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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따르미 May 03. 2021

"안 괜찮아."라고 대답하기 시작했다

'습관성 괜찮음' 졸업하기

  "하우 아 유." "아임 파인 땡큐."


  쌍팔년도에 가장 먼저 배운 회화다. 그런데 조금 커서 생각해 보니, 그때부터 죽 "괜찮다고 말하는 습관."을 배워 온 것 같다. "잘 지내?" "별일 없어?" "괜찮아?" 안부를 묻는 인사에 따르는 나의 대답은 99% "괜찮아."였다. 어느 날 아내가 말했다.


 "안 괜찮으면서 왜 괜찮다고 해? 다 티 나거든? 당신이랑 10년을 살았는데 모르겠어? 그냥 솔직하게 말해."


 "그래도 괜찮아. 그게 가족이라고."




  예전에 나는 "괜찮아."라고 말할 뿐 아니라 진짜 괜찮아야 했다. 괜찮은 사람이어야 했고, 괜찮은 결과를 내야 했다. 실제로 노력하면 어느 정도 괜찮아질 때가 많았다. 그래서 "괜찮다."라고 말해 왔다.


  잘 관찰해 보니 글자 모양도 괴상하다. '괜'이라는 글자는 괜찮다고 말할 때에 주로 쓰인다. 국어 어휘 역사에서는 "관계하지 아니하다."에서 온 말로 본다는데, 그래서 그런지 "너한테는 말하기 싫으니 상관하지 마." "안 괜찮은데 그냥 신경 안 쓰려고."라는 뜻으로도 많이 쓰이는 것 같다.


  피상적인 인간관계와 소통의 부재를 만들어 내는 말이기도 하다. 사실 "괜찮다."는 말만 하는 사이는 서로 전혀 '괜찮은 사이'가 아닐 가능성이 높다. 진짜로 괜찮은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한 달에 천만 원쯤 벌면 제법 괜찮기는 하겠지만, 그래도 다 괜찮지만은 않을 거야. 암. 못 벌어봐서 모르지만 분명. 그럴 거야.




  나는 '괜찮다.'라고 말하면서 안 괜찮을 때가 많았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함께 사는 사람들에게 우울한 전파를 쏘아내고 있었고, 괜한 눈치를 보게 만들 때도 많았다. 우리는 괜찮지 않았다.


  직접 화를 내거나 불평하지 않으면 괜찮은 줄 알았다. 입 밖으로 나오지만 않으면 괜찮을 거라 생각했다. 그렇게 스스로 괜찮다고 굳게 믿었고, 그 신앙의 힘으로 버텼다. 속으로는 오만 욕을 쏘아내면서도 겉으로는 괜찮은 양 했다.


  더욱 힘들었던 점은, 그러다가도 누굴 만나면 다시 '사회생활 모드'로 언제든 돌아갈 수 있는 자신을 발견할 때였다. '영업용 미소'라고나 할까. 심지어 내가 괜찮지 않다는 걸 다 아는데도, 또 괜찮은 척하니까 어쩔 수 없이 괜찮은 사람을 대하듯 할 수 밖에 없는 상대방의 과도하고 어색한 배려를 받을 때조차 있었다.


  심각한 자괴감이 몰려왔다. 무슨 지킬 앤 하이드도 아니고,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이 없다. 나는 괜찮은 사람이 아니었고, 괜찮지도 않았다. 무심코 '괜찮다.'라고 말해 놓고 '아차 또,'하며 후회할 때가 너무 많았다.




  그래서 "안 괜찮아."라고 대답하기 시작했다.


  대체로 좋은 모습, 보여주고 싶은 모습만 기록한다는 SNS에 나 안 괜찮다고. 담담히 안 괜찮은 이유를 써서 올리기 시작했다. 알아 달라는 것도 아니고 편들어 달라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이대로 죽을 수 없어서 응급실에 가는 마음으로 썼다. 신비하게도 괜찮은 모습만 보여줄 때보다 공감해 주는 친구가 늘어났다. 묘하다.


  가족들에게도 '괜찮기만 한 사람'을 연기하기를 포기했다. 어차피 다 들통났는 걸 뭐. 그냥 안 괜찮으니까 도와달라고, 미안하지만 이해해 달라고 최대한 (나름) 정중히 말하기 시작했다.


  결과, 이제 나는 전파를 쏘아 내는 시간이 줄었고, 문제와 나를 분리해서 생각할 줄 알게 되기 시작했다. 오히려 아내가 "괜찮다."라고 말하기라도 할라치면 "너 안 괜찮잖아. 누굴 속여."라고 제법 여유 있게 농담 어린 복수도 할 줄 알게 되었다. "괜찮다."라고 말하기를 그치고, "안 괜찮다."는 것을 화내지 않고 말할 수 있게 되자 조금씩 괜찮아지기 시작했다.


  가끔은 뒤집어 보기도 하고, 흔들어 보기도 하자. 괜찮은데 괜찮지 않은 삶이 조금씩 변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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