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모습에 운이 미간을 찌푸렸다. 아이가 바로 옆에 있는데도, 미혼이라고 잡아떼는 뻔뻔함이란. 운이 못 볼 사람을 본 것 같은 눈으로 저를 보자 윤오는 억울했다. 그가 한층 낮춘 엄한 목소리로 아이를 불렀다.
“김소율. 삼촌이 이런 걸로 장난치지 말랬지.”
아이를 내려다보며 말하자, 아이는 꺄르르 웃으며 둘의 표정을 번갈아 보았다. 운은 바보처럼 둘을 바라보다가, 눈치껏 다시 물었다.
“……아버님 아니세요?”
“아니라니까. 제 조카예요.”
운이 그제야 윤오의 말에 수긍한 듯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말을 덧붙였다.
“여기 집 주인이, 제 사촌 형 되는 사람이라서요.”
그가 땅 밑이 꺼질 듯한 한숨을 내쉬고는.
“일단 들어오세요. 뭐, 제 집은 아니지만.”
다시 확인시켜 주듯 말하며 철제 현관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그리고 윤오가 영어 학습지나 마저 풀라며 소율을 방으로 밀어 넣었다. 아이가 사라지자 그제야 운은 어색한 얼굴로 엉거주춤 거실의 가죽 소파에 앉았다.
“근데 저희 형은 왜 만나러 온 거예요?”
남자가 익숙하게 흰색 머그잔에 녹차 티백을 넣고, 따뜻한 물을 부어 운이 앉아있는 거실 테이블로 내어오며 물었다.
“어……. 딸기 납품 계약 때문에요. 잘 마실게요.”
운은 남자가 테이블에 내려놓은 따뜻한 머그잔을 두 손으로 잡았다. 엄청 뜨겁지 않은 정도의 온도. 그냥 주전자에 펄펄 끓인 게 아니라, 적당히 마시기 좋은 따뜻한 온도에 맞춰 데운 물 같았다.
그녀가 찻물을 한 모금 마셨다. 오랜만에 남이 타주는 차라서 그런지, 더 향긋하고 맛있게 느껴졌다.
“아. 녹차 괜찮아요?”
그가 뒤늦게 물었다. 운이 ‘네’하고 대답하며 가볍게 웃었다.
운은 어쩐지 지금의 상황이 저번에 자신이 핫초코를 타 줬던 상황과 비슷한 것 같다고 생각하며 다시 한 모금을 들이켰다. 시선을 들자, 맞은편 소파에 앉은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양팔에 팔짱을 낀 채로 뚫어져라 자신을 보고 있는 것이 부담스러워서 고개를 돌리려던 순간.
“근데 사장님은.”
그가 느릿하게 말을 거는 탓에, 그 목소릴 들으며 운은 어색해서 목이 타는 듯 차를 마시다가.
“제가 옆에 아이를 두고도, 모른 척하는 매정한 아이 아빠 같았나 보죠.”
마지막 말에 사레가 들렸는지 연거푸 기침하다가 큼큼 소리를 내며 목을 가다듬었다.
“……그건 죄송해요. 제가 그만 착각해서.”
“뭐, 그럴 수도 있죠. 내 인상이 그렇게 나쁜 사람으로 보일 수도 있지.”
“…….”
“그래요, 그렇게 매정한 사람으로 보일 수도 있지.”
이어지는 남자의 말에 운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가시방석에 앉아있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남자는 너털웃음을 흘리며 ‘장난이에요.’하고 실없이 말했다. 그러다 운이 안도의 숨을 내쉬는 걸 보고 작게 웃었다.
“근데 사장님.”
“네?”
“저번에, 우리 친구 하기로 하지 않았어요?”
“어, 음. 네.”
운은 대화의 흐름을 알 수 없는 남자를 따라가다가, 또다시 고개를 갸웃거리는 자신을 발견했다.
“근데 우리 서로 나이도 모르고, 이름도 모르는 거 같아서.”
“이름은 저번에 그쪽이 말해줬잖아요.”
김윤오라고. 운이 덧붙이는 말에 그가 무심한 눈으로 그녀를 보면서 다시 입을 열었다.
“정 없네요. 이름도 알려줬는데, 그쪽이라뇨. 그리고……”
띠띠띠띠띠띠. 빠르게 눌리는 현관문 도어록 소리가 윤오의 말허리를 잘랐다.
“아이고!”
그리고 다른 남자의 목소리가 불쑥 등장했다.
