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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성일 Jan 12. 2022

기아 모닝으로 코스타리카 산 넘기

#높은산을오르고 #거친강을건너고 #깊은골짜기를넘어서 #바다로!


중미에 살다 보면, 죽음에 한 발자국 더 가까이 살게 된다. 중미의 치안이나 안전문제 때문일 수도 있지만, 애초에 중미는 한국보다 위험이 발생할 확률이 훨씬 높은 열악한 인프라와 환경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에 비해 그 안전망을 벗어나서 위험에 직면할 만한 돌발상황을 마주할 가능성이 높다. 예를 들자면 한국은 어디든 잘 닦인 도로와 체계적으로 구축된 교통환경이 있기 때문에 사실 길이 아닌 곳을 들어가서 위험해질 확률이 낮다고 해야 할까? 서론이 거창했다. 오늘 이야기는 서론과 크게 상관없는 이야기로서, 코스타리카에 살던 당시 내가 타던 기아 모닝을 타고, 산을 오르고 강을 건너며 깊은 골짜기를 넘은 이야기다. 괜히 환경 탓을 했지만 사실 길을 잘못 든 운전자 (본인)의 잘못으로 시작된 이야기, 그리고 괜히 내 차 탔다가 야밤에 내려서 차를 밀어야 했던 내 친구의 이야기


미국에서 친구가 왔다.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라 더더욱 반가웠다. 워낙 좋아하는 친구라 당시에 일하던 회사에 양해를 구하고 목요일은 오전 근무만 하고 금요일에 휴가를 내, 목금토 일정으로 코스타리카에서 유명한 휴양지인 마누엘 안토니오 바다에 가기로 했다. 나도 아직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곳이지만 바다가 아름답다고 들어서, 멀리까지 와준 친구를 꼭 데리고 가고 싶었다.


(사진출처: manuelantoniopark.com)


목요일 오전 근무를 마무리할 때쯤까지만 해도 그날 내가 얼마나 속으로 울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바다는 생각만 해도 설레고, 함께 가는 친구도 정다우니, 얼마나 즐거운 여행이 될까 라는 생각에 웃음이 비실비실 새어 나왔다. 내가 있었던 코스타리카의 수도 산 호세에서 목적지인 마누엘 안토니오는 대략 170km로, Jaco를 지나는 도로를 타면 3시간 정도면 도착할 수 있는 거리였다. 다만,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아 목요일이면 restricción vehicular (차량 운행제한) 걸리는 날인데...


코스타리카에는 도로 혼잡을 방지하기 위해 차량 운행제한을 의무적으로 실시한다. 내가 있었을 당시에는 번호판의 끝자리에 따라, 특정 요일에는 차량을 운전할 수 없었다. 내 번호판 끝자리는 7, 원래대로라면 목요일에는 큰 도로에서는 운행이 불가능했다. 도로마다 경찰이 있어서, 멀리서부터 번호판을 체크하고 벌금을 물렸으므로 평소에는 목요일에는 운전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파란 바다가 우리를 부르는데.


그래서 생각한 꼼수는 경찰이 없을만한 도로로 우회해서 가자는 것이었다. Waze라고 중남미에서 흔히 사용하는 네비 앱에서는, 차량 운행제한에 영향을 받지 않는 국도나 작은 골목길 같은 대체 루트도 제공했다. 큰 도로로 가는 것보다는 훨씬 느리겠지만 그래도 바다에 갈 수 있다는 사실, 그게 어딘가. 심지어 돌아가지만 그렇게 차이가 나는 것도 아니었고, 4-5시간이면 도착한다는 네비 알림에 마음이 설렜다. 마음만은 이미 마누엘 안토니오에서 삐냐 꼴라다를 마시며 햇빛을 쬐고 있었다.


그 대체 루트를 구글에 한 번쯤은 검색해봐야 했다

어떤 길인지 대충은 알아보고 갔어야 했다.

여기서부터 내가 지금까지도 한순간 한순간을 기억하는 험난한 여정이 시작된다.


