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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성운 Jul 15. 2022

[히든] 프레임 안의 삶, 그 너머의 진실

세상을 지금보다 덜 슬픈 장소로 만들기 위한 시선

미하엘 하네케 감독은 영화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아니, 그러나 세상을 지금보다 덜 슬픈 장소로 만들 수는 있다. " 



그가 영화를 바라보는 현실적인 시선은 히든에 녹아들어 있다. <히든>은 영화에서 어떤 해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사실 그 무엇도 답을 제시 할 수 없을 것이다. 다만 그는 끝없이 묻는다. 그래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사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에 대해 문제의식을 느끼는가? 그것은 마치 “우리는 생각하고 있는가?” 에 가까워 보인다. 






영화는 우리가 오랜 시간동안 외면해 온 불편한 진실을 마주보게 한다. 계속에서 재단되고 있는 프레임, 현실인지 혹은 테이프 안의 일상인지 알 수 없게 혼란한 영화는 사실 우리가 보는 언론과 닮아 있다. 우리는 영화와 같이 무엇이 진실인지 알지 못한다. 내가 보는 것이 현실인지, CCTV처럼 촬영된 비디오인지, 다큐멘터리인지, 조작된 영상인지, 진짜 가해자와 범죄자가 누구인지. 따라서 조르쥬가 그러한 것처럼 내가 믿고 싶고, 보고 싶은 것만을 본다. 프레임과 카메라가 그러하듯 나의 눈을 재단해 진실 또한 편협한 프레임 안에 가두어 둔다. 프레임 바깥에서 행해지는 것들은 볼 수 없다. 보고 싶지 않다. 그 내면을 들여다보는 순간 프레임의 바깥에 있는 진실, 얄팍한 언론의 장막으로 가려두고 테러라는 사실 자체에만 비난을 퍼붓는 것으로 도덕적인 만족감을 느끼던 사실이 고통스럽게 다가온다. 감독은 그런 관객들에게 끝없이 묻는다. 정말, 프레임 안에 재단되어 있는 것이 진실이자 전부일까?





 때문에 영화는 프레임과 프레임으로 이루어져 있다. 첫 시작 장면만 보더라도 분명 영화의 도입이라 믿었던 부분은 비디오의 한 장면에 불과하고, 이내 두 번의 카메라와 프레임을 통하여 관객에게 전달된다. 그 순간 관객은 내가 보는 영화에 몰입하지 못하게 된다. 비디오의 프레임을 벗어나는 순간 이 모든 것이 실제가 아니라 꾸며진, 만들어진 영상이라는 것을 일순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드가 등장하는 순간 영화의 몰입도는 프레임과 함께 산산이 깨어진다.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조르쥬를 반기는 가엾은 빈민가 청년은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는 기회를 박탈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분노한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담담하게 현실을 받아들이고, 살아간다. 조르쥬가 그에게 분노를 토하고 확정적인 의심을 쏟아 내는 순간부터 영화는 스토리나 캐릭터에 대한 몰입이 아닌 관조로, 영화 속에서 관객을 쫓아낸다. 






그는 외면해 온 현실에 대한 폭로이자, 과격한 질문이다. 선진국들과 언론이 지배하며 착취해 온 나라, 마지드들의 진짜 현실은 어떠한가? 나라를 잃고 인간적인 삶을 보장받지 못한 채로 살아왔던 사람들이 느끼는 분노와 테러 행위는 어떠한 도덕적 관점에서 판단해야 하는 것이며, 선진국들은 그들의 행동에 반성하고 있는가? 과거로 인하여 현재가 고통 받아도 괜찮은가?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들의 사그라들지 않는 분노는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가. 프랑스는 테러를 받고 어떻게 행동해야 했을까. 국제 사회에 테러의 잔혹함을 호소하며 국민의 전체를 범죄자로 매도하며 압박해야 했을까, 아니면 그들이 저지른 원죄를 돌아보고 사죄해야 했을까.  

