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었을 때는 아무런 관심조차 주지 않았던 야생초를 2016년 가을, 제 나이 67에 처음으로 알게 됐습니다. 그 야생초들을 보면 사는 모습이 가지각색이면서도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그 하찮은 들풀도 어떤 놈은 비옥한 땅에 떨어져 보기에도 안정되고 귀티가 나는 것 같기도 했습니다. 어떤 놈은 정말 흙 한줌 없는 천박한 땅에 겨우 자리 잡고 있는 게 애처로워 보였습니다. 그러나 공통점은 초록빛과 온전히 결실한 꽃입니다.
이것은 사람 사는 모습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누구는 태어날 때부터 운이 좋아―유식하게 말하면 불교의 연기법에 따라 나타난 현상입니다만―재벌의 자식이 되고 누구는 지독히 운도 없어 노숙자의 자식이 됩니다. 물론 그 중간도 많이 있습니다. 그들을 우리는 보통사람이라 하고 평범한 삶을 산다고도 합니다. 인간 중에 지혜로운 자, 철학자, 예컨대 니체는 “네 운명을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이게 말처럼 쉽지가 않습니다.
어느 날 인터넷 신문을 보다가 심사가 뒤틀려졌습니다. 외람된 말이지만 보기에 별로 대단해 보이지도 않는―제 눈에 그렇다는 것이지 그것이 진실일 수는 없습니다만―어떤 연예인이 재산인지 집인지 200억이라고 하면서 궁시렁대는 걸 보자 그런 마음이 생겼던 겁니다. 갑자기 평생 그래도 열심히 성실히 살았는데 나는 뭔가 하는 생각이 제 옆구리를 찌른 셈입니다.
그런 마음의 변화가 일어난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그것은 바로 남과의 ‘비교’였습니다. 선견지명이 있는 사람들은 무수히도 말합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말라고요. 들은 풍월이 있어 그 말은 이미 아마도 수백 번도 더 들었을 겁니다. 이런 비교는 차를 타도 그렇고 음식점에 가도 그렇고 살면서 다른 사람을 의식하는 이상 비교를 안 할래야 안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자기 삶을 살고 있는 것은 바로 이름도 없는 야생초입니다. 그 들풀은 낙락장송을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화려한 장미를 시기하지 않습니다. 주어진 환경에서 성심을 다하여 광합성을 하여 자신을 성장시키고 마지막에는 자신의 삶의 결실인 꽃을 피웁니다. 그 꽃은 단순한 것도 있고 정말 아름다운 것도 있습니다. 하지만 가장 근본은 생명의 발로입니다.
저만의 삶을 사는 요체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남과 비교하지 말고 어떤 고난의 삶이라도 자신의 삶을 긍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방법은 기독교인이라면 하나님에게 자신을 맡기고 사는 것이고 불교도라면 붓다의 브레인에 의지하여 사물의 참모습을 보는 깨달음으로 가야 할 것입니다.
있는 삶 그대로의 모습을 그대로 수용하고 그것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건 저의 인격의 능력으로는 사치스럽고 안이할 수 있습니다. 하루 끼니도 해결하기 어려운 사람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것은 그야말로 허공에다가 아름다운 꽃을 그리는 말장난하는 것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 삶을 살아라’라는 말에 동의한다면 스스로 마음 속으로 자신을 훈련시키는 수행을 해야 합니다. 기독교나 불교에서 그래도 다른 사람의 숭상을 받는 사람도 그런 경지에 오르는 것이 하루 아침에 됐을 리가 없습니다. 끊임없이 자신을 돌아보고 자신을 격려하면서 나아갔을 것입니다.
이것을 극복하는 한 방법으로 불교에서 말하는 ‘마음챙김‘ 혹은 팔정도(八正道) 중의 하나인 정념(正念)이 있습니다. 정념은 팔정도 중에서도 가장 어렵다고 합니다. 대상인 사물을 거리를 두고서 감정을 개입시키지 말고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라는 것 같은데 제대로 이해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이것도 정말 지난합니다.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꼭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 나타납니다. 물론 반대로 다른 사람에게 그런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이 저 자신일 수도 있겠지요. 그런 현실을 정념을 하라는 것인데 저의 실력으로는 아직도 멈니다.
날라리 신자인 저이지만 불교 책이나 유튜브를 보면 불교에서 하는 말들이 참으로 합리적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물론 불교에도 제 생각에는 치명적(?) 약점이 있는 것도 같습니다만. 그 중에서도 제게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종범(宗梵) 스님의 말씀이었습니다. 한마음을 만드는 방법으로서 ’이것이 무엇인가‘하고 자신의 마음을 살피는 것입니다. 우리는 대부분 대상을 따라가서 그로 말미암아 생긴 좋지 않는 감정에 대해 파고듭니다. 종범 스님은 그러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을 먹는 자신의 그 마음을 가지고 ’이것이(이 마음이) 무엇인가‘하고 자기 마음을 둘러보라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자신의 생각에 망상이 일어나면 그 망상을 지우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어떤 음탕한 생각(망상)이 생기면(念起) 즉각 알아차리고(卽覺) 그것을 알게 되면(覺知) 즉시 무로 만들어라는(卽無) 것입니다. 그러한 망상이 일어난 순간에는 뿌리가 없어 바로 떼어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야기가 딴 데로 흘렀네요.
두 번째는 모든 현실에 대해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마음의 평안과 행복으로 연결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감사하면 자신의 마음이 만족감으로 차기 때문입니다. 매일 감사한 것을 찾아서 노트에 기록해 두자고 마음은 먹지만 그게 잘 안 됩니다.
그 옛날에 기억한 것이 생각납니다. 너무 오래되어 정확하지는 않습니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것 같습니다. 무슨 암이었는지 모르겠으나 악성 암으로 인하여 거의 모든 장기를 사용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던 것입니다. 죽음을 앞 둔 그는 그럼에도 감사했습니다. “하나님, 아직 음식을 씹어먹을 입이 남아 있으니 감사합니다.” 이건 보통사람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보통사람 같으면 “하나님, 제가 주일도 잘 지키고 복음 전하는 일에도 헌신했건만 왜 제게 이런 시련을 줍니까”라고 울면서 항의했을 겁니다.
자신의 삶을 살려면 무엇보다 주어진 여건 속에서 우선 자기 삶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말야야 합니다. 비록 고단한 자기 삶이라고 하더라도 감사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것들은 마음으로는 동의할 수 있을지 몰라도 자기 것으로 실천하는 것은 또 다른 차원입니다. 저 야생초처럼 자기가 떨어진 땅에 불평불만을 하지 않고 야생초는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으리라고 믿습니다만 감사의 여유를 품고 자신의 생명의 꽃을 온전히 피우다가 가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