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입동
- 예년보다 이른 11월 말에 많은 눈이 내렸는데요. 일부 산간지역엔 이르게 내린 눈으로 설국을 방불케 하는 모습이라고 합니다……
라디오 소리가 실내 공간에 울렸다. 유운은 일기예보처럼 흘러나오는 다소 높은 어조의 목소리를 들으며 햇볕을 막아주던 블라인드를 올렸다. 이른 아침, 하늘 높이 떠오른 해가 눈부셨다.
운이 잠시 창문 너머의 풍경을 보다가 여유롭게 미소 띤 얼굴로 걸음을 옮겼다. 드르륵. 꼭 닫혀있던 미닫이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열리자, 그녀가 푹신한 털로 장식된 신발을 신고선 현관을 나서며 기지개를 켰다.
하룻밤 사이에 소복이 쌓인 눈은 마을을 흰색으로 칠해놓은 지 오래였다. 파란색 지붕을 얹은 주택의 굴뚝에서 피어나는 희뿌연 연기. 입 밖으로 숨을 내뱉으면 하얗게 이는 입김.
누군가 그랬다. 이런 시골에 누가 빵을 사 먹으러 오겠냐고.
“맞아.”
아무도 안 사러 오지. 유운이 나긋하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아무도 안 오면, 내가 다 먹는 거지 뭐.”
새하얀 눈꽃들로 뒤덮인 아침. 여전히 살랑거리며 내리고 있는 함박눈이 겨울의 초입을 알리는 기분이었다.
운이 천천히 걸어 나와서 익숙하게 마당의 대문을 밀자, 기름칠이 덜 된 철제문이 쇳소리를 내며 열렸다. 대문 앞 나무로 된 작은 입간판 위에 내려앉은 하얀 눈을 한번 소매로 쓱 훑고는 입간판에 쓰인 반듯한 검은색 글씨를 확인했다.
[행복과자점]
잠시 입간판을 바라보던 운은 다시 발걸음을 돌려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현관문을 열자 훈훈한 공기와 밝고 따스한 분위기가 그녀를 맞이했다.
마당 쪽으로 난 큰 네모난 창으로 아침 햇살 한 줄기가 들어와, 원목 테이블 위에 놓인 투명한 유리병 속 꽃을 비추고 있었다. 말끔하게 정리된 원목 테이블 네 개가 한적하게 놓여 있고, 그 뒤로는 카운터와 부엌이 깔끔하게 나뉘어 있었다.
카운터 옆에 놓인 나무로 된 쇼케이스 너머 부엌에는 에스프레소 머신과 적당한 크기의 전기오븐에서는 아침부터 바쁘게 준비한 브라우니 반죽이 달콤한 초콜릿 냄새를 진동하며 구워지고 있었다.
그녀가 잠시 그 앞에 서서 부풀듯 말듯 올라오는 반죽을 구경하다가, 냉동실 문을 열어 미리 사둔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확인하고 선반에서 슈거파우더를 꺼내 들었다. 이어서 부엌 안 네모난 탁자 위에 도구들을 올려두고 나서야, 어느 정도 준비가 끝난 건지 의자에 앉아 미리 데워두었던 우유를 한 모금 들이켰다. 그리고 매일 아침의 시작을 알리는 것처럼.
딸랑. 경쾌한 종소리와 함께 익숙한 듯 남자가 크림색 목도리를 풀며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남자가 건네는 인사에 운이 습관처럼 반달눈을 하고 웃으며 입을 열었다.
“어서 오세요.”
그가 습관처럼 디저트와 커피를 주문했고, 그녀 역시 익숙하게 그의 카드를 받아 들고는 긁기 전에 오늘의 디저트와 어울리는 음료에 관해 물었다.
“오늘은 브라우니인데, 카페라테 따뜻하게 괜찮으세요?”
남자는 한 번 눈을 도르륵 굴리더니 ‘네, 좋아요.’하고 짧게 답했다.
그는 말 수 없이 성실하게, 꾸준하게 가게를 방문하는 편한 단골손님이었고. 운은 그에게 별다른 말을 걸지 않는 오지랖 없는 가게 사장님이었다.
운은 곧장 에스프레소를 추출한 다음 데운 우유에 고소한 캐러멜 향이 도는 까만 샷을 부었다. 따뜻하게 데운 흰 우유 사이로 갈색 그러데이션을 그리며 퍼져나가는 모습을 구경하다가 시선을 올려, 평소처럼 창가 자리에 앉아있는 남자를 보았다.
반달 모양의 브랜드 로고 자수가 가슴께에 새겨진 회색 맨투맨 차림에 조금 부스스한 새카만 머리칼과 대조되는 밝고 깨끗한 피부가 눈에 띄었다. 그는 노트북 앞에서 한쪽에 턱을 괸 채, 골똘한 표정으로 대충 마우스를 딸각거리고 있었다.
