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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성일 Jan 13. 2022

니카라과 세계 첫 부부 대통령·부통령의 살인

#우는소리 #타는냄새 #핏빛거리

열네 살 때부터 니카라과, 코스타리카를 거쳐 지금은 멕시코에 살고 있는 나에게 가끔 재밌는 질문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너의 문화적 정체성은 어떻게 되니?"


외적으로는 누가 봐도 동양인이지만, 내가 해외에 오래 살았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나의 내면의 정체성도 궁금해한다. 나는 법적으로도 문화적으로도 스스로를 한국인이라고 생각한다. 중남미 여러 나라에 살았고, 거주가 아니더라도 여러 나라를 많이 다녀봤지만, 내 고유의 정체성과 뿌리는 한국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의 정체성과는 상관없이 내가 거쳐온 모든 중남미 나라들을 애정하고 소중히 여긴다. 그중에서도, 내가 나의 제2의 조국이라고 생각하는 나라가 있다. 니카라과라는 곳이다. 내가 사랑하는 땅, 니카라과.


중고등학교를 니카라과에서 졸업했으니 햇수로만 따져도 6년을 살았다. 청소년기에 와서 그만큼 살았으니 니카라과는 나에게 애착도 증오도 깊은 애증의 사이다. 지금은 그 땅을 떠나 살지만, 아직도 니카라과에 대한 애정이 깊다. 멕시코에서 가끔 마주치는 니카라과 사람들이 반갑고, 그곳의 음식을 그리워하고, 가끔 나 스스로에게서 아직도 남아있는 니카라과의 문화를 발견하곤 한다.


니카라과는 민주주의를 표방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사회주의 나라이며, 소모사 독재정권을 몰아낸 혁명영웅인 다니엘 오르테가 가 새로운 독재자로 들어앉은 나라다. 독재자를 몰아내며 자유와 정의를 외쳤던 사람이 새로운 독재자가 되다니, 입맛이 쓰다. 결국 혁명을 위해 함께 피 흘리며 투쟁한 국민들에게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지배자의 이름이 바뀌었을 뿐이다. 몇 년 전 인터넷 서핑을 하다가 니카라과에 대한 한국어 기사를 본 적이 있다.


니카라과 세계 첫 부부 대통령·부통령 탄생

오르테가 대통령은 임기 중 각종 사회보장 정책을 실시하고 안정적 경제 성장을 이끌었을 뿐만 아니라 치안도 개선해 빈곤층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부통령 당선이 확실시되는 무리요 여사는 시인이자 작가로, 정부 대변인 등을 지냈다.
무리요는 오르테가의 정치적 후원자이자 동료로 활동하며 각종 사회 복지 정책을 입안해 오르테가의 대중적 인기를 견인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독재자 부부를 첫 부부 대통령 부통령 탄생이라고 일컬으며, 한껏 우호적으로 쓰인 기사를 보며, 현지 사정을 잘 모르는 기자들은 이렇게 표현할 수 있구나라는 생각에 이해가 가면서도 마음이 아팠다. 2018년, 7개월 동안 그 독재자들에게 희생된 수많은 국민들이 생각나서 마음이 쓰렸다. 독재자는 독재자일 뿐이다. 그리고 살인자는 살인자 일 뿐이다.


오늘 이야기는 니카라과 독재자 부부의 살인에 대한 고발이자, 나와 친구들이 니카라과에서 피부로 느낀 2018년에 대한 이야기이며, 약 400명의 억울한 죽음에 대한 헌정 에세이이다




2018년 6월, 나는 동생의 졸업식에 참석하기 위해 니카라과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 있었다. 그 해 4월에 시작된 시위로 나라 상황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한 번뿐인 동생의 졸업식이니 꼭 가야 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자면 그때까지만 해도 그렇게까지 나쁜 상황일 줄은 몰랐다. 내가 니카라과에 도착하기 2개월 전,  2018년 4월, 3 연임 대통령이자 독재자인 다니엘 오르테가가 국민보험공단 재정 고갈을 지적하며 건강보험제도의 개혁 (Reforma)을 발표했다. 발표 안의 주요 개혁 사항은 이랬다


