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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성일 Dec 21. 2021

코스타리카에서 지명수배자와 결혼을#1

#아무것도 모르고 한 지붕 밑에 몇 달을 살았네 #별일없었음됐지뭐


코스타리카에서 공부할 때 있었던 일이다


나는 아직 학생이었고 코스타리카의 물가는 저렴하지 않았기 때문에 주머니 사정이 항상 넉넉하지 않았다. 혼자서 집을 단독 렌트해서 사는 건 꿈도 못 꿀 일이었기 때문에 처음 코스타리카에 정착했을 때 내가 선택한 주거방식은 하우스셰어였다. 내가 살았던 집은 어학원이 가까워서, 어학원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다양한 인종과 국적의 사람들이 단기/장기로 머무는 곳이었다. 마음씨 좋은 코스타리카 아주머니가 운영하던 이 집에서는 매일매일이 다양한 이야기들로 가득했다.


그중 오늘 내가 할 이야기는 코스타리카에서 전과 13범 범죄자와 위장 결혼할 뻔 이야기.



그 집은 집 두 채가 연결되어 있는 다소 특이한 구조의 집이었다. 앞집과 뒷집이라고 볼 수 있겠다. 주인아주머니와 친해진 나도 한 번도 들어가 보지 못한 뒷집은 아주머니가 남편분과 거주하시는 공간이었고, 외국인들이 세 들어 살던 앞집에는 총 네 개의 방이 있었다. 


편의상 1-4번 방이라고 부르기로 하자. 부엌과 가장 가까웠던 1번 방에는 내가 살았다. 그다음 2번 방에는 어학원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가난한 유대인 남자와 그 남자와 사랑에 빠져 코스타리카까지 함께 온 부잣집 철없는 아가씨가 살았다. 이 커플도 어지간히 특이한 인간들이었는데, 그 이야기는 다음에 또.


3번 방에는 사기를 당했지만 자기는 사기를 당한 게 아니며, 다만 그 사람 (사기꾼) 에게 여러 가지 사정이 있어서 돈을 돌려주지 못했을 뿐이니 곧 그 돈이 자기 손에 들어올 것이라고 주장하는 덩치 큰 중년의 백인 남자가 살았다. 코스타리카 사기꾼에게 당한 이 남자는, 오로지 그 돈을 받기 위해 코스타리카까지 와서 살고 있었다. 뚜렷한 직업도 일도 없이 매일 빈둥거리며 가지고 있는 돈마저 조금씩 까먹던 캐나다 남자. 주인집 아주머니는 그 사람이 본인이 사기당한 줄도 모르고 자기 손에 떨어지지도 않을 돈을 기다리는 불쌍한 사람이라고 했다.  


4번 방에는 당시 가장 최근에 세를 든 젊은 미국 남자가 살았다. 이 사람도 어학원에서 영어를 가르쳤다. 어느 날 요리를 하려고 부엌에 들어갔는데 식용유도 두르지 않고 계란 프라이를 하려는 그에게 식용유가 어디 있는지 말해주었다. 그 사람은 계란 프라이를 부칠 때 누가 식용유를 쓰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 했다. 나는 식용유를 쓰지 않으면 프라이팬에 계란이 다 달라붙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내 말을 듣지 않았고 결국 프라이팬을 태웠다. 




주인집 아주머니는 이 특이한 다섯 명과 살면서 일어나는 좌충우돌 시트콤에 지치지도 않는지, 쓰지 않는 차고를 개조하여 방으로 만들고 새로운 세입자를 구했다. 이 새로운 세입자의 이름은 안토니오, 미국 시민권자이지만 코스타리카 출신의 부모님을 두어서 스페인어도 능숙하게 구사했다. 


안토니오는 평일에는 성실하게도 아침 일찍 퇴근하고 거의 항상 비슷한 시간에 집에 돌아오는 계획적이고 성실한 삶을 사는 사람이었다. 휴일에는 본인 방의 방청소와 빨래를 했으며, 가끔 잡다한 집안일에 있어서는 아주머니를 도와드리기도 했다. 이 특이한 집에 드디어 정상적인 사람이 들어왔다고 아주머니가 기뻐했다. 


