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취중 답변
오늘도 어김없이 평화로운 오픈 준비가 한창이었다. 아직 오븐에서 빼지 않은 시폰이 바쁘게 부풀며 갓 구운 빵 냄새를 풍겼다. 유운이 흐뭇한 눈으로 그것을 지켜보다가, 시폰에 어떤 크림을 곁들이면 좋을까 고민했다.
그러다 잠시 창문이 난 벽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네모난 프레임 너머로 마당을 가로질러 느릿하게 걸어오는 할머니 삼인방이 보였다. 아직 오픈까지 10분은 족히 남았지만, 겨울 공기가 차가워 손님들을 밖에서 기다리게 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어느 정도 주위 정리가 끝났는지 눈으로 재빠르게 훑고는 가게 문을 열었다.
“좋은 아침이여-.”
셋 중 가장 맡 언니인 영숙이 능청스럽게 건네는 인사에 운도 마주 웃었다.
“세 분이서 일찍 만나셨네요?”
운이 다시 가게 안으로 들어오며 말을 건넸다.
“원래 나이 먹으면 아침잠이 없어서 그려. 근데 미숙이가 눈뜨자마자 단 게 그렇게 먹고 싶다고-.”
그렇구나. 운이 단란하게 테이블에 자리 잡은 할머니들을 바라보며 나긋하게 웃었다.
“그런데, 아직 케이크가 덜 구워져서 시간이 좀 걸리는데. 괜찮으세요?”
“아휴 그래야지. 우리가 일찍 온 탓인디. 그나저나 냄새가 참 좋네.”
화사한 분홍색 상의를 차려입은 미숙 할머니가 그리 답했다.
영숙, 미숙, 성숙. 셋의 이름 끝에 달린 ‘숙’자는 같았지만, 셋은 성이 달랐다. 동네에서 숙자매라고 불리는 할머니들은 친가족보다 더 오래 함께 해온 서로가 가족 같다며 매일 같이 함께 동네를 거니는 사이였다.
창가에 앉은 셋은 손주 얘기로 이제 막 이야기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부지런하고 팔팔한 모습이 동네 젊은이인 자신보다 앞섰다. 운은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하다가 시폰에 곁들일 크림 준비를 시작했다.
모처럼 셋이 함께 방문했으니, 모두의 마음에 들 만한 케이크를 내어주고 싶었다. 첫 방문에는 카페에 들러준 동네 할머니들께 감사해서 차만 주문해도 자연스럽게 케이크를 서비스라고 대접했었다. 그렇게 두어 번쯤 더 대접했을까. 할머니들은 미안해서 더 이상 이렇게는 못 얻어먹는다며 크게 역정을 내면서 케이크를 팔라고 당부했다.
‘이렇게 맛있는 것들이 세상에 많은데. 이 나이까지 모르고 살았던 게 천추의 한이네. 그려.’
운은 이곳이 썩 마음에 들었다. 느슨한 분위기. 다정한 이웃들. 더 이상 남들보다 나아지려고 노력하고, 또 비교하지 않아도 죄를 짓는 것 같지 않았다.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어도 숨이 편안하게 쉬어지는 그런 곳이었다.
띵. 오븐의 타이머 소리와 함께 또 다른 손님이 들어섰다. 윤오가 언제나처럼 익숙하게 인사하며 들어서다가, 자신의 단골 창가 자리에 할머니들은 발견하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오라고 해서 왔는데, 오늘은 아침부터 가게가 문전성시네?”
“아, 왔어요? 아니, 아니. 왔어?”
존댓말과 반말 사이를 오가는 그녀의 말투에 그는 작은 웃음을 터뜨리며 평소와 다르게 주문대와 가까이 위치한 동그란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오늘 뭔 날이래, 여사님들?”
운은 어르신들에게 익숙한 듯 아는 체하는 윤오를 보며 양쪽을 번갈아 보았다. 곧 영숙이 혀를 차며 윤오에게 잔소리처럼 말을 늘어놓았다.
“아따. 얘가 어딜 그렇게 쏘다니나 했더니만. 맨날 여기 와서 죽쳤구먼.”
“뭘 또 죽친다고 그래. 일하는 거라니까.”
“넌 허구한 날 놀고 마시면 어떡혀, 젊은이가!”
영숙이 테이블에 앉아 못마땅한 눈으로 그를 보며 지적하자 옆에 있던 할머니들이 차례로 만류했다.
