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흔한 얘기죠?”
낮게 가라앉은 분위기와 다르게 도영은 밝게 웃으며 말했다.
“그땐 정말로 그게 내 세상의 전부 같았어요. 그래서 포기할 수가 없었어요. 거기서 그만두면, 벼랑밖에 없을 것 같았거든요.”
해는 떴다가 지고, 가을의 나뭇잎은 떨어지고, 겨울의 눈이 내려오고, 다시 봄에 꽃봉오리가 맺히고, 여름의 장맛비가 지나가는 동안.
창문도 없어 날씨를 알 수도, 해를 알 수도 없는 공간에 들어앉아서 스무 번의 계절을 지나왔어요. 겨울 내리 두꺼운 옷을 껴입고 항상 같은 것을 들여다보고 공부하는데. 어느 날 밖으로 걸어 나와 산책을 하니 쌓였던 눈이 녹아있었어요.
간혹 죽고 싶었어요.
나 빼고 세상 모든 게 희망적인 그 봄냄새가, 그 생생한 활기가. 눈물이 났어요. 난 여기서 더 나아질 것 같지 않은데.
“난 여기까지구나. 이제 그만해야겠다. 그런 마음으로, 마지막 시험을 치러 갔어요. 근데 그 마지막 시험에서 덜컥 붙더라고요. 지나고 보니 도대체 이게 뭐라고 그렇게 죽고 싶었지, 했다가도. 이건 붙었으니까 할 수 있는 배부른 소린가, 생각했어요. 전요, 노력이 부족해서 실패했다는 말을 정말 싫어해요.”
도영이 좀처럼 보기 드문 얼굴로 인상을 찡그렸다.
“세상은 공평하지 않은데. 왜 자꾸 공평한데, 노력이 부족해서 실패한 거라고 해요? 과학적 사실이잖아요. 타고난 아이큐가 다르다는 건. 그런데도 모두 노력의 탓으로, 결국 진 사람의 탓으로 돌리는 게 이상한 것 같아요.”
각자의 최선이 다른데, 그걸 틀렸다고 하지 않았으면.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녀가 씁쓸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은 어때요?”
조심스러운 물음에 의외로 도영은 잠시 고민하는 모습이었다. 그러다 잘 모르겠다는 듯 눈가를 살짝 찡그렸다.
“글쎄요. 저는 제가 합격만 하면 무조건 행복해질 거라고 생각했었어요. 항상 남들처럼 그럴듯하게 자리 잡고 싶다고 생각했거든요. 다들 젊을 때 자리 잡아야 편하다고. 그렇게 말하기도 하고.”
그렇게 느리게 말을 늘이던 도영이 멍하니 네모난 창문을 바라보았다.
“지금의 나는 자리를 잡은 걸까요.”
공허한 시선이 창가에 못 박힌 듯 있다가, 이내 운에게로 옮겨왔다.
“전 모르겠어요. 나는 아직도 내가 있을 곳을 찾지 못한 것 같은데. 자리를 잡는다는 건 뭘까요? 가게를 열면, 자리를 잡을 때까지 열심히 한다고 그러잖아요. 그런데 ‘내 인생이 자리를 잡는다는 건 뭘까’ 내내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내 마음은 항상 붕 떠 있는 것 같아서. 적응하지 못하고, 즐겁지 못한데. 그래도 다른 사람들이 봤을 때 난 자릴 잡은 건가.”
도영은 운에게 읊조리듯 두서없이 높낮이도 없는 어조로, 묻는 건지 혼잣말하는 건지 알 수 없이 말을 이어나갔다.
간혹 그만두고 싶기도 했고. 그런데 딱히 잘하는 건 없고. 그냥, 20대를 그렇게 좁고 햇빛 한 줄기 안 드는 어두운 독서실에서 보냈다는 사실이 어이가 없고 허탈하더라고요.
그러다 모든 게 무의미해져서, 또 지루하다고 생각했어요. 직장과 집을 반복하면 하루가 다 가잖아요. 그렇게 1년이 지나가고.
그래도 요즘엔 제가 좋아하는 것들을 찾으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오늘 다이어리를 쓰다가 알았는데. 글 쓰는 게 재밌더라고요. 당분간은 글쓰기를 취미 삼아볼까 해요. 여기서 조금 차 타고 나가면 독립 서점이 있는데. 거긴 책 읽기도 괜찮고, 독서 모임하고 글쓰기 모임을 겸하는데 재밌어 보여서 저도 가볼까 해요.
그렇게 이야기하며 우울했던 얼굴이 마지막엔 밝아져서 다행이라고, 가만히 운은 도영의 얼굴을 보며 그리 생각했다. 정말 다행이라고.
“뜬금없죠? 이런 무거운 얘기.”
“아니에요. 저 얘기 듣는 거 좋아해요.”
운이 손사래 치며 대꾸하자 도영은 입가에 작게 호선을 그렸다.
“그냥. 말하고 싶었어요. 제가 그만큼 여길 좋아한다고. 요즘 제 삶의 낙이 여기라고요.”
운은 도영의 말에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지만, 이거 하나는 분명했다. 부끄러울 만큼 그녀가 진심을 담아 해준 말이 좋았다는 것.
도영이 갑자기 무거워졌던 분위기를 환기하려는 듯 대화의 화제를 옮겨갔다.
“근데 사장님은 SNS 안 하세요? 요즘은 이렇게 외진 곳에 있는 카페는 인스타그램으로 많이 광고하잖아요.”
“따로 하는 SNS는 없는데. 도영님은 인스타 하세요?”
“아니요, 전 수험 기간에 싹 다 삭제했어요. 대신 블로그 일기는 가끔 써요. 중학생 때 마지막으로 했었는데, 다시 시작하니까 재밌더라고요. 사장님도 저랑 블로그 이웃이나 해요!”
명랑한 목소리가 기분 좋게 실내 공간에 울렸다.
운이 한바탕 원데이 클래스를 끝내고,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도영과 소소한 수다를 떨고서 배웅하고 마저 가게 안을 정리했더니. 어느덧 일찍이 해가 내려오고 있었다.
비록 시작은 권재이를 피해서 벌리게 된 일이었지만 뜻밖의 소득이 있는 경험이었다. 이곳에 오지 않았더라면 겪어볼 수 없었던 일. 그런 것들이 요즘의 하루를 채워나가고 있었다.
운은 클래스를 진행하느라 조금 긴장된 상태로 있었던 탓에 막상 끝나고 나니, 온몸이 나른해졌다. 아직 저녁까진 아니었지만, 몰려오는 피로에 젖어 잠시 테이블에 엎드려 쪽잠을 청했다. 해가 지기 직전의 노란 햇볕이 운을 비추었다. 차가운 겨울에 내리쬐는 따뜻한 햇볕에 금세 의식이 희미해졌다.
낮과 저녁의 경계에서 잠이 들자 흐릿해진 시야 너머로 익숙한 실루엣이 보였다. 눈이 마주치자 권재이의 건조한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유운. 미안.’
한때 다정하게 느껴졌던 밤색 눈동자가 낯설게 시렸다.
‘우리 그냥 친구로 지내자.’
그때, 넌 어떤 표정이었던가. 그런 운의 궁금증이 무색하게도 꿈이라도 얼굴이 잘 보이질 않았다.
“…아.”
잠에서 깬 운은 개운치 않은 표정으로 엎드렸던 테이블에서 일어났다. 불편한 자세로 한동안 엎드려 있던 탓에 어깨가 찌뿌둥했다. 조용히 자리에 앉아 멍하니 창문 밖을 바라보니 어느새 새카만 하늘이 정적을 지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