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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따르미 May 27. 2021

'MR. 애매모호'와 사는 법

충청도 남자만 그런 걸까

  "깔깔깔깔. 당신이랑 똑같다. 큭큭큭큭."


  예능 "1호가 될 순 없어."를 볼 때마다 아내는 배꼽을 잡습니다. 거기 나오는 남자들이 저랑 비슷하다나요.


  1호 부부(최양락, 팽현숙)와 15호 부부(김단하, 배정근)-가나다순-는 경상도 여인과 충청도 남자 커플입니다. 성급한 일반화는 금물이지만, 방송에서 보이는 면모만 본다면 여성은 씩씩하고 남성은 애매합니다. 나무위키에는 "Mr. 애매모호와 Ms. 서스펜스의 만남"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예를 들어, 둘이 만둣국을 해 먹고 있는 장면입니다. (왠지 오은영 박사가 된 기분이네요.)

  

  "아, 뭔가 2프로 부족한데?"

  "왜, 싱거워? 뭐 더 넣어줘?"

  "아니, 그냥...(싱크대로 가서 선반을 뒤진다.)"

  "(답답해하며) 아 뭔데? 뭐 찾아?"

  "(결국 못 찾고 돌아오며) 아니, 지난번에 먹던 김이 어디 있나..."

  "(한 번에 찾아주며) 여깄잖아. 그냥 김가루 달라고 하면 되지 왜 답답하게 그래?"

  "아니, 당신 힘들까 봐..."


  남편은 김을 고명으로 얹어서 먹고 싶습니다. 그러면 '김가루 뿌려서 먹고 싶다.'라고 말하면 되는데, "아, 뭔가 2프로 부족한데?"라고 말합니다. '힘들까 봐 하는 말'이 아니라 '더 힘들게 하는 말'이 됩니다.

  

  아내 입장에서는 혼신의 힘을 다해서 만든 음식이 '2프로 부족하다.'라고 말하는 것보다는 '김가루 먹고 싶은데 어디 있어? 내가 찾을게.'나 '김가루 좀 줘.'라고 말하는 게 더 낫습니다.


  부부 사이에서 하고 싶은 말과 듣고 싶은 말의 불일치는 언제나 일어납니다. 서로의 의사소통 방식을 잘 모르는 데다, 두 사람의 상태와 기분이 여러 이유로 늘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 도움이 될만한 이야기를 좀 해보려고 합니다.




  모든 남자가 그런 건 아니지만, 저 같은 'Mr. 애매모호'는 주로 장면을 기억합니다. 지난번에 "김가루 좀 줘." 했다가, "네가 갖다 먹어. 힘들어 죽겠는데." 정도의 대화 패턴이 있었겠지요. 남자는 사진을 찍습니다. AI처럼 그 상황을 학습하고 상처를 받은 후, 다시는 같은 말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합니다. 그래서 의사표현이 점점 두루뭉술(?)해집니다.


   사건과 대화를 통해 '내 아내는 이런 사람이다.'라고 나름 정의한 후, 그 정의에 의해 행동하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불편함을 담은 애매한 말은 관계를 더 불편하게 합니다.


   아내는 수학 공식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한 번의 대화나 사건으로 정의할 수 없고, 그것도 한 문장으로 정의할 수는 없지요. 10년쯤 살고 나서야 내 아내가 '사람'이라는 것을 이해하다니, 제가 봐도 답답합니다.


  여성은 조금 다릅니다. 말하자면 '관계의 그래프'를 그립니다. 소위 말하는 '둘 사이의 분위기'입니다. 이 그래프는 주식 시세처럼 선형입니다. 죽 오르면 참 좋은데 보통 완만하게 오르다가 뚝 떨어지고, 계단식으로 오르다가 뚝 떨어지고를 반복합니다. 그래서 김가루를 가져다줄 수 있을 때도 있고, 네가 좀 가져다 먹었으면 좋겠을 때도 있습니다. 그때그때 다릅니다.


  여성 입장에서는 화를 내는 것이 아니라 그 그래프를 따라서 기분이나 어조가 달라진 것입니다. (보통은 보기보다 화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여자라고는 엄마밖에 몰랐던 남자는 여성이 언성을 높이는 장면에 익숙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차라리 카사노바가 더 낫다고 하나 봐요.)


  'Mr. 애매모호'에게 그런 상황에 대한 기억은 주로 내가 뭔가 잘못했을 때 엄마에게 혼나는 장면이죠. 그래서 마음속 일기에 '오늘은 아내가 나에게 화를 냈다.'만 적어 놓고 자는 겁니다. 왜 화를 냈는지, 그게 어떤 내러티브로 이어져 온 것인지는 크게 고민하지 않고 말입니다.


  해결점은 의외로 단순합니다. 너무 조심하지 말고 솔직하게 물어보는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고 신뢰하는 사이라면, 그럴 때 애매하게 말을 돌리지 말고 한번 가볍게 물어보면 됩니다. '무슨 일 있었어?' '내가 기분 상하게 했어?' 수시로 물어보면 부부 관계는 점점 좋아지겠지요. '오늘 어땠어?' '힘든 일 없었어?' '누가 속상하게 한 일 없었어?' '내가 뭐 하면 돼?'




  불행하게도 'Mr. 애매모호'는 이런 걸 못 배우고 결혼을 해서, 일단 분위기가 별로다 싶으면 입을 꾹 닫고 살았습니다. 눈치도 없으면서 눈치만 보고 가만히 있었지요. 저는 서울에서 나고 자란 서울 사람입니다. 'Mr. 애매모호'는 충청도 남자만 그런 게 아니에요. 그냥 못 배우면 다 그래요.


  '1호가 될 순 없어.'의 최양락 씨는 '초코 양락'이라는 애칭을 얻으며 배우고 변하는 중입니다. 저 같은 'Mr. 애매모호'도 언젠가 이름 앞에 '초코'를 붙일 수 있는 날이 올까요? 오늘도 'Mr. 애매모호'와 사는 우리 집 평강공주님께 감사하며, 이 땅의 모든 부부님들을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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