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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아 May 07. 2024

체한 마음 그리고 꿈의 변비

콜리플라워 스프

<This is the moment (지금 이 순간)>.

뮤지컬 <지킬앤하이드> 의 메인 넘버 중 하나인 이 곡을 참 좋아한다. 지킬의 인생 중에서 이 노래를 부른 그 순간만큼은 정말이지 사는 것처럼 사는 듯 해서, 거기에 동화된 나의 심장도 덩달아 두근두근 뛰곤 한다. 묘한 감동이 마음을 간지럽히다 결국엔 촉촉히 적신다.

 

This is the moment
This is the day
When I send all my doubts and demons on their way
지금 이 순간이에요. 바로 오늘이에요. 내가 나의 모든 의심과 마음의 괴로움을 보내버리는 순간이요.
This is the moment
When all I've done, all of the dreaming, scheming and screaming
Become one
지금 이 순간이에요.
내가 행하고 꿈꾸고 계획하고 악을 썼던 그 모든 것들이 하나가 되는 순간이요.



그러고 보면 삶은 수많은 순간들의 집합체인데, 지금까지 살면서 내가 제대로 음미한 순간들이 얼마나 될까.

순간들을 습관처럼 지나쳐 갈 뿐 제대로 느끼지 못했다는 건 내가 지금까지 삶을 대했던 방식이 그만큼 성의 없었다는 뜻 아닐까.


마치 엄마가 영혼을 갈아넣어 극도로 맛있게 만들어준 귀한 음식을 아무런 감정 없이, 아무런 감사나 기쁨도 없이, 정신의 대부분은 넷플릭스에 빨린 채 대충 먹어버리듯, 신이 나의 손에 꼬옥 쥐어준 삶 한 그릇에 대해서 귀하다는 감정이 별로 없었던 것 같다.


그러면서도 대형 병원에 가서 유방암이라는 진단을 받았을 때는 초기였음에도 불구하고 나의 온 피부는 물론이고 배 속의 내장까지 온통 떨리듯 두려웠다. 그 때 알았다. 죽음을 두려워 한다는 게 꼭 삶을 소중히 여긴다는 걸 의미하지는 않는다.


어쩌면 오히려 그 반대일 수도 있다. 나의 그릇에 든 음식을 한 입, 한 입 시각, 청각, 후각, 촉각, 미각을 모두 다 동원해서 엔죠이하고 기쁨으로 목구멍 뒤로 넘겼다면, 그릇에 있는 음식을 다 먹은 데 대한 아쉬움이나 종결을 두려워하는 마음보다 감사했다는 마음과 행복감이 더 크지 않을까. 삶의 순간들을 진정으로 음미할 만큼 삶을 소중히 여긴다면 죽음이 찾아오는 게 그다지 두렵지 않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지금 이 순간> 처럼 삶에 뜨겁게 몰입하는 건 어떻게 하는걸까... 두려움 같은 건 도무지 설 자리도 찾지 못한 채, 나의 과거 현재 미래가 도대체 무엇이었는지에 대한 궤가 이윽고 명료하게 맞추어 지면서 활활 타오르는 불같은 이 순간으로 뛰어드는 게 어떻게 가능할까.


답은 '꿈' 아닐까.

<지금 이 순간> 이 감동을 주는 이유는 꿈을 향해 달려가는 한 인간의 감정을 진솔하게 드러내 주기 때문이다. 그가 꿈을 향해 지나왔던 시간들이 가치있게 반짝거리게 되고, 현재는 꿈이 이루어질 거라는 생각에 설레임으로 가득하게 되고, 꿈이 이루어질 미래가 소중해진다.


나는 꿈이 없다.

있었던 적이 없었다. 중고등학교 때 서울대에 가고 싶다는 마음을 가졌었지만, 이는 사회에서 인정하고 우러러보는 뺏지를 달고 싶다는 마음과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리고 싶다는 마음이 합쳐져 생긴 방향성이었기에 진정한 내 마음에서 우러난 꿈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 같다. 그래서 그랬는지 이루지도 못했다.


남편과 함께 오래오래 행복하고 건강하게 살고 싶다는 꿈 외에 내가 무언가를 이루어내고 싶다는 감정은 생기지를 않는다. 그러면서도 <지금 이 순간> 노래를 들으면 눈물이 그렁그렁 해지는 앞뒤가 맞지 않는 나 자신의 모습이 혼란스럽고 불편하다.


도대체 꿈은 어떻게 생겨나는 걸까.

음식을 먹으면 우리 몸의 소화기관을 거쳐 배설물이 생산되듯, 우리가 경험한 것들이 우리의 내면에서 소화되는 과정을 거쳐 꿈이라는 게 생겨나는 것 아닐까. 누구나 응가를 하고 누구나 사랑을 하듯, 꿈도 누구에게나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것인지도 모른다.

내가 꿈이 없는 이유는 나의 경험들이 내면의 위장을 거쳐 소화되지 못해 꿈이라는 형태로 배출되지 못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마음이 체한 상태' 혹은 '마음의 소화불량'.


사실 이는 한국에서 초중고를 졸업하고 살아가면서 자연스레 생기는 현상이다. 사회에서는 귀한 직업군과 천한 직업군을 촘촘히 가르고, 학교에서는 학생 개개인의 독특한 특성보다 국어 영어 수학 과학에서 얼마나 점수를 잘 받고 좋은 학교에 진학하는가로 학생의 가치를 매기는 시스템이니까. 전교 5등 이라는 건 학교에서 다섯 번째로 가치 있는 학생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이 시스템 속에서, 사람을 치료하는 데에 재능이나 관심이 없는 학생들까지도, '청소년기 내내 공부만 해서 좋은 점수를 받아 의대를 간다. 그리고 의사가 되어서 돈을 많이 번다.'는 식의 단체적인 목표가 생긴다.

지킬 박사가 목터져라 노래하는 "나만의 꿈" 이라는 영역에는 관심을 둘 여력조차 없다.



여기까지 생각을 정리해 보니, 이제야 나의 마음과 소통이 좀 되는 것 같다.


나는 꿈을 가지고 싶은 거다.

마음의 소화 불량 상태를 이제 그만 경험하고 싶은 거다.

나의 삶의 순간들을 설레임과 뜨거움으로 채워넣고 싶은 거다.

꿈을 이루어 가는 과정에서 가슴이 쿵쾅쿵쾅 거리게 만들고 싶은 거다.

죽음이 두렵지 않을만큼 삶에 진지하고 싶은 거다.




< 콜리플라워 스프 >


날씨가 따뜻해져 가게에 콜리플라워가 나왔다.



냄비에 버터를 조금만 녹인다. 나는 버터가 많으면 너무 느끼해서 버터의 풍미가 느껴질 정도 사용했다.

양파와 마늘을 채 썰어서 약불에 익힌다.

양파가 반 정도 익으면 콜리플라워도 작게 작게 썰어서 같이 익힌다.

소금과 후추를 뿌린다.

볶는 과정이 중요하다. 약불에 천천히 오래오래 볶는다. 양파와 마늘이 캬라멜라이즈 되고 콜리플라워도 다 익어서 약간 찐득하게 느껴질 때까지 오래 볶는다.

이 정도면 되었겠지 싶을 때 5분 더 볶는다.


물을 적당히 붓고 센불에 끓이다가 끓으면 약불에 30분 정도 끓인다.

불을 끄고 그대로 놓아 두었다가 다 식으면 믹서에 곱게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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