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의 도스토예프스키, <지하생활자의 수기>를 오늘날 다시 읽으며
시선이 닿지 않는 곳은 잘 보이지 않는다. 높은 빌딩들이 공제선을 만드는 도시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시선의 변화는 관찰 가능한 대상도 다르게 만든다. 서울 내에서도 가장 화려한 공간인 강남역 부근, 각종 높은 건물과 강남대로 사이에서 위를 올려다볼 기회는 지나치게 번쩍이는 전광판을 흘겨볼 때나 생긴다. 그런 공간인 강남역에, 필자는 2019년 뜨거운 여름날 삼성 사옥 앞 고공 시위 현장에 출사를 간 적이 있다. 고층 빌딩과 교차로 차선 사이에 자리 잡은 생존권 추구의 현장은 놀라울 만큼 눈에 띄지 않았다. 온갖 사람과 홍보가 모이는 강남, 삼성가에 대한 비판을 담은 플랑은 존재감을 보이지 않았고, 지하철과 맞닿은 각종 고층 건물 사이에 자리 잡은 1인 시위의 장은 애매한 높이에서 외롭게 서 있었다. 기사 사진으로, 최대한 눈에 띄게 담기 위해 자리 잡은 시위 공간 아래에는 집회 관련 법 때문인지 경찰차가 진입을 막고 있었다. 뜨거운 햇빛은 똑같이 닿지만 사람들 눈에는 보이지 않는 도시 속 공간에서, 누군가가 목숨을 담보로 세상에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지하생활자의 수기>는 당대 최신의 도시인 페테르부르그를 배경으로 한다. 하급 관리로 일하던 주인공은 페테르부르그의 월세를 감당하기 어려워 도시의 외곽, 그것도 지하에 자리 잡는다. 높은 건물들 사이에서 목소리를 내려는 어느 노동자와는 다르게, 소설의 주인공은 지하의 삶을 수기의 형태로 적어나간다. 누군가에게 꼭 전달하려는 의도가 아니다. 그러나 두 주체 모두 자신이 눈에 띄지 않게 숨겨버리는 매정한 도시를 폭로하고 있다.
<지하생활자의 수기>는 1인칭의 서술을 통해 디스토피아 소설의 등장 이전, 이상적인 사회상 내부에 존재하는 파괴적이고 고립된 개인을 섬세하게 제시했다. 이 ‘지하인’은 지상에서 살아야 할 존재를 지하로 몰아낸 사회를 직시한다. 이 작품에서 주로 비판하는 사회의 모습은, 합리적 이기주의를 통해 성공적인 공동체를 다함께 이끌어 나가는, 초기 사회주의의 이상향에 가깝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이 작품에서 20세기 사회주의 현실화를 위한 노력을 목격하지 않아도, 소외될 수 있는 인간상을 만들어낸 것이다. 그러나 체제 갈등과 냉전도 없고, 사회주의의 사회적 실험에 ‘실패’라는 결과를 붙인 오늘날, 즉 사회주의 신화가 없어진 현대에서 우리는 이 작품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도스토예프스키는 지하인을 통해 합리적으로만 살 수 없는 개인, 인간의 자유의지, 추악함을 폭로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자유가 일종의 신격화된 현대 사회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 작품을 다시 읽어야 한다. 본고는 이 작품에서 주로 드러나는 지상과 지하라는 공간을 분류 및 분석하고, 이런 해석을 현대 사회에서 적용할 수 있는 방안을 검토하고자 한다.
<지하생활자의 수기>에서 지하는 정상사회로부터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공간이다. 한나 아렌트가 제시한, 누구에게도 침범받지 않아야할 ‘사생활’ 개념과 맞닿아 있기도 하다. 작품의 1부에서는 지하에서 전개되는 지하인의 철학적 세계관이 제시되고, 그 공간은 지하로 일정하게 나타난다. 그러나 2부는 지상에 나선 지하인의 수모, 그리고 지상과 지하를 자유롭게 오가는 리자가 등장하며 지상과 대조되는 공간으로서 지하가 강조되고 있다.
잘 알려있듯, <지하생활자의 수기>는 체르니셰프스키의 <무엇을 할 것인가?>의 안티테제로서 쓰인 소설이다. 이 ‘수기’는 체르니셰프스키가 제시한 합리적 이기주의의 유토피아로 이행하는 사회상 속에서 절망적인 개인의 인간상을 1인칭의 형태로 보여준다. 체르니셰프스키는 인간의 본성이자 당위로서 합리성을 제시하고, 합리적인 결과로서 사회적으로 행동하는 동물인 인간을 조명한다. 이런 관점의 사회상에서 개인은 부품, 톱니바퀴, 그리고 수학 공식 따위로 정리할 수 있는 일부이다.