“카페 사장님 벌써 와계셨구나-. 제가 너무 늦었죠?”
운이 고개를 올려 목소리가 들린 곳을 바라보자, 윤오와 많이 닮진 않았는데 어딘가 비슷한 느낌이 드는 건장한 남자가 서 있었다.
막 농사일을 마치고 들어온 듯, 겨울임에도 짧고 검은 머리칼은 땀에 젖은 듯 축축해 보였다. 그리고 목에는 하늘색 수건이 길게 늘어져 있었다.
‘30대 후반? 40대 초반?’
운은 눈으로 그의 나이를 가늠해 보려 했다. 그러다 명함에 쓰여 있던 ‘김서준’이란 이름이 떠올랐다.
“안녕하세요.”
그녀가 어색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웃으며 인사했다. 그 순간.
벌컥, 방문이 열렸다. 그리고 높고 맑은 목소리가 울렸다.
“아빠!”
소율이 쏜살같이 튀어나와 함박웃음을 지으며 서준의 품에 쏙 안겼다. 서준도 하나뿐인 딸을 보고 환하게 웃으며, 아이를 안아 올렸다.
“김소율! 아빠 땀 냄새 나. 이따 안아줄게.”
“아니, 아빤 흙냄새 나는데! 딸기 냄새도 나고!”
나 흙냄새 좋아해!
소율이 경쾌하게 웃으며 하는 말에 남자가 따라 웃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윤오는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살짝 젓고 있었다. 하지만 서준은 개의치 않고 소율을 양손에 높게 들어 안고서 한 바퀴를 빙 돌려준 다음 바닥에 사뿐히 내려주며 부엌에서 찬물을 한 컵 갖다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자 소율이 고개를 위아래로 크게 흔들더니 금세 부엌으로 사라졌다.
“제가 생각보다 늦었어요.”
서준이 사람 좋게 허허 웃으며 말했다.
“어, 근데……. 소율이 아버님이시면…….”
운은 뒤늦게 명함을 건네줬던 소율의 엄마 은정을 떠올렸다. 그러다 당연한 사실을 혼자서만 늦게 깨달은 사람처럼 손뼉을 마주쳤다. 그 모습에 서준이 허허 웃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맞아요. 우리 와이프가 사장님네 카페 단골이잖아요. 아무튼 지금이 제일 바쁠 땐데, 커피 한 잔은 마셔야겠다고 오늘도 가더라고요.”
그가 하소연처럼 늘어놓았지만, 딱히 누군가 탓하고자 하는 말은 아닌 것 같았다. 되려 마지막에 은정을 변호하듯 사람은 잠깐의 꿀 같은 휴식이 있어야 더 나아갈 수 있다며 말을 나지막하게 덧붙였으니까.
어느새 맞은편에 앉아있던 윤오의 존재를 까맣게 잊고, 서준과 소율에 대한 소소한 수다를 떨었다.
“형. 용건.”
윤오가 흘깃 눈으로 운을 가리켰다. 그가 중간에 끼어들지 않았다면, 오늘 이곳에 왔던 목적도 잊고 신나게 수다만 떨다 갈 뻔했다. 운도 서준과 같이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둘을 보며 절레절레 고개를 젓고서 바람이라도 쐬려는 듯 현관문을 나섰고, 서준도 늦게나마 본론을 내어놓듯 다시금 서두를 열었다.
“원래 소량은 이렇게 어려운데, 뭐 동네 분이시기도 하고! 소율 엄마가 사장님 팬이라고, 제발 딸기 부담 없게 만드시면 좋겠다고 하도 말해놔서.”
그가 품종과 사이즈 가격표가 인쇄된 A4용지 한 장을 내밀며 간단한 내용을 전했다. 그렇게 납품 관련 몇 마디 대화가 오가자마자, 금방 끝을 맺었다.
“그럼 이렇게 납품해드리면 될까요? 주문량은 나중에 유동성 있게 수정해 주셔도 돼요.”
사실 시골에서 재고 따지는 게 어려운 거 저희도 뻔히 잘 아는데요, 뭐. 그가 친근하게 웃으며 말을 덧붙이자, 운이 활짝 웃으며 인사했다.
“네, 감사합니다.”
“더 궁금하신 건 없구요? 뭐, 티엠아이도 괜찮고-.”
사투리도 하나 없는 표준어. 운은 그게 조금 궁금했지만, 그걸 묻기도 애매해서 없다고 답하려는 찰나.
