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 3년 차 때, 정말이지 내 삶은 평화롭기 그지없었다. 회사는 남부럽지 않은 대기업이었다. 직무는 MD였다. 자율성이 있었고 영업직들의 존중을 받다 보니 일도 편했다. 함께 입사한 동기들과는 자주 여행을 다닐 만큼 친했고, 팀 내 동료들과도 개인적으로 술자리를 자주 가질 정도로 관계가 좋았다. 워라밸은 철저히 지켜져 늘 내 저녁 시간은 충분했다. 이상형과 멀지 않은 사람과 안정적인 연애를 하고 있었고, 자기 계발을 한답시고 독서 토론 모임에 나가고, 주에 3회 이상 헬스장도 갔다. 주말엔 여행이나 세련된 취미를 즐긴 사진을 SNS에 업로드했다. 어디 내놔도 부끄럽지는 않을 사회인의 삶이었다.
그런데 불안했다. 허무하고 권태로웠다. 고인 물이 썩듯, 안정적인 대기 상태에서 미세먼지가 가장 심하듯, 평화롭던 시절의 나는 아이러니하게도 온갖 부정적 감정들로 가득 차 있었다. 이런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애를 많이 썼다. 여기저기 고민 상담도 해보고, 낯선 모임에도 나가보고, 새로운 취미나 자기 계발을 시작하기도 했다.
여전히 불안했다.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가 않았다. 더 큰 문제는 문제가 무엇인지를 모르겠다는 거였다. 누가 봐도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늘 하던 일을 했다. 꾸준히 고민하고, 일기를 쓰고, 책을 읽었다. 어느 날 문득 깨달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절반만 깨달았던 거지만 당시엔 나름 머리가 쿵 울리는 자각이었다. '내가 불안한 이유는 인생을 쏟아 달성해 내야 할 큰 목표가 없기 때문이구나.'
장강명 작가는 우리 시대의 젊은 세대들을 일러 '표백세대'라 했다. 모든 구성원이 색깔 없이 동일하게 하얗게 표백되어 버린 세대. 이뤄내야 할 시대적 사명도 큰 과업도 없는 세대라는 것이다. 나만의 목표나 삶을 이끌어가는 가치관 없이 거대한 자본주의 사회 질서 속에 편입되기만을 바라는 세대이자 자아 정체성을 잃어버린 세대라고 했다. 지나치게 자유로운 나머지 늘 스스로에게 목표와 가치를 부여하고 설득해야 하는. 이로 인한 불안과 허무, 무기력을 짊어지고 사는 세대라는 것이다. 얼마나 공감되는 말인가. 나도 표백됐었구나.
나 역시 늘 딴에는 거대한 목표를 하나씩 달성하며 살아왔다. 중고등학생 때는 중간고사와 기말고사가 삶의 가장 큰 허들이었다. 최종적으로는 수능 시험을 잘 치고 소위 명문대라 불리는 곳에 입학하기 위해 매일을 치열하게 견뎠다.
대학교에 와선 좋은 회사에 취업하기 위해 비슷한 나날을 보냈다. 그렇게 내가 살아온 생의 절반 이상을 투자해 드디어 '번듯한 직장에 취업하기'라는 거대한 과업을 수행해 냈다. 그러나 그다음은?
문제는 그다음이 없다는 거였다. 더 이상 완성해야 할 과업이 없었다. 이제 사회도, 부모님도 내게 어떤 숙제도 목표도 주지 않았다. 더 이상 온 시간과 정성과 힘을 쏟아 도착해야 할 종착지가 없었다. '성공적인 삶'이라는 질서 속에 편입되기 위해 애썼고, '남들 다 하는 것'을 필사적으로 따라 하고 다녔더니, 어떤 보상도 충만함도 없이 허무함만 남은 것이다.