근로자 & 사업주 부담 건강보험료율 인상

연금 지급 나이 상향

연금지급액 5% 하향


다시 말하면 노동자들에게 '더 많이 내라, 덜 돌려줄 테니'라고 말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오르테가 정권의 부정부패와 잘못된 자산운용이 적자의 원인임에도 불구하고 그 책임을 국민들에게 돌렸다. 니카라과 사람들은 천성이 순진하고 수동적이지만, 이 개혁 발표는 이 수동적인 사람들을 거리에 나가 시위하기에 충분했다. 눈을 어디로 돌리든 간에 부정부패의 증거들이 뚜렷했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생명의 나무라고 불리는 (클림프의 생명의 나무에서 따왔다) 대형 조형물들이었는데 설치에만 $2,000,000 USD (이백만 불)이 들었고 매 년 그 조형물들의 조명 전기세가 대략 $4,000,000 USD (사백만 불)에 달했다. 가난한 나라인 니카라과에서 그 정도의 비용이면 100가구에 전기를 공급할 수 있는 금액이다.


사진: Noticias Ahora https://www.noticias-ahora.com/muere-arbol-vida-nicaragua/

이 조형물이 뜻하는 바가 대체 무엇인지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했지만 뚜렷한 답이 없었다. 가톨릭과 민간신앙을 조합해 신비주의적 이미지를 만들어 내 정치에 활용한 부통령 로사리오 무리요가 주술적 힘을 충전하기 위한 일종의 장치라느니, 본인의 신비주의적 영향력을 과시하기 위한 일종의 공포정치의 일환이라느니... 여러 이야기가 있었지만 여당의 상징물이라는 것 외에 특별한 의미가 없다. 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조형물에는 국민의 혈세를 갖다 쓰면서, 재정이 부족해지자 국민들에게서 더 짜내겠다는 발상은 독재자가 아니면 할 수 없다.



국민들이 분노했다.

거리로 나갔다.

개혁안에 대한 시위 팻말을 내걸고 행진했다.

정부는 경찰과 군대를 내세웠다.

국민들이 총에 쓰러졌다.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판단이 선 오르테가 정권이 개혁안을 폐지하겠다고 공표했지만, 개혁안은 분노를 터뜨리는 하나의 계기였을 뿐 국민들의 분노는 몇 년 전부터 꾸준히 축적되어왔다. 국민들은 멈추지 않았다. 계속해서 시위하고, 행진했다. 레온이라는 도시에서 시작된 시위는 수도인 마나과 그리고 그 밖의 지방도시로 계속해서 퍼져나갔다. 그들은 대통령 부부의 사임을 요구했다.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계속해서 행진하고, 목소리 높여 사임을 촉구하고, 시위했다.

계속해서 사상자가 나왔다. 30명, 70명, 그리고 100명을 넘으며 자릿수가 바뀌었다.


사상자가 나온 그 자리에 있었던 지인이 말했다


"새빨갰어. 피로 새빨갰다고. 시간이 지나도 지워지지 않고 새빨갰어"


국민을 지켜야 하는 경찰이 국민을 막아섰고, 국민을 보호해야 하는 군인이 국민들을 향해 총을 겨누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멈추지 않았다. 정권의 상징인 생명의 나무 조형물들을 넘어뜨리고, 사임을 촉구했다. 그 중심에는 대학생들이 있었다. 죽었다. 수십 명 수백 명이 죽었다. 어머니의 날 (5월 30일)에는 죽은 학생들의 어머니들이 죽은 학생들의 가방을 메고 대신 행진했다. 그리고 이런 팻말을 들었다.


"당신의 자식이었더라도 그럴 수 있는가"


그 학생들을 가르친 교수와 선생님들도 함께 걸었다.


