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쩡한버스가왜 #내가타니고장이나나 #운나쁜동양인
"버스 고장 났어!"
"뭐?"
버스가 고장 나다니, 중남미에서도 작은 동네 버스를 이용한 거 아니냐!
혹은, 싼 게 비지떡이라고 싼 버스표 사서 후진 버스 타고 가다 그런 거 아니냐! 할 수 있겠지만 그건 아니었다. 일단 국경을 넘으려면 여러 절차와 허가가 필요하기 때문에, 작은 동네 버스 수준의 회사가 아니라 중남미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꼽는 규모의 회사가 운행했고, 버스 자체도 최신년식의 날렵해 보이는 버스였다.
그 왜, 가끔 티브이에서 선수들 싣고 가는 멋있는 버스, 그런 버스라 가다가 서는 건 상상도 못 했는데...
"너는 여기서 뭐 하고 있었어?"
"버스가 서는 바람에 잠에서 깼어. 기사님이랑 승무원님이랑 이야기하다가 승객 중에 혹시 드라이버 칼 있는 사람 없냐고 해서 내가 있다고 했지!"
"그럼 드라이버 칼만 빌려주면 되지 왜 여기 따라와 있어?"
"궁금해서!"
너는 대체 그런 게 왜 궁금해... 왜 와서 고생을 자처해...
네가 왜 라이트를 들고 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건데... 너는... 승객이잖아...
친구가 휴대폰 라이트로 버스 엔진룸 안을 비춰주면, 버스기사와 승무원이 안을 들여다보고 여기저기를 만지며 부품을 손보고 있었단다. 그게 또 나름 재밌었단다. 오랜 시간 동안 라이트를 들고 있었던 친구와 교대해 대신 라이트를 들어주며, 머릿속으로는 이 시간에 지나가는 다른 회사의 버스가 없는지 생각해봤다. 표가 없어서 이 회사 저 회사 다 알아봤었던 터라 시간표를 어느 정도 기억하고 있었다.
자 어디 보자... 현재시간이 새벽 두 시, 이 시간쯤 이곳을 지나갈 만한 버스가...
"없다"
착각이 아니라 정말 없었다.
국경 근처는 원래 위험하지만 밤-새벽 사이에는 더욱더 위험해지는 터라 이 회사를 제외한 다른 버스회사들은 야간 운행을 하지 않았다. 그나마 가장 이른 운행을 하는 A사도 새벽 다섯 시쯤 출발하니 아무리 빨리 지나간다고 해도 아침 일곱 시는 넘어야 했다. 또 지나간다고 해도, 우리를 보고 버스를 세워줄지 의문이었다. 이미 만석일 텐데 우리를 태워줄 만한 여유가 있을까? 막막했다. 그러나 다른 방도가 없었다. 45인승의 거대한 버스를 내 손 한 뼘만 한 드라이버 칼로 고치던지, 아니면 출발지에서 다른 버스를 또 보내던지, 그것도 아니면 지나가는 다른 버스를 얻어 타던 지 셋 중 하나였다.
"회사에는 연락해 보셨어요? 예비분의 버스가 있을 텐데 보내주면 안 되나요?"
"12월 31일에 출발하는 마지막 버스라서... 우리가 출발하자마자 다들 퇴근했어... 새해잖아"
"예? 그래도 연락은 해보셨을 거 아니에요?"
"아무도 연락을 안 받아서 메시지를 남겨놓긴 했는데 아마 지금 이 시간에 버스를 준비시킬 정비공도 없을 거고, 운전할 기사도 구하기 힘들 거야"
자 앞서 말했던 세 가지 옵션 중 하나가 먼지가 되어 바람에 날려갔다
한국이라면 항상 예비분의 버스가 준비되어 있고 여유인력이 있을 텐데!라는 불평은 의미가 없다.
"이 시간에 지나가는 버스 없잖아요... 제일 빨리 지나가는 버스 A사도 일곱 시쯤 지나가지 않아요?"
"그렇지..."
아니다 야간 운행을 하는 다른 버스 회사가 있다 라는 대답을 기대했던 내 마지막 희망도 아까 그 먼지와 함께 흩날려갔다. 내 손 한 뼘만 한 맥가이버 칼도 버스의 거대한 엔진 앞에서는 조그만 개미 같아 보였다. 안될 것 같다, 들어가 쉬라는 기사님과 승무원님의 말에 터덜터덜 돌아와 버스에 올랐다.
파노라믹 뷰는 이런 상황에도 밤하늘의 별을 반짝반짝 비춰주었다. 예뻤다.
나에게는 두 가지 선택권이 있었다. 하나는 이미 고장 난 버스를 두고 왜 고장이 나냐고, 점검을 미리 안 해서 그런 거 아니냐고, 새해부터 오도 가도 못하고 이게 뭐냐고 불평불만을 쏟아내는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그래도 버스가 운 좋게 밤하늘이 아름답게 보이는 곳에 서서 별구경 할 수 있어서 좋다고, 작은 것에서도 감사할 것을 찾아내는 것이었다. 우리는 후자를 택했다. 어쨌든 문제는 풀리기 마련이고 해결책은 나타나기 마련이다.