그래서였던가. 고민을 털어보겠다고 하소연하면 또래들은 모두 비슷한 상황이었다. 다들 한숨을 푹푹 쉬어댔다. 그들 모두 불안과 무기력에 시달려가며 '열심히' 살고 있었다. 아침 수영하기, 영어 배우기, 바프 찍기, 자격증 따기 등등.... 미라클 모닝을 하겠다고 기적처럼 이른 아침에 일어나 스스로를 채찍질하지만, 그 어떤 기적 같은 일도 일어나질 않는다. 그저 수단이자 목표로서 미라클 모닝을 달성했단 사실 자체에 만족하는 것이다.
'표백'이 주는 허무함과 불안감이 삶을 다른 방향으로 바꿔버리는 것도 봤다. 딩크를 선언했던 부부가 갑작스레 아이를 가지는 경우가 있었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충격적 이게도 문득 그런 느낌이 스쳤다. 아이를 원해서 가진 게 아니라 가질 수 있어서 가진 거구나, 혹은 가져야만 했던 거구나. 이들에게는 평생을 바쳐 매달려야 할 거대한 과업이 필요했을 수도 있겠구나. 바로 육아 말이다.
결혼이라는 마지막 미션마저 모두 해내버린 후, 그들에게는 평화롭고 안정적인 일상이 끊임없이 주어졌겠지. 두려울만치 반복적으로. 마치 수평선 밖에 보이지 않는 망망대해에 혼자 떠있는 듯이 지독한 불안과 허무가 엄습했겠지. 서로에게 던지는 "이제 우리 뭐 해...?"라는 질문이 사무치게 두렵고 권태로웠겠지. 이제 돌아갈 길은 없는데, 가야 할 길은 끝을 모르게 남아 있었겠지. 아득했겠지. 새로운 의무와 분주한 일상이 필요했겠지. 결국 쫓기듯 아이를 가지게 됐을 수도 있었겠구나.
나는 한동안은 괜찮았다. 스스로 여러 목표를 부여해서 바쁘게 살았다. 어떤 목표는 달성됐고, 어떤 목표는 중도하차했다. 그러나 어느 하나에도 마음을 쏫아붇고 열정을 기울이기가 어려웠다. 늘 맛만 보고 끝내기 일쑤였다. 그럴싸하게 말하면 슬럼프, 좀 더 적나라하게 말하자면 작심삼일. 다시 불안감과 허무함이 찾아왔다. 역시나 마찬가지로 근본적인 문제에 다가가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RPG 게임을 하는 것 같았다. 끊임없이 주어진 퀘스트를 달성하고 열심히 사냥해서 레벨을 올린다. 누군가 왜 이렇게 열심히 레벨을 올리냐고, 그 끝에 뭐가 있냐고 물으면 이렇게 대답하는 거다. "모르겠다. 근데 다들 열심히 레벨을 올리기 위해 노력하잖아. 그래서 나도 한다." "레벨을 왜 올리냐고? 열심히 노력하면 '고레벨'이 될 수 있으니까."
인식의 전환은 또 반복된 고민과 자기반성 뒤에 불현듯 찾아온다. 아, 나는 목적과 목표를 혼동하고 있었구나. '목표'는 달성해 내야 할 무언가다. 도착해야 하는 구체적인 지표다. 그곳에 도달하고 나면 끝인 거다. '목적'은 목표와 다르다. 목적은 목표를 지향해야 하는 이유다. 맞다, 내 삶에는 '왜'가 빠져 있었던 거다. 나는 목표만 있는 삶을 살고 있었다. 나는 스스로에게 과업을 부여할 게 아니라 왜라는 이유를 부여해야 했던 거다. 나에겐 일상의 목표가 필요한 게 아니라 목적이 필요했던 거다.
나는 행복하고 싶었다. 행복의 조건을 여러 연구 결과와 통계를 통해 실증적이고 구체적으로 설명해 낸 ‘행복의 기원’이라는 책이 있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행복은 기쁨의 강도가 아니라 빈도다.” 큰 기쁨을 얻기 위해 한참을 참고 노력하다가 짧은 환희를 맛볼 게 아니라, 소소할지라도 확실한 행복을 주는 것들을 내 삶에 최대한 많이 둘수록 행복하게 살 수 있다.