처음에는 새로운 세입자를 의심스럽게 바라보던 기존 세입자들도 얼마 지나지 않아 안토니오를 자연스럽고 친숙하게 받아들였다. 안토니오는 내 정지된 아마존 계정을 확인해주고 해결방안을 제시해주기도 했고, 4번 방의 젊은 남자에게는 여러모로 든든한 형이 되어주었다. 계란 프라이하는데 식용유를 쓰기를 거부하는 이 4번 방 남자도 언어와 생활방식에서 여러 가지로 능숙한 안토니오를 믿고 신뢰했다. 안토니오는 2번 방의 비슷한 또래의 유대인 남자에게도 좋은 말 상대가 되어주었고, 처음 부모의 곁을 떠나 모든 것을 본인 손으로 하느라 고생을 처음 맛본 상류층 아가씨의 투정도 재치 있게 잘 받아주는 이 집의 몇 안 되는 유머 있고 친절한 사람이었다.


이 친절한 사람은 내가 비자를 발급받는데 서류상 애를 먹고 있다는 것을 알고, 원한다면 본인이 코스타리카 국적이기도 하므로 서류상 혼인한 것으로 신고하여 쉽게 비자를 받게 해 주겠다고 제안했다. 


실제로 그 당시에 내 비자를 진행하던 변호사가, 코스타리카에서 가장 빨리 비자를 받는 법 첫 번째는 코스타리카에서 아이를 낳는 것이고, 두 번째로는 코스타리카 사람과 결혼하는 것이라고 했던 만큼 위장결혼이 드물지 않았다. 비자가 발급되고 바로 이혼을 진행해도 딱히 법적인 제재가 마련되어있지 않던 때라 많은 현지 사람들이 돈을 받고 외국인과 서류상 결혼과 이혼을 하곤 했다. 법적인 절차가 일반적인 비자 방법보다 훨씬 간단했다. 심지어 안토니오는 따로 돈을 달라는 것도 아니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그가 나에게 이런 제안을 했을 때에는 이미 안토니오는 우리 집에서 가장 믿음직스러운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 순간에는 혹했다. 


"소성일, 어차피 간단한 일이야. 변호사 앞에서 사인만 하면 결혼이 되고, 비자 나오자마자 다시 사인하면 이혼이 되는걸. No pasa nada (아무 일도 없을 거야)" 


대학에서 만난 외국인 친구들도 비자를 받기 위해 몇 년간 고생하는 것을 들었기 때문에, 그보다 쉬운 일이 있다는 말에 '아, 그럼 그렇게 할까?'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리라. 그래도 서류상에나 마나 DIVORCIADA (이혼녀)가 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에 돌려 거절했다. "안토니오, 내 배우자가 되고 싶은 건 알겠는데 내가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토니오는 와하하 웃으며 언제든 도움이 필요하면 말하라고 했다. 


그렇게 그나마 평화로운 날들을 보내던 어느 날, 주인아주머니는 그렇게 본인이 편애해 마지않던 안토니오를 하루아침만에 내쫓았다. 아무리 세입자들이 이리저리 사고를 쳐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잔소리는 할지언정, 한 번도 세입자를 쫓아낸 적은 없었는데 낯선 아주머니의 행동에 웬 까닭인지 몰라 모두 어리둥절했다. 우리 집에서 가장 성실한 사람으로 통했던 안토니오가 쫓겨나듯 이사를 나가자, 입방아 찧기를 좋아하는 기존 세입자들이 얼른 입을 놀렸다. 주인아주머니와 싸운 게 분명하다는 둥, 아주머니가 그 방세를 더 올려 다른 세입자를 받으려 그랬다는 둥 근거 없는 낭설 위에 낭설을 다시 쌓아가던 차, 아주머니가 우리 모두를 부엌으로 소집해 말했다. 


"갑자기 안토니오가 이사 나가게 돼서 당황스러운 사람들이 많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불렀어. 불필요한 오해는 피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안토니오를 내보내게 된 이유를 모두에게 이야기하려고 해."


우리는 조용히 숨을 죽이고 아주머니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안토니오는 미국 범죄자 조회 시스템에 등록되어 있는 전과 13범의 범죄자이자 지명수배 중인 사람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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