“어, 뭔가 궁금하신 거 같은데. 말 아끼시는 거 같은데-. 아, 혹시 사투리?”
운이 자신도 모르게 무언의 긍정을 하자, 서준은 딱 맞췄다는 듯 신명 나게 다시 말을 늘어놓았다.
“전 원래 서울에 살았거든요. 그냥 평범하게 회사 다녔었죠. 귀농한 지 이제 5년 됐나? 그렇게 됐네요. 아, 제가 묻지도 않은 말에 너무 말이 길었죠? 습관이라.”
그가 사람 좋게 웃는 미소에 운이 따라 웃었다.
“아니에요. 전 듣는 거 좋아해요.”
“그럼 다행이구요. 오늘 소율 엄마가 다른 일 때문에 없어서, 내가 수다 떨 사람이 없었거든요. 너무 오래 붙잡아뒀네. 밤도 늦었는데.”
서준은 그렇게 말하며, 일어나서 가져온 하얀 스티로폼 상자 하나를 커다란 검은색 비닐봉지에 담아서 운에게 내밀었다.
“이건 샘플이라고 생각하고 그냥 먹어봐요. 우리 집 딸기가 진짜 달거든요. 우리 집 거라서 하는 말이긴 한데. 진짜 달아요. 하하하.”
호쾌하게 웃는 서준의 목소리를 들으며 운은 잠시 고민의 기색을 띠다가, 이내 그의 성의를 감사히 받아들였다.
“감사합니다. 그럼 가볼게요.”
현관에서 서준과 소율의 늦은 배웅을 받고 나서려는 순간.
“차 안 가져왔죠?”
갑자기 뒤에서 나타난 윤오가 물었다.
“어, 네.”
그녀는 그의 물음에 얼떨결에 대답했다.
“형, 사장님 좀 내려드리고 올게.”
“어, 그래. 밤도 늦었는데 그게 낫겠다.”
“어……. 전 괜찮은데.”
“시골 밤길은 안 괜찮으니까, 그냥 따라와요.”
어어? 당황한 운이 꾸벅 서준에게 인사를 하고서 윤오의 뒤를 쫓았다. 그가 마당 앞에 세워놨던 검은색 SUV 차량의 조수석 문을 열었다.
운이 어색한 모양새로 차에 올라탔다. 차량의 실내는 겨울밤 찬 공기와 뒤섞인 숲속의 나무 냄새가 났다. 그녀가 시답잖은 생각을 하는 동안 운전석에 탄 윤오가 금세 안전벨트를 매고 시동을 걸어 매끄럽게 집 앞마당을 빠져나갔다.
그녀는 능숙하게 핸들을 돌리는 남자의 옆모습을 힐긋 바라보았다. 검은색 머리칼에 검은색 눈. 자신이 잘 알고 있는 누군가와 완전히 반대되는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불현듯 떠오른 생각을 의식적으로 지워내며 운이 그에게 말을 걸었다.
“오늘은 무슨 일 있었어요?”
뜬금없는 운의 물음에 남자가 무슨 뜻이냐는 듯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냥. 오늘은 안 오시길래…….”
평일에 그가 오는 건 당연한 일이라, 운은 은연중에 당연히 오늘도 올 것으로 생각했는지도 몰랐다. 그러자 그는 나긋하게 웃음기 배인 목소리로 운에 물었다.
“혹시 저 기다렸어요?”
“아니요.”
운은 저도 모르게 정색하는 얼굴로 단칼에 반박했다. 꽤나 단호한 운의 답변에 윤오는 가만히 소리 죽여 웃을 뿐이었다.
“아쉽네. 안 기다렸다니.”
나름 이 시골에서 사귄 유일한 친군데. 그가 태연하게 덧붙였다.
“맞다. 사장님은 나이가 어떻게 돼요?”
“그건 왜요?”
윤오가 묻자, 그의 얼굴을 잠시 관찰하던 운이 흠칫하며 반문했다. 하지만 그는 개의치 않는 듯 다시 대꾸했다.
“친구 하기로 했으니까. 그 정돈 호구 조사해도 되지 않나.”
“…스물여덟이요.”
아. 그가 짧게 소리 내고는 까딱 고개를 끄덕이고는 한 박자 느리게 물었다.
“동갑이네. 말 놔도 돼요?”
“……어, 네.”