그때 함께했던 친구가 말하는 이 여행, 이 험난한 여정의 프리뷰☆


처음에는 작은 도로 들일뿐, 큰 도로와 큰 차이가 없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우리는 노래를 틀고 한껏 수다를 떨며 여행의 설렘을 만끽하고 있었다. '뭔가 이상하다', 라는 생각이 든 것은 점점 주위에서 도시의 풍경이 사라지고 인적이 드문 도로에 들어섰을 때였다. 그럼 또 어떤가, 길이 안 막히면 더 좋은 일이지. 그렇게 또 한참을 가다가 '확실히 뭔가 잘못됐다'라는 생각이 든 것은 산길에 접어들었을 때였다. 아스팔트 도로가 아니라 산길이라니, 내 트렁크에 예비 타이어가 있던가? 자갈길에 타이어가 상하지는 않을지 걱정하는 나와는 달리, 내 친구는 이때까지도 긍정적이었다.


"성일아 로드트립 너무 신난다! 여기 너무 좋아, 쥐라기 공원 같아!"


(사진: 당시 친구가 실제로 쥐라기 공원 같다며 찍은 사진)



그래, 좋아하니 다행이다 라며 영혼 없이 대답하고, 나는 점차 더 긴장하기 시작했다. 아직 갈길이 먼데 벌써부터 산길이 나오다니, 네비 상 대충 2시간 정도는 남은 상태였는데 그 두 시간 동안 산길을 타야 하는 건가 싶어 정신이 아득했다. 게다가 숲길이다 보니 속도를 낼 수 없어 낮은 속도로 운전하다 보니, 점점 해가 지고 있었다. 산은 해가 빨리 진다더니 그때만큼 그 사실을 원망한 적이 없다. 산에서 타이어가 펑크라도 나면 어떡하지? 예비 타이어도 없는 것 같은데, 보험사에 전화하면 여기까지 오긴 하려나? 휴대폰 배터리도 다 떨어지면 어떡하지?라고 잔뜩 긴장하고 예민해진 내 마음도 모르고 내 친구는 그저 해맑았다. 숲길을 달렸다. 내 작고 소박한 모닝이 점점 산을 오르고 있었다. 어디까지? 구름 위까지


당시 친구가 찍은 영상



말 그대로 구름이 내 눈높이보다 아래 있었다. 1000cc도 안 되는 작은 엔진의 모닝이 으쌰 으쌰 힘을 내어 산을 오른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니 해가 지는 그 풍경은 참 아름답더라. 그러나 그 당시에 나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길이 워낙 험해 타이어에 무리가 갈까 봐 일부러 10-20km를 유지했다. 그것보다 더 속도를 내고 싶어도 그럴 수도 없었다. 거의 패닉 상태였음에도 내가 정신을 빠짝 차려야 어떻게든 이 산을 넘고 바다에 간다...라는 마음으로 속으로 울며 운전했다. 길이 이리저리 휘어지고, 큰 돌이 길 한가운데 박혀있고... 그렇게 한참 가다 보니 앞에 불빛이 보였다. 인가가 나타난 것이다.


가까이 가보니 드럼통에 불을 피워놓고 그 앞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멀리서 볼 때는 그 불빛이 너무 반가웠는데 가까이 가보니 또 머리가 쭈뼛 섰다. 그중 몇몇이 손에 마체테를 들고 있는 것이다. 날이 새파랗게 선 칼들을 보고 있자니, '와 여기서 죽으면 시체가 수습은 되려나' 싶었다. 무섭다 라는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그 마음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엄마 보고 싶다...' 어쨌든 우리가 제대로 가고 있는 것인지는 확인해야만 하기도 했고, 자세히 보니 일가족인 것 같아, 멀리에 차를 대고 창문을 내려, 이 길이 마누엘 안토니오로 가는 길이 맞냐고 물었다. 그중 마체테를 든 소년 한 명이 차 가까이로 다가왔다. 풀 액셀을 밟으려는 순간, 뒤에서 아주머니가 뭐라고 소리쳤고, 소년은 화들짝 놀라더니 마체테를 옆에 멀리 던져놓고 차 가까이에 와서 말했다


맞아요 이렇게 쭉 가다 보면 마누엘 안토니오가 나와요


젠장! 아예 길이라도 잘못 든 것이라면 어쩔 수없지 하고 돌아갈까 했는데 맞는 길이라니. 그래 온 길을 다시 돌아가는 것보다 계속 나아가는 게 옳은 일이었다. 다시 돌아가는 것보다 계속 가서 도착하는 게 더 빨랐다.