"이 아이들이 잘못된 것이라면 그렇게 가르친 나의 잘못이다"


점점 상황이 악화되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실종되고, 다치고, 죽었다. 정부는 스나이퍼까지 배치했다. 스나이퍼를 배치하기 좋은 위치에 있던 가정집에 들이닥쳐 협조를 요구했다. 그 가족들은 받아들이지 않았고 2살짜리 아이를 포함한 일가족이 살해당했다. 미디어가 차단되었다. 친정부 성향이 아닌 뉴스들이 더 이상 송출하지 못하게 되었다. 페이스북 라이브를 통해 상황을 전하던 아나운서가 라이브 도중 살해당했다. 나라 전체가 멈추었다. 교도소를 개방하고 범죄자들을 풀어 주동자들을 쫓는다는 소문이 들렸다. 거리로 나가 시위하던 대학생들이 사망 직전  마지막 유언을 페이스북 라이브를 통해 남겼다. 아니, 울부짖었다는 표현에 가깝다.


"엄마 미안해, 나가지 말라고 했는데 내가 내 조국을 위해 그럴 수 없었어. 엄마 미안해 그런데 나 후회하지 않아..."


그곳은 지옥이었다.


해외 외신 기자들이 공항에 도착했으나 세관에서 취재 관련 장비를 발견하는 즉시 여러 가지 핑계를 대 그들을 추방했다. 미디어가 제한되었고 이 나라에서 자행되고 있는 그 끔찍한 살인들은 부분적으로만 전달되었다. 그 와중에 대통령이 카메라 앞에 나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단 한 발도 발포도 명령한 적이 없습니다. 단 하나의 생명이라도 나에게는 너무나 소중합니다". 살인자는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그 살인자 앞에서 국민들은 죽어간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불렀다.



내가 니카라과에 도착한 것은 시위가 시작되고 2달 후였다. 졸업식마저 그 전 주 까지도 안전상의 이유로 확정되지 않았다. 그 전날까지도 취소될 수도 있다고 했다. 당일 졸업식이 확정되고 그때까지 남아있던 소수의 학생들만 모여 졸업식이 시작되었다. 그중 수석으로 졸업한 학생이 울며 연설했다.


"밖에는 우리 아버지들이, 어머니들이, 형제자매들이 죽어가는데 우리는 이렇게 졸업식을 치르는 사치를 누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외국인임에도 불구하고, 이 비극을 피부로 느꼈다. 교장선생님은 시위에 참여했다가 추방당했으며 (그나마 외국인이라서 추방에 그쳤다), 한 친구는 비자 발급 프로세스 중 이민청에서 사람이 찾아와 페이스북에 공유한 시위 관련 영상을 문제 삼았다고 했다. 집 밖에서 들리는 총소리 때문에 벌벌 떨어야 했고, 누군가를 쫓고 쫓기는 소리도 심심치 않게 들렸다. 집 밖으로 나가는 것은 더더욱 위험했다. 대형 쓰레기 수거함으로 단지 앞을 막고 돌아가며 경비를 섰다. 우리는 외국인 밀집 지역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위험이 산재함을 느꼈다.


졸업식 참석 후 다시 돌아가기 위해 공항으로 가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곳곳에 tranque라고 불리는 철 덩어리가 박혀있었다. 사람들은 총을 들었고 무언가를 태우고 있었다. 흉흉했다. 니카라과는 더운 나라지만 공항으로 향하는 내내 벌벌 떨었다. 두려움에 몸을 떤다는 것이 무엇인지 그때 실감했다. 아버지는 앞차를 본인이 몰고, 엄마와 자식들을 뒤차에 태우셨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통화가 연결된 핸드폰을 들고 운전했다. 아버지가 앞서가서 도로 상황을 살피고, 막혀있으면 우회하는 식이었다.


"당신 잘 들어. 혹시라도 내가 앞에서 무슨 일이 있더라도 돕지 말고 차 돌려서 가, 알겠어?"


그만큼 위험했다. 무슨 일이든 있을 수 있었다. 실제로 차를 타고 가다가 총에 맞은 사람에 대한 소식도 들려오던 때였다. 다행히 나는 무사히 공항에 도착했고, 다행히 부모님도 집까지 안전히 도착하셨다. 눈물이 났다.