지상은 체르니셰프스키의 이상을 점진적으로 이뤄나가려는 사회이다. 작중 인물의 시선에서도 그렇고, 실제로 지상의 인물들은 지하의 구체적인 형태를 상상할 수 없다. 추상적인 개념, 혹은 책으로나 가난과 궁핍을 접할 수 있다. 즉, 구체적인 가난의 형태를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런 ‘지상’에 대한 비판은 박완서의 소설 <도둑맞은 가난>에서 중점적으로 묘사된다.) 가난과 마찬가지로, 지상은 인간성의 추악한 부분을 구체적으로 상상할 수 없다. 빛이 있는 공간에서 얼마나 어두운지 가늠이 불가능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상의 사회는 인간성의 긍정적인 부분 위주로, 심리 외부의 방향으로 사고와 발전을 전개해나간다. 작품이 쓰일 당시는, 자본주의의 확산, 그 병폐에 대한 비판이 이뤄짐과 동시에 이상으로서 ‘수정궁’, 사회주의가 제시되었다.
한편 도스토예프스키는 이러한 합리성을 갖춘, 이성적 동물로서의 인간상 제시에 대한 반발한다. 반(反)영웅으로서 지하인을 제시하며 개인에게 내재된 악, 비이성, 추악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홍대화(2015)에 따르면, 이러한 인간 군상은 레르몬토프의 <우리 시대의 영웅> 속 페초린의 “악마적 낭만주의”를 계승하고 있다. 그러나 지하인의 사고는 낭만주의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지하인은 낭만주의를 극복한 인물로서 스스로를 정체화하고, 철학적 사고로 이와 관련된 논의를 전개한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지하인을 체르니셰프스키의 이상적 인간에 대한 반례로서 제시한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도스토예프스키가 제시한 지하인의 특성은 보편적인 인간성인가? 인간에게 보편적으로 추악함과 사악함이 존재하기는 하지만, 이는 ‘인간에게는 이런 측면도 있다’ 수준의 언급이자, 합리적 인간에 대한 신화에 대한 반발로 인간의 추악한 일부를 보여주는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도 모든 인간이 지하인과 같지 않다는 것은 잘 알고 있다. (리자와 지상의 친구들이 제시된다는 점에서 알 수 있다.)
지하라는 공간을 이 작품과 가장 가깝게 시각적으로 표현한 작품으로 영화 <기생충>(2019)을 언급할 수 있다. ‘반지하 냄새’, 집에서 나오는 곱등이, 끝을 모르는 욕심, 지상(정상 사회)을 올려다보고, 구두와 같은 일부만 볼 수 있다. <지하생활자의 수기> 속 지하인의 방은 창문이 없기 때문에 아예 지상을 볼 수 없다. 이런 공간에서 개인은 자신의 내면으로 사고를 전개해나간다. 주로 지상의 일부에 대한 갈망에서 비롯되는 열등의식과 자괴감이 이 과정에서 나타난다.
지하는 죽음에 가까운 공간이기도 하다. 전통적 제례 방식이 대부분의 문화권에서 매장의 형태로 나타나며, 현대 한국 사회의 장례식장과 염습 공간 역시도 지하에 존재한다. 죽음이 지하에 존재하는 것은, 삶을 위한 일종의 격리이다. 삶의 공간인 지상과 죽음의 공간이 명확히 구분된다는 것은 지하의 장례식장 계단을 내려가며 알 수 있다. 살아있는 개인들이 망자를 추모하는 공간은 그나마 가시적이지만, 보다 죽음에 가까이 닿을 수 있는 염습과 입관의 공간은 (한국 사회에서는) 지극히 일부의 가족에게만 공개된다. 정상적인 삶을 위한 ‘죽음’의 격리는 인류학적으로 당연한 현상일지도 모른다. 기본적인 위생의 문제부터, 삶을 멈춘 망자로부터 멀어져 “살 사람은 살아야한다”라는 옛말을 이어나가기 위함이다.
