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전야
한가로운 일요일의 오후.
유운은 모처럼 친구를 만나러 서울로 돌아왔다. 그녀가 도심의 대형 카페에서 오랜만에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시킨 채, 커다란 통유리창 너머로 바쁘게 북적이는 인파를 바라보았다.
한산하기 그지없는 시골의 풍경을 바라보다가, 하얗고 검은 횡단보도 위로 오밀조밀하게 밀집한 사람들. 그리고 보도블록 위로 사람들이 가득한 것이 그새 생소하게 느껴졌다.
“이래서 어렸을 때, 어른들이 빨리 집으로 돌아가야겠다고 그랬구나.”
서울에서 결혼식을 하거나, 돌잔치 같은 가족 행사를 할 때면. 끝나자마자 서울 공기가 탁하다며 곧장 시골로 내려갈 채비를 하던 친척 어르신들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유운-!”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이제 막 도착한 소진의 모습이 보였다.
“내가 좀 늦었지-. 근데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고 있었어?”
그렇게 말하며 소진은 운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오랜만에 보는 대학교 친구 소진은 못 본 지가 1년을 넘었어도, 어쩐지 어제 본 것처럼 익숙했다.
“그냥. 안 그래도 좁은 한국 땅덩어리에서, 서울에만 사람이 가득가득한 게 신기해서.”
“그러니까 말이야. 그중에서 지하철이 제일 심해. 진짜 미어터져.”
소진이 그 말에 동조하며, 고개를 끄덕이다가 손에 쥔 카페 진동벨이 빨갛게 진동하자 금세 일어나 크림이 얹어진 카페 모카 한 잔을 들고 왔다. 그녀는 음료를 빨대로 한번 맛보곤 달콤한 맛에 만족했는지 방긋 웃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한소진. 네가 말했다며.”
소진은 잠시 영문을 모르는 듯 까만 눈동자를 요리조리 굴렸다. 그러다 이내 깨달은 듯 입을 열었다.
“…혹시 화났어?”
“됐어. 뭐, 큰 비밀도 아니고.”
사실 자신의 취업 시험을 여러 번 낙방하고, 회피하듯 시골로 숨어버렸다는 소식을 알리고 싶지 않은 상대였다. 권재이는 유운에게 그런 사람이었다.
“아니, 와, 근데 진짜 거기까지 갔어? 그럴 줄은 몰랐지. 그냥 근황 궁금해서 물어본 건 줄 알았지. 학교 다닐 때 친했잖아. 그리고, 누가 그 시골까지 갈 거라고 생각을 해. 혹시 권재이가 너….”
소진이 긴 변명을 늘어놓듯 횡설수설하다가, 다시 눈빛이 팍 살아서 하는 말을 유운이 표정 없이 중간에 잘랐다.
“출장이 근처였대.”
“아. 그렇구나.”
쩝. 소진은 다소 아쉬운 기색을 운에게 내비치며 말을 멈추었지만, 운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그나저나, 가게는 할 만하고?”
“그냥저냥?”
“근데 웬일이야. 유운이 먼저 만나자고 다 하고? 어젯밤에 전화 받고서 엄청나게 놀랐잖아.”
눈을 동그랗게 뜨곤 묻는 소진 사이로, 어제 보았던 도영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그런데, 어떻게 다시 시험을 보러 가기로 마음먹었어요?’
‘그땐 정말로 그냥 다 놓아버리고 싶었는데, 친구가 편지를 주더라고요.’
[나랑 앞으로도 맛있는 거 많이 먹으러 다니자.
봄에는 딸기 케이크랑 딸기라떼도 잔뜩 먹고, 여름이 되면 수박화채랑 빙수를 먹고, 가을엔 꽃게랑 대하 소금구이도 먹고.
맞아, 밤이 들어간 몽블랑 케이크도 먹어야지. 그러다 겨울이 되면 방어회도 먹고. 사계절 별미를 같이 먹자. 그랬으면 좋겠어.]
‘그런 말들이 고마웠어요. 그러니까 진짜 마지막으로 해보고 시원하게 그만두자고 그렇게 생각할 수 있었어요. 그게 불합격이든, 합격이든.’
그때 도영의 말을 듣자, 운도 불현듯 떠오르는 친구가 몇몇 있었다. 그중에서도 마지막으로 본 지 꽤 오래된 소진이 떠올랐다.