남자의 이름은 ‘김윤오’
그가 말해준 적은 없지만, 한 달 내리 같은 카드를 긁고 있자면 기억하지 않는 것이 더 어려웠다. 그는 한 달 전부터 출몰하기 시작한 단골이었다.
어디서 온 건지, 매일 눈가에 어두운 눈 그늘을 달고 사는 도시인 같지만. 또 모순적으로 느긋했다. 캐주얼한 차림새도 분위기도 어딘지 모르게 느슨한 느낌이었다. 남자는 무감한 표정으로 뻐근한 목을 양쪽으로 움직이며 뚝뚝 소리를 내고는 다시 무언가 일을 시작했다.
‘나랑 또래 같은데.’
이 시골에서 흔치 않은 젊은이. 매일 비슷한 시간대, 같은 자리에 앉아서 골똘한 얼굴로 노트북을 만지작거리다가 가는 사람. 운은 정체를 알 수 없는 남자를 곁눈질하다, 어느 순간엔 저도 모르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다 남자가 노트북을 사용할 때만 쓰는 은색 테 안경, 그 너머의 무심한 눈동자와 마주쳤다. 운이 아차한 순간.
띵. 오븐에서 소리가 들렸다. 그녀가 반사적으로 뒤돌아서서 오븐 앞으로 향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브라우니 팬을 꺼내서 식힘 망에 올려두곤 카페라테 한 잔을 나무 쟁반에 받쳐 그의 앞에 내려놓았다.
“음료 먼저 드릴게요. 브라우니는 한 김 식혀야 해서요.”
“네, 감사합니다.”
딱 주말만 빼고 한 달 내내 출근하듯이 방문하는 손님. 그에 대해 인간적으로 궁금하긴 했지만, 괜한 궁금증이 단골손님을 피곤하게 느껴질 수도 있단 생각이 든 탓에 무언가 먼저 물어본 적은 없었다.
운이 생각을 갈무리하곤 어느새 한 김 식은 브라우니를 정사각형 모양으로 잘라 흰 접시에 담았다. 그 위로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크게 한 스쿱 떠서 올리고, 슬라이스 아몬드를 뿌린 다음 슈거파우더를 흰 눈처럼 솔솔 뿌리자 먹음직스러운 오늘의 디저트가 완성됐다.
운이 그것을 보고 밝게 웃으며 쟁반에 올려 브라우니를 내가자, 잔뜩 인상을 찡그린 채 노트북 화면을 죽일 듯 보고 있던 남자가 낮게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감사합니다.”
그렇게 한참 동안 노트북과 씨름하던 오전 단골이 오후 3시쯤이 되어서야 돌아가고 나면, 다음은 오후 단골이 올 차례였다.
“오늘은 어떤 거 만들었어요??”
마당부터 가게 안까지 급하게 뛰어 들어온 여자아이의 얼굴이 찬바람에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 아이는 양어깨에 맨 분홍색 가방을 내려놓는 것도 잊은 채 운에게 말했다.
“초콜릿 냄새 나는 거 같은데!”
활기차게 안으로 들어선 조그만 여자아이 뒤로 남자아이가 잔뜩 풀이 죽은 채 뒤따라 들어왔다. 기껏해야 초등학교 저학년처럼 보이는 여자아이는 반짝거리는 눈으로 카운터 앞에 서 있는 운을 쳐다보았다.
“연준이는 왜 이렇게 기분이 안 좋아 보여?”
운은 평소와 다르게 기운 없이 어깨가 축 처진 연준에게 그리 물으며, 두 잔의 유리컵에 흰 우유를 따랐다. 그 사이 아이들은 카운터와 가까이 있는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받아쓰기 빵점 맞아서요!”
의자에 앉은 소율이 연준을 대신해서 발랄하게 대답하자, 연준의 조그만 입술이 삐죽 튀어나왔다.
“진짜. 김소율…….”
“박연준이 죄다 한 글자씩 실수했거든요.”
연준은 맞은편에 앉은 소율을 눈으로 흘겼다. 그런 둘의 모습을 귀여운 듯 운은 입가에 미소를 띤 채 바라보다가 부엌에서 쟁반을 들고나와 아이들 앞에 내려놓았다. 오전과는 다르게 브라우니가 한입 크기로 먹기 좋게 잘려있었다.
“오늘 브라우니 구웠는데, 다들 맛 좀 봐줄래?”
둘은 손에 쥔 포크로 작은 조각을 콕 집어 동시에 입에 넣었다. 소율은 활짝 웃었고, 연준은 조용히 입을 오물거렸다.
“우와! 진짜 달아요! 이게 뭐예요?”
“브라우니라는 건데. 평소에 먹던 초코케이크랑은 좀 다르지?”
운의 물음에 소율이 크게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였다.