“뭐, 어뗘. 보기만 좋은디. 우리 한창일 땐, 땡볕에 허리 한 번 못 펴고 일헐 줄만 알었지. 이렇게 좋은 거 즐길 줄 알았당가? 내비둬-. 윤오, 쟈가 어련히 잘할까-.”
이 동네에서 수재로 유명혔는디 말여. 옆에서 만류하던 성숙이 말을 덧붙였다. 운은 넷의 대화를 라디오처럼 흘려들으며 오븐에서 다 구워진 시폰을 식힘 망에 꺼내놓았다. 그리고 빠르게 생크림을 치기 시작했다.
“사장님, 어제 돈벌레를 잡은 게 효과 좀 있었나 봐.”
윤오가 어느새 부엌 너머에서 말을 걸자, 정신없이 일하던 운이 그제야 시선을 돌렸다.
“……그러게.”
생크림을 완성한 운은 잠시 케이크 준비를 미뤄둔 채, 냉침해 놓은 밀크티를 꺼냈다. 그리고 손잡이 없는 투명한 유리컵에 얼음을 담고서 밀크티를 가득 따랐다.
“약속했던 밀크티.”
운이 그리 말하며 윤오의 테이블 위에 내려놓자, 그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바라보다가 한 모금을 들이켰다.
“달다.”
“아. 많이 달아?”
“아니. 많이 안 달고 맛있어.”
그의 대꾸에 운은 웃었다. 그리고 곧장 운은 발걸음을 돌려 숙자매가 있는 테이블로 다가갔다.
“오늘은 시폰 케이크가 나왔는데. 괜찮으세요?”
“시퐁? 그게 뭐여?”
미숙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묻자, 운은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카스텔라랑 비슷한데, 더 폭신하고 부드러운 케이크예요.”
미숙이 그녀의 말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고, 갑자기 옆에 앉아있던 영숙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내 정신 좀 봐! 마실 걸 안 골랐구먼!”
그렇게 말하며 그녀가 자리에 앉아있는 둘을 대신해 주문대 앞으로 나아갔다. 그 바람에 운도 덩달아 주문대 안으로 들어가 섰다.
영숙은 평소 그녀들의 취향을 고려해 캐모마일 차를 세 잔 주문하고, 조금 전 들었던 시폰 케이크도 빼먹지 않고서 세 조각을 주문했다. 한 조각으론 싸움이 날 것 같다는 이유에서였다.
유운이 다정한 셋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띠곤, 얼마 전에 동네 방앗간에서 사 온 고소하고 달콤한 콩가루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식힌 시폰 케이크를 보기 좋게 여섯 조각으로 잘라서 한 조각씩 흰 사기그릇에 담아 시폰 위로 방금 막 휘핑한 쫀득한 크림을 한 스쿱 얹고, 그 위로 콩가루를 솔솔 뿌렸지만 어딘지 모르게 조금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그녀는 잠시 그것을 바라보고 있다가 문득 며칠 전 졸여놓았던 통팥을 생각해 냈다.
“인절미 시폰 케이크 나왔습니다-. 케이크에 여기 통팥 조린 걸 곁들여 드시면 맛있을 거예요.”
차를 먼저 받아서 마시고 있던 셋은 운이 쟁반에 내어온 세 접시를 보고 환하게 웃었다.
“늘그막에 이런 좋은 곳이 동네에 생겨서, 입이 호강혀-.”
미숙이 그리 말하며 크림과 콩가루, 통팥 조림을 조금씩 떠서 시폰에 곁들인 다음 포크로 한입을 먹었다. 그녀의 얼굴엔 아이처럼 천진한 미소가 번졌다. 그러다 옆에서 영숙은 무언가 떠오른 듯 손뼉을 치며 입을 열었다.
“맞어! 이장님 생일 케이크를 사야 되는디. 내일 저녁에 커다란 케이크 하나 될랑가?”
“네?”
갑작스러운 생일 케이크 주문에 운은 놀랐지만, 초롱초롱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영숙에게 차마 어렵다고 거절할 순 없을 것 같았다.
마침 재료도 있고, 빨리 준비하면 그래도 홀 케이크 하나 정도는 완성할 수 있으려나. 운이 머릿속으로 냉장고의 재료들을 재빨리 계산해 보고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김윤오! 너도 빠지지 말고, 사장님 챙겨서 싸게 싸게 와라! 너 허는 것도 없으면서 허구한 날 바쁜 척 허는 거 다 알어!”