“그냥, 네가 생각나서. 곧 크리스마스기도 하고. 또 연말이잖아-.”
운이 한참 마음의 굴을 파고 들어가 있을 때, 아무 말 없이 기다려 준 친구가 소진이었다. 언제든 연락해도 어제 만난 듯 전화를 받아주던 친구.
“나도 언제 한 번 네 가게도 놀러 가야 하는데.”
“그래, 빨리 와. 늦기 전에 와야지. 맞아, 이건 선물.”
“뭐야?”
빨간색 공단 리본으로 묶인 갈색 크라프트지 재질의 상자를 건네자, 소진이 물끄러미 그것을 보다가 이내 받아 들었다.
“크리스마스 선물.”
운의 말을 들으며 소진이 리본을 풀고 상자의 뚜껑을 열자 희고 납작한 정사각형 모양 케이스 하나와 투명한 OPP 비닐로 포장된 빵이 두 개 보였다.
비닐을 부채모양으로 묶어 놓은 금색 빵 끈에는 초록색 종이 위로 금색으로 쓰인 ‘Merry Christmas’ 직사각형 모양 종이 태그가 달려있었다. 그 아래로는 하얀 우박 설탕이 뿌려진 시나몬롤 두 개가 보였다.
오랜만에 보는 소진에게 크리스마스 선물로 주기 위해 원데이 클래스에서 만들었던 파베초콜릿과 시나몬롤을 늦은 밤에 한 번 더 만들어 포장해 온 것이었다.
“네가 만든 거야? 아까워서 어떻게 먹어.”
“잘만 먹을 거면서.”
운이 담백하게 대꾸하자, 소진은 발랄하게 웃고는 갑자기 검은색 가죽 숄더백을 열심히 뒤지다가 초록색 리본으로 묶인 손바닥만 한 종이 상자를 꺼냈다.
“이건 내 선물!”
별건 아니지만…. 말끝을 흐리는 소진을 뒤로하고 운이 리본을 풀고 상자를 열자, 크리스마스 느낌이 물씬 나는 양말이 세 켤레 들어있었다.
“양말 귀엽다. 고마워.”
운이 활짝 웃었다. 꽈배기 니트 짜임의 연한 갈색 양말 발목 부분에는 루돌프 자수가, 초록색 양말에는 크리스마스트리 자수, 그리고 하얀색 양말에는 빨간색 산타 모자 모양 자수가 새겨져 있었다.
유운은 오랜만에 만난 대학교 동기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떠들었다. 그간 만나지 않았던 시간이 무색하게도 여전히 친구와 대화하는 건 즐거웠다.
소진은 운이 걱정했던 취업에 대한 소식은 따로 더 묻질 않았다. 그저 가게에 대한 기대를 드러내며 선물 받은 시나몬롤을 하나 꺼내서 조금 맛보고는 만족한 얼굴을 했다.
그렇게 약속을 마무리하고 돌아가는 길. 추운 겨울날 버스 정류장에 우두커니 앉아있는 운이 스크린에 뜨는 버스 알림 시간을 보았다. 자신이 기다리는 버스가 오기까지 20분은 족히 남아있었다. 차가운 공기를 피해 새하얀 머플러에 얼굴을 묻은 운이 양손을 코트 주머니에 넣은 채 시선을 올렸다.
시끄러운 차들의 경적 소리와 지나가는 사람들의 대화 소리, 그리고 진눈깨비처럼 흩어지는 눈이 자욱했다. 그것들을 바라보며 가만히 앉아있는데 쌩쌩 달리는 차들 사이로 익숙한 얼굴이 얼핏 보였다. 맞은편에 서 있던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운은 자신이 잘 못 본 건가 싶어서 눈을 가늘게 뜨고 멀리 보았으나, 방금 보았던 게 허상이었던 듯 이미 자취를 감춘 뒤였다.
하지만, 몇 분 후.
빵-. 적당히 울리는 경적에 처졌던 고개를 들자, 눈에 익은 차종이 보였다. 순간 자동차 유리창이 아래로 스르륵 내려갔다.
“유운! 빨리 타-.”
그 목소리에 운이 정류장 의자에서 일어나 급히 조수석에 올라탔다. 그녀는 운전대를 잡은 윤오의 얼굴을 보며 벙찐 표정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