“브라우니는 보통 초콜릿이랑 버터, 그리고 호두를 넣고 만드는데. 일반 초코케이크보다 훨씬 단단하고 진하고 쫀득해. 연준이도 입에 맞아?”
운은 소율과 달리 별다른 말이 없는 아이에게 물었다.
“……네, 맛있어요.”
조그만 목소리로 말하는 연준을 보며 운이 사뿐하게 웃곤 말을 이었다.
“있지. 브라우니는 실수로 만들어진 거다?”
“실수요?”
“브라우니가 처음에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여러 이야기가 있는데. 그중의 하나가 실수거든. 원래 케이크에는 베이킹파우더라는 게 들어가. 반죽을 부풀리기 위해서 넣는 건데, 어느 날 어떤 사람이 초콜릿케이크를 만들면서 실수로 베이킹파우더 빼놓은 거야.”
소율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운의 다음 이야기를 채근했다.
“베이킹파우더가 빠진 초코케이크는 부풀지 않았는데. 대신 훨씬 초콜릿 맛이 진하고, 쫀득해서 너무 맛있는 거야. 그게 바로 지금 너희가 먹은 브라우니고.”
우와. 소율이 신기하다는 듯 입을 벌렸다.
“처음엔 실수였는데, 그걸로 맛있는 디저트가 만들어졌다는 이야기가 재밌지 않아?”
그녀는 연준이 내려놓은 포크로 다시 브라우니 한 조각을 찍어 건넸다.
“연준아, 실수가 나쁜 것만은 아니야. 누군가의 실수로 이렇게 맛있는 빵도 먹을 수 있게 됐잖아?”
그 말에 기운 하나 없이 시무룩했던 연준의 까만 눈동자가 초롱초롱해졌다. 그때, 익숙한 듯 여자 손님이 가게 문을 열고 들어왔다.
“집에 안 오고, 왜 또 여기 왔어?”
“엄마!”
소율의 엄마 은정이었다. 아이가 해맑게 웃으며 은정의 앞으로 깡충 뛰어가더니 품에 안기자, 은정은 못 말린다는 표정으로 자신의 품에 안긴 아이의 정수리를 내려다보며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죄송해요. 우리 소율이가 또!”
은정이 난처한 표정으로 말하자, 운은 손사래 쳤다.
“아니에요. 마침 한가해서 심심할 때 딱 와주는데요! 덕분에 항상 지루할 틈이 없어서 좋아요.”
운이 밝은 미소를 띠고서, ‘차 한 잔 드실래요?’ 묻자 여느 때처럼 은정이 고개를 끄덕이며 카드를 내밀었다.
“애들이 먹고 있는 것까지 같이 계산해 주세요.”
“아니에요, 이건 그냥 제가 주고 싶어서….”
“에이. 사장님. 이렇게 맨날 얻어먹기만 하면, 미안해서 못 와요. 딱딱 받아야지-.”
그 바람에 결국 못 이겨낸 운은 옅게 웃으며 카드를 받아서 들었다. 그리고 얼마 후, 은정이 아이들과 함께 앉아있는 테이블로 쿠키와 음료를 함께 내어갔다. 한쪽에 초콜릿이 살짝 발린 하트 모양의 버터 쿠키가 한눈에 봐도 꽤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이건 서비스예요. 이 정돈 그냥 받아주세요.”
운이 서둘러 덧붙이는 말에, 은정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그럼 나도 고맙게 먹을게요.”
그렇게 기분 좋게 소란스러웠던 한때가 지나자, 해가 저문 카페는 언제 그랬냐는 듯 한적해졌다.
운은 부엌에서 홍차 티백을 우려내곤 손님용 테이블에 앉았다. 자신이 좋아하는 한적한 저녁 시간대.
네모난 창문 너머 어둡고 맑은 겨울 밤하늘과 빛바랜 논밭 앞에 죽 늘어서 있는 주황색 가로등. 그 불빛 아래로는 굵은 눈발이 하늘하늘 내려오고 있었다.
하얀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찻물이 담긴 머그잔을 양손으로 붙잡고 있자, 온몸이 노곤해지는 기분이었다.
호록. 그녀는 뜨거운 차를 한 모금 들이켜곤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내일은 눈이 더 많이 쌓여 있으려나…….”
뭐, 눈이 많이 와도. 내일은 휴무니까. 그냥 따듯한 매트가 얹어진 침대 위에 누워 늦잠을 자고 천천히 일어나서 눈사람이나 만들어 볼까.
잔잔하고, 따뜻하고, 고요하게 흘러가는 겨울은 처음이었다. 줄곧 힘들고, 바쁘고 정신없었는데.
손에 쥔, 몇 안 되는 것들을 내팽개치고 왔는데. 이상하게도 후회는 없었다. 훗날 불안감이 날 집어삼킨대도, 그건 나중의 일일 테니까.
그러니까 오늘 하루도.
“잘 살았다. 유운.”
그녀가 빙긋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