한 테이블 건너 안경을 쓰고 노트북을 두드리던 윤오는 난데없이 지목받곤 익숙하다는 듯이 약간의 한숨을 내쉬었다.
“사장님. 뭐라고 말씀 좀 해주시죠.”
“뭘?”
“여기 여사님들이 날 완전 백수로 안단 말이야.”
윤오가 음울하게 덧붙였지만, 운은 그저 어깨를 으쓱일 뿐 딱히 그를 두둔하는 말을 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그 역시 금세 알아챘는지 이내 포기한 기색으로 고개를 가로젓다가, 갑자기 운을 보며 물었다.
“그나저나, 너 술 좋아해?”
“술?”
운은 문득 치고 들어오는 윤오의 물음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갸웃하며 반문했다.
“이장님 생일 잔치. 내일이 없는 것처럼 달릴 거거든.”
“무슨 생신 잔치를 새내기 오티처럼 말해?”
그의 말이 조금 어이없다는 듯 픽 웃고는, 부엌으로 들어와 생일 케이크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버터, 밀가루, 달걀, 생크림. 다행히 기본적인 재료들은 예상대로 부족함이 없었다.
역시 어르신들이니까 생크림 케이크가 제일 무난하려나. 그렇게 고민하는 사이 한쪽에 턱을 괸 윤오가 그 모습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넌 아직 잘 모른다. 우리 마을을.”
“뭐?”
“어떻게 장수마을 칭호를 3년 연속 받았는지.”
***
운이 윤오가 말했던 장수마을 칭호에 가장 큰 공헌이 막걸리와 소주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기까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장의 팔순 잔치를 위해 마을회관에 마련된 잔칫상 위로 대강 봐도 수많은 초록색 소주병과 하얀 막걸릿병들이 눈에 띄었다. 겨우 오늘 하루 잔치를 위해 준비했다고 하기엔 꽤나 많은 양이었다.
“아아. 원, 투, 쓰리. 마이크 테스트허겠습니다-.”
마이크를 잡은 이장이 기세등등한 목소리로 소리를 내었다.
“아따. 요즘 동네에 자전거 도둑이 돈다는 말이 있는데, 문단속들 잘 허구. 엊그제도, 저어기 철수네랑 영숙이네 자전거가 없어졌다네?”
최근 동네에 있던 이슈를 전하는 이장의 목소리는 살짝 격양된 기색이었지만, 운은 고개를 한 번 갸웃거리고 평화롭게 테이블에 앉아서 마저 경청할 뿐이었다. 옆 테이블에선 동네 어르신들의 웅성거림이 있었지만, 운은 크게 개의치 않았다.
“에? 자전거 도둑?”
“어이구 그러게 말이여.”
아무렇게나 방치한 노트북과 스마트폰은 훔쳐 가지 않더라도 자전거는 훔쳐 가는 아이러니함이란. 운이 앞에 놓인 물을 한 모금 들이켜며 생각했다.
“근데 원래 바늘 도둑이 소도둑 된다고. 물건이야 잃으면 별수 없지만, 사람은 아니잖어. 위험할 수도 있응께. 문단속 조심허구, 저녁에 밤길도 조심허구.”
동네 아주머니는 혼자 사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지 않아서, 유독 운이 걱정됐던지 그녀의 두 손을 꼭 쥐고서 그리 말했다.
“아님, 윤오 총각한테 저녁에 일 있으면 부탁해! 어차피 하는 일도 없는 것 같더만.”
“이모님…… 저, 백수 아니라고요. 프리랜서……. 프……. 아니다…….”
그가 이젠 알 때도 되지 않았냐는 듯 허탈한 얼굴로 강조하려다 이내 포기했다.
“유운.”
운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 맞은편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넌 언제부터 그렇게 예쁨받고 있었어?”
그렇게 묻는 윤오는 볼멘소리였지만, 운은 나긋하게 미소 지었다. 오랜만에 받는 다정한 마음들이 싫지 않았다.
이장이 이제는 자전거 도둑 이슈를 넣어놓은 채, 동네의 다른 이야기를 꺼내려다가 주민들이 슬슬 지겨워하는 듯한 모습을 비추자 그제야 끝나지 않던 말을 멈추고 운이 가져온 생일 케이크를 테이블 가운데에 놓았다. 그리고 서둘러 불을 붙인 촛불을 후하고 불고는 커팅을 시작했다.