예를 들어, 난 뮤지컬을 좋아한다. 잘 만든 웅장한 뮤지컬을 볼 때의 전율과 행복감은 무엇과도 비교하기 어렵다. 이런 뮤지컬을 자주 볼수록 나는 더 행복해질 수 있겠지. 하지만 뮤지컬은 나름 사치스러운 취미다. 솔직히 일반 직장인에겐 꽤 부담스러운 가격이다. 이처럼 행복을 지켜내는 데에는 품과 돈이 든다. 결국,
나는 내 행복의 빈도를 위해, 나를 기쁘게 하는 것들을 부지런히 찾아내고 이들을 가까이하기 위해 매 순간 노력해야 한다.
나는 안정적이고 싶었다. 불의의 사고나 통제할 수 없는 사건으로 일상이 무너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상상력은 지나치게 풍부하고 겁은 과하게 많아서 여러 걱정들이 자주 나를 괴롭혔다. 주위 환경들의 변화에 내 삶과 마음이 흔들리는 게 싫었다. 안정적인 직장을 다니고 있었지만 그 안정성이 언제 무너질지 모른다는 점이 무서웠다. 지금 하고 있는 일과 부대끼는 사람들에게서 원하든 원하지 않든 마음대로 벗어날 수 없다는 점도 화가 났다. 내가 정말 내 삶의 주인이라면 어떤 외부의 것도 나의 행복을 흔들 수 없어야 하는 게 아닌가. 다시 말해,
나는 내 삶의 통제력이 온전히 나에게 있었으면 좋겠다.
나는 돈으로부터 자유롭고 싶었다. 어린 시절부터 나는 부모님에게서 “돈 아껴 써라”는 말을 귀에 인이 박이게 듣고 자라왔다. 때론 강박적이라 느낄 만큼 절약과 저축이 삶의 태도였던 분들이셨다. 그래서 난 근검절약하는 사람이 되었는가? 아니다. 고작 죄책감에 시달리며 돈을 펑펑 써대는 사회인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돈을 쓰는 데서 오는 죄책감, 돈을 더 벌어야 한다는 강박감, 돈이 얼마 없다는 불안감, 돈이 많은 이들에 대한 박탈감, 돈 벌 능력이 부족하다고 느끼는 열등감까지, 내 내부를 끝없이 들끓게 만드는 심리적 강박들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무심하고 초연해지고 싶었다. 즉,
나는 돈의 속박에서 벗어나, 내가 원하는 것을 원하고 싶다.
세 가지 목적이 가리키는 바는 명확했다. ‘경제적 자유’, 이것이 나의 가장 큰 목표인 것이다. 내 목적들을 이루기 위해서는 경제적 자유가 필요하다. 목적을 생각하게 되니 단기적 목표와 장기적 목표가 자연스레 따라왔다. 또 목적을 추구하기 위해 다른 크고 작은 목표가 끝없이 생겼다 사라져 간다. 결과가 아니라 과정을 향한 삶이다. 슬럼프도 번 아웃도 없다. 허무함도 불안함도 없다.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일들로 하루하루가 부족한 느낌만 든다. 경제적 자유가 달성된다면 다시 다른 목표가 생겨나겠지.
그렇다고 내가 불안함과 허무함, 무기력함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을까? 솔직히 그건 아직 알 수 없다. 살다 보면 목적을 잃어버릴 때도, 목적이 부정당할 때도 오지 않을까 싶다. 그러나 확실한 건 공허하게 목표만을 추구하거나 목표조차 없이 살 때보다 마음이 편안하다는 것이다. 의욕과 열정도 넘친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방향도 명확하게 보인다. 도파민이 흘러넘치는 그런 상태다.
그래서 나와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다면 딱 한 가지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 스스로의 인생을 송두리째 설득할 수 있는 '왜'를 생각해 내지 못한다면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끝없이 무기력하고 불안할 것이다. 나만의 목적을 구하는 것만이 스스로를 구원하는 길이다. 그건 내가 해야만 하는 일이고, 나밖에 하지 못하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