제도적 공백을 통해 비열하고 파렴치한 정치인들이 어떻게 대중을 포확하게 되었는지를 설명한다. 그들은 체제의 공백을 주목하지만, 극우 포퓰리즘의 주체(정치인들)과 대상(우파 대중들)의 무지와 비이성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신자유주의 중도좌파의 표준적 한계들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설령 당장의 선거를 모면하더라도, 그 이후의 더 끔찍한 미래를 한국의 주류, 낡은 민주화 세력은 막을 수 없다. 불행한 미래는 오늘이 과거로 후퇴하기 때문에 닥치는 것이 아니다. 오늘의 질서가 더 이상 유지될 수 없기 때문에, 그럼에도 오늘을 넘어선 미래의 비전을 지니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우리는 박근혜 탄핵 이후 겨우 5년 후 다시 윤석열을 마지하게 되었는가. 이 5년 후 우리는 더 끔찍한 무엇을 맞닥뜨리지 않으리라고 자신할 수 있는가. 아니, 어쩌면 몇 달 후에라도?!


극단의 진영논리가 모든 대안을 질식시키는데, 우리는 어떻게 극우를 탓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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