누구는 이 7개월에 시위에 대해 폭동이라고 말하고, 누군가는 내전이라고 하고, 또 혹자는 실패한 혁명이라고 한다. 약 4년이 지난 지금, 니카라과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피로 물들었던 로터리는 중앙을 싹 갈아엎고 인공정원으로 만들고, 사람이 죽어갔음이 명확하게 남은 거리들도 그 증거들을 모두 지웠다. 플랫카드도, 시위 팻말들도 모두 철거되었다. 독재자들은 여전히 독재자들로 남았다. 그리고 3달 전, 그들은 네 번째 연임에 성공했다. 텅 빈 투표소들도 그들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 글은 무거운 마음으로 아파하며 썼다.

나는 이방인이지만, 이 문제는 국적과 인종을 초월한 사람의 문제가 아닐까?

이 글을 내가 좋아하는 시로 마친다.



만일 죽음이


만일 죽음이 와서 날 찾거든
부탁이니 내 말 좀 전해주오
내일 다시 나를 찾아오라고

나는 아직 갚지 못한 빚이 많이 남아있고
시 한 편도 끝내지 못하였고
아무에게도 작별 인사를 하지 못했으니
여행 떠날 때 입을 옷 한 벌 마련하지 못하였고
남에게 부탁받은 일도 아직 끝내지 못했고
내 서랍장에 키도 꽂아두지 못하였다고

마땅히 나의 친구들에게 해주어야 할 말들을 해주지 못했고
아직 피지 않은 장미의 향기를 맡아보지도 못하였고
내가 어디서 왔는지, 내 뿌리를 찾지도 못하였으며
밀려있는 편지들에 답장도 쓰지 못하였다고
그리 전해주오, 아직 내 손을 씻지도 못하였다고.
내 아들 하나 품에 품어보지 못하였고
낯선 나라에서 산책길 따라 걸어본 일도 없고
바다의 일곱 가지 베일도 보지 못했고
그 바다의 노래도 들어보지 못했다고

만일 죽음이 와서 날 찾거든
부탁이니 날 좀 이해해주고, 날 좀 기다려달라고 전해주오
내 연인에게 이별의 입맞춤을 전하지 못했고
내 가족들과 악수도 나누지 못했으며
책 위에 쌓인 먼지도 털어내지 못하였다고
내가 좋아하는 노래 휘파람 불어보지도 못하였고
아직 자살시도도 못해봤다고, 그리 전해주오
내 사람들이 자유로워지는 것도 아직 보지 못하였다고 전해주오

그를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고 이야기해주오
하지만 나는 인생길에 제대로 올라서 보지도 못하였다오


Si la muerte

Si la muerte viene y pregunta por mí
Haga el favor
De decirle que vuelva mañana
Que todavía no he cancelado mis deudas
Ni he terminado un poema
Ni me he despedido de nadie
Ni he ordenado mi ropa para el viaje
Ni he llevado a su destino el encargo ajeno
Ni he echado llave en mis gavetas
Ni he dicho lo que debía decir a los amigos
Ni he sentido el olor de la rosa que no ha nacido
Ni he desenterrado mis raíces
Ni he escrito una carta pendiente
Que ni siquiera me ha lavado las manos
Ni he conocido a un hijo
Ni he emprendido caminatas en países desconocidos
Ni conozco los sietes velos del mar
Ni la canción del marino
Si la muerte viniera
Diga por favor que estoy entendido
Y que me haga una espera
Que no he dado a mi novia ni un beso de despedida
Que no he repartido mi mano con las de la familia
Ni he desempolvado los libros
Ni he silbado la canción preferida
Ni me he reconciliado con los enemigos
Dígale que no he probado el suicidio
Ni he visto libre a mi gente
Dígale si viene que vuelva mañana
Que no es que le tema, pero ni siquiera
He empezado a andar el cami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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