운이 당황해서 더듬으며 답하자, 그는 다시 웃음을 흘리고서 말을 이었다.
“그리고 이름.”
“유운.”
“외자야?”
“응.”
“아-. 윤이 아니었구나.”
마치 대단한 사실을 알게 된 사람처럼 그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러다 운이 의아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느꼈는지 슬쩍 운을 보더니 모자란 설명을 더 했다.
“아, 별건 아니고. 사실 이름이 ‘윤’인 줄 알았거든. 동네 어르신들이 윤이라고 부르는 걸 얼핏 들은 것 같아서.”
운은 딱히 신경 쓰지 않았는데, 장황하게 늘어놓는 그의 설명에 그녀가 고개를 갸웃할 때였다. 다시 듣기 좋은 중저음이 나지막하게 자신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유운.”
이름 예쁘네.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목소리 탓인지, 오랜만에 다른 사람에게서 듣는 자신의 이름이 새삼스러웠다.
운은 힐긋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사실 옷에 딱히 크게 신경 쓰진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평소의 캐주얼한 옷차림도 태가 나서 곧잘 어울렸다.
“어, 다 왔다.”
운은 자신의 집을 발견하고는 반가운 기색을 띠었다.
끽. 차가 집 앞에 멈춰 서자 기다렸단 듯 빠르게 안전벨트를 풀고 그에게 인사했다.
“태워다주셔서 감사합니다.”
“어. 우리 말 놓기로 했는데. 우리 친구잖아.”
“아, 그렇지…….”
그녀가 작게 중얼거리고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어색하게 인사말을 건넸다.
“그래, 고마웠어. 잘 가-.”
운이 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한 치의 미련도 없이 뒤돌아서서 총총거리는 발걸음으로 활짝 열려있는 마당의 대문을 넘었다. 근데 자신이 대문을 안 닫고 갔던가. 그녀가 아주 잠깐 의아해하면서도 그 안에 들어섰다.
대문 밖의 윤오는 서서히 멀어지는 운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이내 불이 들어온 실내를 확인하고 슬슬 차를 돌리려고 기어를 드라이브에 두고서 문득 자신이 현관문을 열자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을 응시하던 운의 모습을 떠올라 나직하게 웃었다.
가을 내내, 서울 집에서 머무르다 이곳에 돌아왔을 때. 마을에 새롭게 터를 잡은 뜻밖의 이웃.
‘윤, 갸가 어렸을 때부터 손재주가 좋았지.’
동네 어르신들에게서 익숙하게 들리던, 자신의 이름과 비슷하던 그 이름을 떠올렸다. 할머니들이 옹기종기 담소를 나누고 있던 가운데, 우연히 그곳이 지나가던 날.
‘난 또. 내 얘기 하시는 줄 알았네. 그래서 윤이 누군데요?’
‘갸? 있어-. 여기 오래 살던 할머니 손녀딸. 어릴 땐 방학마다 와서 곧잘 놀다 갔는데, 크고 나선 한참 못 봤제. 고 어린 게 그새 다 커서, 여기서 장사를 다 하고. 시간 참 빠르다고 안 하나.’
편의점 커피 하나도 쉬이 찾아볼 수 없는 이곳에서 뜬금없이 카페를 연 또래. 유운은 그것만으로도 자신의 궁금증을 자아내기엔 충분했다.
“저!! 김윤오 씨!!”
미련 없이 집으로 들어갔던 운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앞에서 헐레벌떡 뛰어오는 모습에 윤오가 드라이브에 놓았던 것을 다시금 파킹으로 옮겼다. 그리고 창문을 내렸다.
“무슨 일이에요?”
“그! 벌레 잘 잡아요?”
붉게 상기된 얼굴로 묻는 말에 그는 그만 어이가 없어 픽 웃고 말았다.
“사장님이 리액션 그렇게 큰 거 처음 보네요.”
철컥. 그가 안전벨트를 풀고는 운전석에서 내렸다.
“못 잡진 않으니까, 가봅시다.”
“…….”
“사장님보단 나을 것 같네. 내가.”
“……다행이네요.”
급해지니, 다시 존댓말을 쓰는 운이었지만 윤오는 자연스레 넘기고 운전석에서 내렸다.
“어떤 벌레길래. 미련도 없이 돌아선 사람이 그런 속도로 달려와요-.”
“그……. 엄청 크고……. 다리가 엄청 많아요……. 잠깐 환기한다고 창문을 열어뒀는데, 까먹어서……. 거기서 들어온 것 같아요…… .”