두 시간쯤 지났을까 우리는 꾸벅꾸벅 졸다가, 또 잠깐 깨서 몇 신지 보고 다시 졸고 있었고 기사님과 승무원님도 잠시 들어와 쉬고 있었다. 그때 승객들 중 스무 살쯤 됐을까 막 소년티를 벗은 것 같은 청년 하나가 계속 작은 소리로 불평하다가, 자기감정을 못 이겨 마침내 큰 소리로 욕 섞인 불만을 쏟아냈다
"아니 씨X 무슨 X같은 버스를 타서 XX 이게 무슨 일인데 X 내가 누군지 아나 이 XX들이"
옆에 찰싹 붙어 앉은 젊은 여자도 팔짱 낀 손을 부비적 거리며 대답했다
"그니까 이게 뭐야~ 우리 계획 다 있었는데 그치? 아이 X쳐 그렇지?"
기분 나쁠 법도 한데, 기사님과 승무원님이 듣자마자 일어나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곧 다른 회사 버스가 지나가는 대로 양해를 구해보겠다고 했다. 그러나 오히려 그런 반응에 그 청년이 더 기고만장해져 더 큰 소리로 쌍욕을 하고, 옆에 아가씨도 촐싹대며 감정에 부채질했다.
"진짜 별 X 지도 않은게 하 XX 내가 진짜 XX"
"그치? 아 XX 짜증 나게 그렇지?"
점점 욕의 수위가 올라가고, 내가 이해하는 욕보다 이해하지 못한 욕이 많아질 때쯤 옆의 친구가 참고 참다가 한국말로 조용히 말했다.
"한마디 해야겠는데..."
상대는 170이 될까 말까 한 마른 체격의 청년, 내 친구는 182cm에 90kg 나가는 거구
친구가 나서면 상대가 겁먹을 것은 당연했지만 인적 없는 시골길 위의 버스 안은 그야말로 무법지대, 상대가 칼이나 총이라도 가지고 있으면 상황이 더 복잡해질 수도 있었다.
"참아... 쟤네가 예뻐서가 아니라 혹시 여기에서 무슨 일 나면 경찰도 안 와...
새해 새벽에 거리 이름도 제대로 없는 데 묘비 세우고 싶지 않아..."
기사님과 승무원님도 내 친구의 말아쥔 주먹을 보고 조용히 고개를 내저었다.
멸치 청년은 열심히 욕하고, 멸치 청년 여자 친구는 옆에서 열심히 부채질하는데 같잖지도 않았다. 오히려 전에 봤던 동물 다큐멘터리가 생각났다. 수컷 새는 암컷 새에게 구애하기 위해 깃털을 한껏 세우고 몸을 부풀린단다. 멸치 청년도 나름의 번식 깃을 가다듬고 암컷 앞에서 몸집을 부풀려 보이려는 구애행위에 열심이었을 뿐이다. 그리고 나름대로 성공을 거둔 것 같아 보였다. 콩그레츄레이션.
그렇게 또 시간이 흘러 저 멀리서 뿌옇게 해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나는 그렇게 코스타리카 국경 시골길, 고장 난 버스 위에서 새해를 맞았다. 햇살이 공평하게 창문을 넘어 버스 안에 내려앉았다. 새벽부터 고생한 기사 아저씨 어깨 위로, 지쳐 잠든 승무원님 눈썹 위로, 쌍욕을 퍼붓던 멸치 청년 못된 입 위로, 엔진룸 앞에서 공구 건네주고 라이트 비춰준다고 고생한 내 친구의 더러워진 손 위로.
그날 나는 니카라과의 가장 아름다운 밤과, 가장 아름다운 아침을 보았다
Epilogue 01
아침 일곱 시가 좀 지나자 A사의 버스가 저 멀리서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기사 아저씨가 입고 있던 형광색 조끼를 벗어 휘둘렀다. 버스가 서고 기사가 내려 무슨 상황인지 물었다. 자총 지종을 들은 기사가 말했다.
"다는 못 태우고 두 세 사람은 남으셔야 될 것 같은데..."
승무원님이 차례로 캐리어를 꺼내 주다가 내 캐리어와 친구 캐리어가 어떤 것이냐고 묻더니 먼저 버스에 실어주었다. 우리가 제일 먼저 버스에 오르며 기사님과 승무원님에게 인사했다. 마찬가지로 버스에 오르기를 기다리던 사람들 중 맨 뒤에 선 멸치 청년의 얼굴이 하얗게 질린 게 볼만했다. 그의 용기 (허세)는 간밤의 어둠이 그의 약함을 잠시 감춰주었을 때 나왔던 순간의 것이었다. 해가 밝았을 때 청년은 볼품없는 깃발 빠진 작은 새 한 마리에 불과했다.
결국 그 청년과 그 청년의 헝클어진 머리의 여자 친구는 다른 승객들이 붙어 앉으며 자리를 만들어줘서 결국 탈 수 있었다. 간밤의 허세는 어디로 갔는지 한풀 꺾인 기세로 둘이서 계속 구시렁거렸다. 뭐 X 하고 XX 해 버린 달 땐 언제고, 작은 소리로 둘이서 같은 말을 되풀이하는 것을 보고 있자니 어지간하다 싶어 웃음이 났다.
놓고 왔어야 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