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풍의 추억 속으로
은행나무의 추억 속으로
새벽의 적막 속에서 나를 깨운 건 첫 단풍의 부름이었다.
밤새 뒤척이다 겨우 잠에 들었지만, 익숙한 울림이 가슴을 두드렸다.
“가을이 왔으니 단풍을 보러 떠나자.”
아침 공기는 서늘했고, 이불을 걷어낼 때 느껴지는 찬 기운이 새삼 계절의 변화를 실감하게 했다.
급번개로 이루어진 약속으로 대충 준비를 하고 뜨거운 커피 한 잔을 마시며 출발 준비를 마쳤다.
거리의 가로수들도 하나둘씩 가을의 옷을 입기 시작했다.
붉게 물든 잎이 드문드문 눈에 들어오고, 아직 푸른 잎은 이제 막 물드는 중이다.
세상은 여전히 아침의 고요 속에 잠겨 있었고, 덜 막힌 길은 산들바람처럼 부드럽게 흘렀다.
목적지를 향해 달리며 첫 단풍이 빠르다는 오대산으로 향했다.
사람들의 바쁜 움직임도, 차들의 경적 소리도 없는 고요한 고속도로에서, 첫 마을을 들어섰다.
어느새 창문 밖으로 풍경이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다.
초록의 들판이 황금빛으로 변하고, 산등성이에는 붉고 주황빛 물결이 퍼져 있었다.
햇살은 온화하게 나뭇잎 사이로 스며들어 그것들을 찬란히 빛나게 했다.
마음 한구석에서 어린 시절의 기억들이 피어올랐다.
20대의 기억과 단풍
20대의 어느 가을, 나는 친구들과 함께 단풍 구경을 갔던 기억이 난다. 그때는 삶의 한가운데에 서서 모든 것이 선명하게 빛나던 시절이었다.
작은 배낭 하나를 메고 가벼운 마음으로 산길을 오르며 낄낄거리던 웃음소리, 서로를 찍어주던 사진들, 그리고 등산 후 먹었던 따뜻한 컵라면. 단풍나무 아래 앉아 하늘을 바라보며 나눈 대화들은 그때의 우리가 얼마나 순수했는지를 깨닫게 한다.
그 시절, 붉게 물든 단풍잎을 손에 쥐고 바라보며 품었던 열정이 지금도 마음속 어딘가에 남아 있음을 느낀다. 시간이 흘러 그 시절의 친구들과는 조금씩 멀어졌지만, 단풍이 든 계절이 오면 그 기억들은 선명하게 나를 찾아온다.
차를 타고 달리며, 목적지에 다다르기도 전에 가을풍경이 선물처럼 다가왔다.
나뭇잎이 흔들릴 때마다 산들바람이 불어오고, 잎사귀가 떨어지는 모습이 마치 하늘에서 춤추는 것처럼 느껴졌다.
길을 걷다 보니 주변에서 들려오는 자연의 소리들이 마음을 어루만졌다. 발밑에 바스락거리는 소리, 나뭇가지 사이로 스며드는 바람의 속삭임. 마치 자연이 나를 환영하며 반기는 듯한 순간이었다.
나무 사이로 들어오는 빛줄기가 금빛으로 물든 잎을 비추며 마법 같은 분위기를 만들었다.
새삼 떠올린다.
단풍은 시간의 흔적이자, 계절의 흐름을 품고 있는 자연의 예술이다.
나무 한 그루, 그 나뭇잎 하나에도 한 해 동안 겪어온 시간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아가는 가을의 풍경 속에서, 나는 다시 한번 시간의 흐름과 인생의 아름다움을 느낀다.
이미 노란 단풍은 다 지고 걸을 때 바스락 소리에 은행잎을 보며 거닐었다.
오늘의 단풍은 오래된 추억을 새롭게 물들였다.
차가운 바람에도 마음은 따뜻했다.
나는 또 하나의 계절을 온전히 느낄 수 있었다.
모든 것은 언제나 지나가는 바람처럼 왔다가 흩어진다는 것을
“그래, 올해의 가을은 이 색이구나.”
그 순간, 마음이 참 고요했다.
단풍이 스스로의 색을 찾아 물드는 것처럼,
나도 나만의 색으로 조금씩 물들어가고 있었다.
그게 어쩌면, 살아간다는 일의 또 다른 이름인지도 모르겠다.
끝내 스스로 물드는 단풍잎처럼, 나도 스스로의 색을 찾아 물들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