운이 횡설수설하자, 윤오가 ‘그래요, 가봅시다’라며 태평하게 운의 뒤를 따랐다. 운을 따라 들어선 가게 안의 한 가운데에는 택배 박스가 정갈하게 엎어져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윤오가 운에게 고개를 돌리자, 그녀는 머쓱한 목소리로 말했다.
“도망갈까봐 우선 잡아둔 건데요….”
윤오는 직접 보지 않았어도 눈에 그려지는 듯한 상황이라고 생각하며, 박스로 덮어놓았던 것을 살짝 들춰보곤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진짜 다리가 많네.”
“역시 못 잡으시겠죠…….”
운은 윤오에게 별로 큰 기대는 없었다는 듯 말하자, 그가 살짝 발끈했다.
“아니, 누가 못 잡는대요? 그냥 그렇다는 거지.”
그리 말하곤, 어느샌가 현관에 있던 쓰레받기와 빗자루를 찾아 들곤 ‘이거 좀 써도 되죠?’라고 운에게 물어보고서 한쪽 무릎을 굽혀 바닥에 붙인 윤오가 덮어뒀던 종이 상자를 들어내고 재빨리 벌레를 쓰레받기에 쓸어 담았다.
“한겨울에 돈벌레라니. 그것도 밖에서 어떻게 살아 들어왔는지 모르겠네.”
혼잣말처럼 말한 윤오는 자리에서 일어나 현관문을 열고 다시 마당으로 나섰다. 운은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헐레벌떡 그의 뒤를 쫓아 나왔다. 윤오가 마당 밖에 있는 길 너머에 벌레를 버리고 나서 뒤돌아보자, 눈을 깜빡이는 운이 보였다.
“돈벌레는 익충이라니까, 그냥 풀어주는 게 나을 것 같아서요. 한겨울에 살아남은 것도 나름 능력이니까.”
그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운은 어쨌든 벌레를 눈앞에서 치우는 데 성공했으니 이젠 아무래도 좋았다. 그녀가 감추지 못하고 눈에 띄게 안도의 숨을 내쉬고 있자, 윤오가 툭 말을 건넸다.
“신기하네. 한겨울에 돈벌레라. 사장님, 돈 많이 벌 건가 봐요.”
운은 그의 말에 그만 헛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저도 그랬으면 좋겠네요.”
이 시골에서 돈을 어떻게 번다고. 애초에 돈을 바라고 연 가게가 아니었으니까. 그도 잘 알 텐데.
“그나저나 홍차는 마셔봤어요?”
“아, 네.”
“어땠어요?”
“향도 좋고, 밀크티 하니까 맛있더라고요.”
운은 꼭 좋아하는 것들을 나열하는 아이처럼 말했다. 그런 운과 눈이 마주친 윤오의 눈매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그럼 나도 내일 마시러 갈게.”
“……어?”
“내일은 갈 거니까, 내꺼 남겨놓으라고.”
그가 나긋하게 웃었다.
“왜? 우리 친구 하기로 했잖아.”
“아……. 그랬지.”
운이 연신 어색한 표정을 가리지 못하고 대꾸하더니, 이내 나직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 내일 봐.”
그 모습에 윤오가 만족스러운 얼굴로 웃으며 손을 흔들어 보이곤, 마당의 대문을 나섰다. 운은 잠시 그가 멀어지는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이내 부엌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윤오에게서 선물 받은 홍차 티백을 담아놓은 노란색 틴케이스를 집어 들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브랜드의 홍차.
그냥 뜨거운 물로 우려서 차로 마셔도 좋지만, 이 종류는 냉침 밀크티로 만들어 먹어도 맛있다. 냉장고에서 우유를 꺼내 커다란 유리병에 붓고서 여러 개의 티백을 넣었다. 그리고 메이플 시럽의 양을 잘 조절해 가며 넣고 다시 냉장고에 보관했다.
내일이나 모레쯤 먹으면 적당히 달달하고, 진한 찻잎 향이 배어나겠지. 어젯밤 담아놓았던 것은 이미 다른 단골분들하고 조금씩 나눠마셔서 소진한 지 오래였다.
아이들에게도 몇 모금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카페인이 조금 걱정되긴 했지만, 좋아할 것 같았다. 골똘히 앉아서 생각하던 운이 기지개를 켜며 오늘 하루를 정리하는 듯 다이어리를 펼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