운이 준비한 생일 케이크는 2단 케이크였다. 겉은 통일성 있게 하얀 우유 생크림으로 모두 아이싱했고, 맨 위는 꼭지를 뗀 딸기 몇 알과 타임 허브로 장식한 뒤 슈거파우더를 뿌려서 겉으로 보기엔 2단 딸기 생크림 케이크처럼 보였다.
하지만 막상 커팅해보면 1층은 딸기와 우유 생크림이 층층이 들어 있어서 딸기 생크림 케이크, 2층은 콩가루를 섞은 고소한 인절미 크림이 가운데에 도톰하게 샌딩된 인절미 케이크였다.
다행히도 모두의 반응은 좋아 보였다. 작게 조각내서 납작하고 하얀 접시에 담은 생일 케이크를 맛보던 동네 주민들의 입가에는 해사한 웃음이 걸렸고, 이장도 2단 케이크가 흡족한 지 만면에 미소가 번졌다.
“난 떡 케이크가 최고인 줄만 알았는디. 이것도 부드럽고 좋구먼그래!”
사실 떡 케이크를 주문해 오라고 했지만, 전날까지 영숙 할머니가 이장의 생일 떡 케이크를 맞추는 일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고 전해 들었던 운은 이내 안심한 듯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홀가분한 얼굴로 연하게 웃으며 모두가 만족스럽게 케이크를 맛보는 모습을 구경하다가 얼떨결에 이웃 주민의 손에 이끌려 잔칫상이 차려진 테이블 중 하나에 새롭게 끼어 앉게 되었다.
운은 어정쩡하게 새로운 자리에 앉아있다가, 어느 순간부터 보이지 않는 윤오의 모습을 찾아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어색한 얼굴들만 있는 가운데, 그나마 친숙한 사람이라서 그런지 자신도 모르게 마음을 기대고 있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의 모습은 보이질 않았고, 곧 찾는 걸 멈추었다. 그러자 옆에선 초면인 아주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아가씨는 어쩌다 시골로 왔대?”
다들 묻지 않던 질문이 예상 밖의 인물에게서 아주 쉽게 나왔다.
아. 운이 그 물음에 짧게 침음하고, 맞은편의 아주머니를 응시했다. 오랜만에 멋을 내려고 빨간 장밋빛 루주를 입에 바른 듯한 아주머니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운은 느지막이 입술을 뗐다.
“그게…. 개인 사정으로…….”
“개인 사정? 그게 뭐길래 젊은 사람이 여기까지 와?”
“아토피가 있어서 요양하러 왔대요.”
불쑥 나타난 윤오가 물통과 종이컵을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대신 답했다. 윤오와 눈이 마주치자, 그가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아휴. 그렇구나. 그래 서울보다 여기가 공기도 좋고, 몸에 좋지.”
아주머니가 수긍한 듯 곧장 관심을 딴 데로 옮겨갔고, 운은 더 이상 어색한 대화를 이어 나가지 않아도 되었다. 그녀가 작은 안도의 숨을 내쉬다가 무심결에 윤오의 검은 눈동자와 마주쳤다.
‘잘했지?’
그가 가볍게 웃곤 말없이 입 모양으로 그리 말했다. 그 바람에 유운은 덩달아 픽 웃어버리고 말았다. 윤오는 운의 옆자리에서 잔치 음식을 조금씩 집어 먹으며 맞은편의 아주머니와 소소하게 수다를 떨다가, 자신을 부르는 다른 테이블로 가서 막걸리 한 잔을 받아 들었다. 운은 그가 띄워놓은 잔치의 분위기가 너무 번잡하지도, 너무 가라앉아 있지도 않아서 좋다고 생각했다.
어느새 그녀도 그런 분위기에 스며들어 테이블에 함께 있던 이웃 주민의 겨울 농작물 얘기를 들으며 가볍게 술을 넘겼다. 그렇게 한창 잔치 분위기가 무르익어 가고, 평소에 잘 마시지도 않던 술은 음료수처럼 술술 들어갔다. 그러다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는 기분이 들어 문득 추운 겨울밤임에도 바람을 쐬고 싶다고 생각했다.
운이 개켜두었던 얇은 크림색 패딩을 대충 걸치고는 조금 비틀거리는 몸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건물 밖으로 나왔다.
언제 내리기 시작했는지 흰 설탕처럼 미세한 눈발이 흩날리고 있었다. 마을회관 앞마당의 원목으로 된 평상 끄트머리에 앉아 잠시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숨을 내쉬자, 하얀 입김이 검은 도화지 위로 흩어지는 것처럼 보였다.
드디어 겨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