"혹시 얼마나 더 가야 마누엘 안토니오가 나올까요?"

"음, 대략 2시간 정도?"


두 시간 남았다고 해서 두 시간 왔더니 앞으로 두 시간이 더 남았다니

내가 뫼비우스의 띠를 달린 것인가 왜 도착시간이 자꾸 늘어나는 건지

그래도 어쩌겠는가 울면서라도 가야지, 속으로 펑펑 울고 대체 루트를 선택한 나 자신을 원망하더라도 갈 길은 다 가야지... 고맙다고 인사하고 다시 숲길로 들어섰다. 솔직히 말하면, 그때까지만 해도 그것보다 최악의 상황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있었다. 그것보다 더 최악이.




강이 나왔다. 정확히 말하자면, 네비 앱에서 표시하는 도로가 강에 가로막혀 있었다. 우리 말고도 다른 차가 한대 있었는데, 그쪽에서 설명하기를 폭우로 강이 넘치면서 도로가 침수됐단다. 그래도 강을 건너서 가면 1시간은 단축할 수 있다고, 자기가 앞서 갈 테니 따라오란다. 아저씨, 당신 차는 SUV 4륜이지만 제 차는 귀엽고 앙증맞은 기아 모닝인데요... 제가 모세가 아닌 이상 이 길로는 못 갈 것 같은데... 난감해하는 나를 보며 아저씨는 다른 길을 가리켰다. 일반 숲길인 대신 1시간 정도 더 걸릴 거라고. 나에게는 선택지가 없었다.


이쯤 되니 차 안 분위기가 싸했다. 나는 예민했고, 내가 책임져야 하는 상황이라는 생각에 긴장했다. 한참 마음속으로 찬양을 부르다가, 주기도문을 외우다가, 또 한참 속으로 울다가... 그렇게 해맑고 걱정 없는 내 친구마저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렇게 내 작은 모닝은 침묵을 싣고 코스타리카 숲 속을 한참 달렸다. 산을 올랐다가, 다시 내려왔다가, 또 한참 오르다가 불길한 소리가 들렸다.


졸졸졸...


시냇물 소리가 났다 시냇물 소리가! 이게 무슨 말이냐면! 내가 가야 하는 길이 또 강으로 막혀있다는 이야기올시다!


일단 차를 세웠다. 그리고 강을 살펴보았다. 아까처럼 모세의 기적이 필요할 정도로 큰 강은 아니었지만 모닝에게는 부담스러운 크기의 작은 시 냇줄기였다. 여기에서는 어쩔 수가 없다. 건너봐야 한다라고 마음먹고 울며 겨자 먹기로 차를 몰았다. 조심조심 건너되, 혹시라도 미끄러지거나 쓸려가지 않도록 어느 정도의 힘은 필요했다. 그 미묘한 밸런스를 맞추며 우리의 대견한 모닝은 무사히 강을 건넜다. 그 시 냇줄기에도 굴하지 않고 무사히 강을 건넌 것이다! 만세를 부르기도 전에 바로 그다음 역경을 만났다. 강 주위여서 인지 주변이 자갈이 아니라 모래로 되어있었다. 문제는 워낙 고운 모래라 모닝이 거기에 빠져버렸다는 것이었다.


"허윽... 차가 앞으로 안 나가고 계속 밀려... 어떡하지?"

"... 헉... 아냐 괜찮아 내가 뒤에서 밀어볼게, 네가 힘껏 밟아서 가보자"

"아냐 나 못하겠어, 어떡해 정말 어헉흐억.."