이런 지하에서 삶을 살아가는 이에 대해 초점을 맞춘 것은, 삶 같지 않은 삶을 이어가는, 반쯤 투명한 존재들에 대한 작가의 관심이다. 공동체주의 지향적인 사회에서 공동체에 소속되지 못한다는 것은, 죽음에 가까운 삶이다. 공동체주의 사상은 개인의 자유를 추구하기 어렵다는 반박을 주로 받고는 한다. 이에 대해서는 이견의 여지가 있지만, 적어도 지하인은 수기를 통해 이런 반박의 실존적 근거를 마련하고 있다. 게다가 이 작품은 합리적 인간들의 공동체에 대한 사회적 실험, 공산주의의 현실화의 실패를 목격하기 이전에 그 조짐을 예견했다는 점에서 유의미하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러시아의 작가는 모두 고골의 <외투>에서 나왔다”라고 언급한 바 있다. 작가는 <외투>의 아까끼 아까끼예비치와 같은 ‘작은 인간들’에게 초점을 맞추는 자연파 문학의 경향을 이 작품에서도 이어가고 있다. 지하인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지하생활자의 수기> 집필 당시의 주류 문학이 초점을 맞추는 대상에서 거리가 있던 소외된 계층이다. 지하인은 하급 관리직이었다. 사회의 아주 작은 부품이었다. 그러나 스스로를 지하로 격리시키며 지상에 대한 철학적 사고를 할 수는 있는, 지성을 가진 고통스러운 존재이다. 프로이트적 관점에서 바라봤을 때, 지하인은 강한 초의식의 존재(사회) 속에서 이드를 심층적으로 탐구하는 인물이다. 인간의 충동과 자유의지의 끝은 어디인지, 1부의 독백을 중심으로 잘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작가가 제시한 지하인은 소외되어 관찰되지 않는 인간상을 가시화한 인물이지, 결코 사회적 다수여서는 안된다. 당위로서 언급하는 것은, 20세기의 세계대전과 신자유주의화 등의 사건으로 충동과 자유의지의 한계를 실험하는 수많은 ‘지하인’이 지상에 도래했기 때문이다.
맑스의 정치경제학에 따르면, 노예해방이 노예에게 가져다준 자유에는 이중적인 의미가 있다. 첫 번째 의미는 일상적으로 논의되는 해방을 통한 자유, 노예로서의 의무와 재산으로 취급되던 신분의 속박으로부터의 자유이다. 그러나 맑스는 이 자유의 이면에는 동시에 거주지, 일터로부터 강제로 자유를 얻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소작농, 하인은 신분의 자유를 얻음과 동시에 자신의 삶의 현장과 노동의 현장이 사라지게 된 것이다. 이러한 이중적 자유는 자연스럽게 노동자 계급의 방치로 이어진다. 이러한 이중적 자유는 빈부 격차의 극대화, 즉 자본을 중심으로 하는 사회 구조의 양분화 현상의 강화를 야기한다.
실제로 애덤 스미스의 <도덕 감정론>이 아닌 <국부론>의 ‘보이지 않는 손’만을 검토한 전통 경제학은 자본주의와 자유주의의 병행이 낳을 수 있는 수많은 ‘지하인’들을 자유와 노력의 신화 속으로 몰아넣었다. 신자유주의에서 제시되는 이상적인 인간상은 그들이 안티테제로 삼은 사회주의의 인간상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합리적으로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되, 이제 자유라는 절대적인 가치가 추가된 것이다. 이러한 사회 속에서 기존의 악은 합리적 선택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되기 쉽다. 자유주의에서 반(反)가치적 행위는, 타인의 자유와 권리의 방해로 연결되며, 윤리에 대한 이의제기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이는 도스토예프스키가 작품에서 인간의 최소한의 기준점으로 삼았던 신앙조차 없는 방치된 인간의 형태에 가깝다. 자유라는 신화 앞에서 ‘수정궁’과 같은 공동체주의에 대한 반발은 피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자유라는 이름을 앞세운 반문화(subculture)적 요소가 전면화 될 수 있다. 공동체주의를 거부할 수 있는 명분이 자유로서 확보되고, 서브컬처의 양지화는 피해자의 인지 부족이라는 비판을 낳기도 한다. 이와 관련하여 가장 언급하고 싶은 사례는, 2020년 한국 사회에서 발생한 ‘n번방 사태’를 비롯한 각종 성적 대상화, ‘일베’와 같은 인터넷 커뮤니티 유행어의 확산 등이다.
이런 반문화의 향유자는 무한한 자유를 추구하며 동시에 스스로를 약자로 정체화한다. 그렇다면, 지하인은 사회적 약자인가? 도스토예프스키는 지하인을 통해서 자유의 부재 상황 속 자유를 제시한 것이므로 지하인은 사회적 약자가 ‘아니다.’ 지하인은 스스로도 정상 사회에 편입하지 못하는 자신을 인지함과 동시에, 정상 사회의 합리적 이기주의의 이면을 자신을 반례로 삼아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반문화의 향유자로서 지하인이 존재하는 사회상이 집필 당시와 확연히 달라졌다. 이러한 사회적 배경 속에서 <지하생활자의 수기>는 “자유가 일상이 된 오늘날 검토해야 할 지점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낳는다.
현대 사회 맥락에서 <지하생활자의 수기>를 읽기 위해서는, 리자를 인간의 양면성을 보여주는 존재로서 초점을 맞추는 편이 좋다. 즉, 지하인으로 스스로를 정체화 한 것도 아니고, 지상인이라는 인지도 없는, 계급의식이 없는 범인(凡人)이라고 볼 수 있다.