 




    

 영화의 메인 소재로 등장하는 비디오 테이프는 죄책감과 더불어 반성과 회개, 그리고 진실에 대한 압박처럼 보여 진다. "누가 보냈는가." 아니라, "목적이 무엇인가" 에 대한 도덕적 질문에 가깝다. 테이프의 의미는 알제리가 고통 받았기 때문에 프랑스 또한 고통 받아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복수에는 그들이 단순히 고통 받기를 바라는 것을 넘어서 그들이 죄책감을 느끼기를, 또한 진심을 담은 절실한 사과를 바라는 감정이 담겨있다. 복수한다는 것은 상대에게 견딜 수 없는 정신적이고 물리적인 고통을 주겠다는 것이 아니라 내가 너를 용서할 수 있도록 행동하라는 가장 강력하고 폭력적인 요구에 가깝다. 증오의 씨앗을 안고 사는 것은 결국 나와 모두를 향한 절망의 폭탄이 되기 때문이다. 알제리가, 피해국들이 결론적으로 바라는 것은 이 증오를 뿌리 뽑는 것이다. 연약하고 힘없는 마지드로 상징되는 그들이 원하는 것은 동등하게 살아가고 대우받을 정당한 권리일 뿐이다. 진심어린 사과와 미안함, 그리고 깊은 죄책감을 상기하고 배우기를, 그들에게 쏟아지는 가혹한 차별의 시선이 사라지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들 안에 자리 잡을 수밖에는 없었던 증오를 잠재우고 다시 화합이라는 단어 사이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그러나 조르쥬-프랑스는 결국 "왜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가?" 만을 의문하며 자신이 저지른 죄악 중 가장 표면적인 것을 꺼내 증거로 삼고 무고한 이들을 궁지로 몰아넣는다. 조르쥬의 죄악 안에는 단순히  마지드를 입양하지 못하게 한 것뿐만 아니라 알제리를 향한 잔혹한 폭력과 무관심의 시선이 섞여 있었음에도 그를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한 사람의 인생을 무너트린 자신의 죄악은 가볍게 하고, 촬영된 비디오만큼이나 고정되어있던 자신의 일상에 파도를 부르는 것은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행위로 치부한다. 그리고 내가 이토록 고통받을 짓을 했냐는 억울함을 호소하다가 지쳐 물질로 회유하고, 협박하며, 자신이 가진 모든 것으로 상대를 위협하고 죄를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이는 현대 사회의 전범국들, 식민 지배를 저질렀던 나라들이 1차적으로 취하는 모습과 닮았다. 그들이 하는 말은 이렇게 들린다. 


"내가 잘못하기는 했을지도 몰라. 하지만 그건 예전의 일일 뿐이고 지금의 나는 내 잘못 보다도 더 고통 받고 있다고. 이건 너의 잘못이야. 이젠 네가 가해자야. "




 

  영화를 보는 내내 몇 년 전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테러 사건들이 생각났다. 나는 무슨 행동을 취하고 있었는가. 프랑스에 대한 애도를 표하고, 테러에 진심어린 분노와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는 동안 유럽 사회 내에서 고개를 들지 못하고 배척받는다는 이슬람들에 대해서 한번이라도 진심으로 생각하고 분노한 적이 있었나. 오히려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하지는 않았나. 그들이 다른 나라에 입국하기 위해서는 수 십장의 서류를 제출해야 하고, 오직 이슬람이거나 파키스탄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다른 이들보다 몇 배의 시간을 쓰고 의심받아야 한다는 불편한 진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생각한 적이 있었나. 애초에 언론이 그런 것들을 조명하고 비춰 주기는 했던가. 이러한 것들이 히든의 프레임 바깥에 존재하는 숨겨진 진실이다. 


“테러와 폭동" 이라는 강력하고 자극적인 소재를 카메라가 담는 동안 카메라의 아래에선 조용히 숨져 가는 존재들이 있다는 것. 수많은, 억울하고 가엾은 마지드가 있다는 것. 그리고 우리가 그들을 프레임에 가두어 보도록 호도하는 언론이 존재하고, 그렇기에 지식인은 끝없이 의심하고 벗어나며 짖어야 한다는 것.



나(지식인)는 개와 같아서, 사람들이 깨든 안 깨든 도둑을 보고 밤새 짖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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