이미 패닉에 패닉을 덮어쓴 나를 침착하게 보듬고 본인이 내려서 밀어볼 테니 한번 가보자는 내 친구. 그런다고 차가 빠질까?라는 내 말에도 괜찮다고 나를 진정시켜 줬다. 그래 거기에 계속 빠져 있을 수는 없으니 뭐라도 해봐야 했다. 친구가 내렸고, 뒤에서 힘껏 밀었으며, 나는 액셀을 밟았다.


부아앙 소리와 함께 모닝이 힘겹게 모래에서 빠져나왔다


그리고 결국 목적지에 잘 도착!이라고 글을 맺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삶이란 호락호락하지 않다. 모래에서 빠져나온 후로도 끝이 없는 것만 같은 산길을 느릿느릿 달렸다. 가로등도, 도시의 불빛도 없는 산길을 오직 헤드라이트에 의지해 그저 앞으로, 앞으로.


그렇게 계속 앞만 보고 운전하는데, 어느 순간 앞이 없어졌다. 앞에 아무것도 없었다. 길이 있어야 하는데, 길이 끊어졌다. 여기까지 와서 다시 돌아가야 하나 라는 생각을 하며 차에서 내려 앞을 살펴보았다. 어둠 사이에서 희미한 길이 보였다. 다리였다. 흡사 낭떠러지처럼 보였던 곳에 아주  아주 낮은 다리가 있었다. 이걸 다리라고 불러도 될진 모르겠지만, 밑에는 작은 강이 흐르고 있었고 작은 다리가 놓여있었다. 낭떠러지처럼 보였던 이유는 다리에 난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리보다는 아스팔트 단순 구조물에 더 가까웠다. 최소한의 보호장치도 없이, 양 옆에 아무것도 없이, 일직선으로 놓인 아주 좁은 다리


혹시라도 방향을 잘못 틀면 그대로 추락하는 구조였다. 세상에 어떤 인간이 어떤 생각으로 이런 다리를 만든 건지. 안 그래도 어둡고 운전석에서는 다리가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데, 감에 의지해서 다리를 건너는 수밖에 없었다. 일 초 일 초가 지나가는 시간의 흐름이 피부에 그대로 느껴질 만큼 긴장해서 차를 몰았다.


다행히 문제없이 다리를 건넜다


그 이후로도 계속 산길을 달렸다. 달렸다는 말이 정확한 표현인가? 아직도 차는 10-20km 정도의 속도밖에 내지 못했다. 점점 산 밑으로 내려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 내려갔다가 다시 오르는 것이 아니라, 점점 밑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1시간 이내로 도착한다는 네비 앱의 알람이 반가웠다. 멀리서 도로의 불빛이 보였다. 큰 도로에 합류하게 된 그 순간, 나는 몇 시간에 걸쳐 축척되었던 긴장을 풀 수 있었다. '아, 여기서는 죽어도 시체 수습이 안 될 걱정은 없겠군.'


얼마 지나지 않아 마누엘 안토니오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이정표가 도로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


밤 9시, 출발한 지 7시간 만에 마누엘 안토니오에 도착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오후 다섯 시쯤에는 도착해서 숙소에 짐을 풀고 천천히 구경하다가 여유롭게 저녁을 먹을 예정이었지만, 밤 9시가 넘어서야 숙소에 도착했다. 체크인을 하고 짐을 옮기는 사이 시간은 훌쩍 흘러 열 시가 넘었다. 근처에 연 식당도 많이 없어서 다시 차를 타고 헤매다가 겨우 열린 식당을 하나 찾아 저녁식사를 했다. 피곤하고 힘들기보다는 감개무량했다. 살아서 바닷가에 도착하고, 살아서 밥을 먹는구나. 삶에 감사했다.




참 다이내믹하고 버라이어티 한 삶이라는 생각을 가끔 한다.

왜 이렇게 힘든 일을 찾아다니는지,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지 가끔 원망스러울 때도 있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들려줄 수 있는 내 이야기가 하나 더 생긴다는 사실이 반갑다. 오늘도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에게도 나의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지 있었으니까. 


나는 고생과, 흥분과, 불운과, 설렘과, 슬픔과, 행복과, 우울과, 활기와, 긴장과, 모험과, 행운으로 가득 한 내 인생을 사랑한다.



기아 모닝으로 코스타리카 산 넘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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