지하가 죽음과 삶이 공존한다는 앞선 해석에 초점을 맞춘다면, 리자는 보다 영적인 존재로 해석할 수 있는 여지도 있다. 이런 해석에 도스토예프스키의 종교적 세계관을 더한다면, 리자가 지상과 지하를 자유롭게 오가며 죽은이(지하인)에게 삶의 형태를 깨닫게 해주는 천사 내지는 구원자의 역할로 치환될 수 있다. 그러나 리자는 지하인을 구원하기 위해 내려온 존재라고 보기 어렵다. 리자는 지하인도, 지상에 있는 지하인의 친구들과 같은 부류도 아닌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본성적 이타심, 혹은 측은지심을 베푸는 존재이다. 또한, 보통의 인간은 살아가면서 한 번은 죽음을 접할 기회가 있기 마련이다. 현대 사회의 맥락에서 리자의 자유로운 이동은 죽음을 간접적으로 경험하는 보통의 인간상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리자에게는 왜 여성, 창부라는 정체성이 동반되는가? 이런 정체성이 동반되었을 때, 리자를 지하인보다 사회적 지위가 더 낮을 수 있는 존재로 인식하기 쉽다. 일종의 혐오하기 쉬운 존재이다. 경제적 상황 유지를 위해 성별만 이용하면 되는 것처럼 보이는 존재이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듯, 리자는 평범하다. 그리고 그런 리자의 최소한의 인간성(동정, 배려, 혹은 인류애)은 지하인이 마지막에 결코 자신의 삶이 보편타당한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리자를 통해 지하인은 지상의 평범한 존재로서의 인간을 인지하고 그에 대한 걱정, 사고를 시작한다. 이 결말에서 우리는 지하인이 갱생 가능한, 혹은 더욱 인정있는 사람이 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조명해야 한다. ‘n번방 사건’에서 한 가해자는 스스로를 악마로 정체화하며, 검거를 ‘자신의 악마화를 멈추게 도와준 것’이라 언급한 바 있다. 그러나 인간은 악마가 아니다. 지하인과 이 가해자가 사회적으로 미친 피해가 다르지만, 스스로를 추악하다고 정의하며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는 것은 결국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양심을 포기하는 행위에 가깝다.
<지하생활자의 수기>의 결말을 통해, 지하인이 소외가 되고 있긴 하지만, 그런 인물이 주류가 되면 안되는 세상이라는 것을 확인해야한다. 소설 속 지하인의 반합리주의, 책임감 없는 분노의 표출은 오늘날에도 반복되고 있다. 작품 속 악에 대한 책임과 죄책감을 보여주는 마지막 장면에서 오히려 희망을 찾을 수 있다. 또한, 리자를 통한 지하인의 새로운 고민의 시작은 최소한의 지상과의 교류, 즉 사회와의 접촉만으로도 지하가 전부인 삶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현대 문학에서 반영웅의 다양한 추악함의 제시는 더 이뤄질 필요가 없다. 이미 <지하생활자의 수기>에서 충분히 철학적이고, 심도 있게 연구되었기 때문에 결국 같은 논의의 재생산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지하생활자의 수기>는 문학사 속에서 반영웅이라는 인물에 대한 인류학적 보고서로서, 문학사의 사춘기로서 검토되어야 한다. 반영웅의 기저를 파악하고 그 원인으로서 사회에 대해 고찰할 때 문학사의 새로운 성장이 이뤄질 수 있음을 보여주는 19세기의 작품인 것이다.
더 이상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의문은 현대인을 옥죄지 않는다. 이제는 신자유주의 속 인간의 추악함에 대한 검토가 이뤄져야 한다. 그 첫 번째 단계로서 우리는 <지하생활자의 수기>를 통해 인간의 밑바닥을 면밀히 점검하고, 지하인을 끊임없이 낳는 사회에 대한 고찰을 이뤄내야 한다. 이는 사회과학만의 문제가 아니다. 반영웅이라는 이름으로 제시되는 인물에 대한 모방은 분명히 경계해야할 대상이며, 사회는 반영웅에 대한 해답이 없다. 문학사에서 시작된 반영웅의 성장이 문학사 내에서도 이뤄저야 한다.
참고문헌
도스토예프스키, <지하생활자의 수기>, 계동준 역, 열린책들, 2011.
홍대화, <『우리 시대의 영웅』과 『지하로부터의 수기』 간의 상호텍스트성 연구: 페초린의 패러디로서 지 하인>, 슬라브학회 제31권 4호, 2015.
A. Wanner, <The Underground Man as Big Brother: Dostoevsky's and Orwell's Anti-Utopia>, Utopian Studies , 1997, Vol. 8, No. 1 (1997), pp. 77-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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