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울림 Oct 27. 2024

행복과자점 19화

“네가 왜 여기 있어?”

“일 있어서 왔지. 근데 여기 너무 복잡하다.”     

어색해진 이 도시에서 익숙한 사람을 만난 기분이라 그런가. 한가하게 말하는 윤오의 목소리를 들으며 운은 약간의 반가움을 느꼈다.      

“그러게. 오랜만에 왔더니, 더 그러네.”

“집으로 가는 거지?”

“어.”

“잘됐네. 같이 돌아가자. 나도 이제 일 끝났거든.”     

번잡한 도시에서 운전은 아직 자신이 없어서 고속버스를 타고 온 참이었는데, 뜻밖의 행운으로 편히 돌아갈 모양이었다.     

“세상 좁다. 서울에서 이렇게 마주칠 줄이야. 넌 여기까지 웬일이야?”

“그냥. 친구 좀 만나러.”

“저번에 그 사람?”     

운은 윤오가 반사적으로 일컫는 ‘그 사람’이 누굴 뜻하는지 잠시 곱씹어 보았다가, 순간적으로 떠오른 재이의 뒷모습에 고개를 휘휘 저었다.     

“아, 걘 아니고. 다른 친구. 한동안 이런저런 핑계로 못 봤거든. 그러다 보니까 벌써 1년이 넘었더라고. 그렇다고 친하지 않은 건 아니었어. 그냥, 그런 것들이 있잖아…….”     

운이 말끝을 흐렸다. 윤오도 눈치챘는지 그녀의 말을 대신 이어받았다.     

“그렇지. 살다 보면 다 그래.”

“넌?”     

뜻을 알 수 없는 물음에 윤오가 잠자코 핸들을 돌리다가 반문했다.     

“뭐가?”

“넌 원래 회사 다녔었어?”

“갑자기 그건 왜?”

“갑자기 궁금해져서.”     

윤오가 정말 별것 없다는 투로 말했다.      

“응, 회사 다녔었어. 그러다, 그냥. 도시가 시끄러워서. 좀 조용해지고 싶었어.”

“그냥 시끄러워서 왔다고?”

“왜? 너도 비슷하지 않아?”     

그가 가볍게 고개를 까딱이며 대꾸했다.     

“…그랬지.”     

그렇다면, 지금은 조금 조용해진 걸까. 운은 지난번 술자리에서 자신이 술김에 흘리듯이 했던 말들을 돌이켜보았다.

곧 윤오의 차가 적막한 어둠이 깔린 도로에 진입했다. 자동차들의 반짝거리는 불빛은 멎어갔지만, 한적한 고요가 내리깔린 도로의 운치가 나쁘지 않았다.     

***     

평소와 달리 행복과자점은 그 어느 때보다 확실한 성수기를 누리는 중이었다. 그 덕분에 운도 정신없이 크리스마스 주간을 보내느라 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도 모를 정도였다.

자신의 가게치고는 꽤 바쁘게 주문을 쳐낸 운이 잠시 한가해진 틈을 타, 의자에 힘없이 주저앉았다. 이제 막 하늘이 어두워지기 시작해서인지 여전히 작은 가게는 북적거렸지만, 동네의 단골들만이 남아있었다.

일찌감치 창가 자리를 차지한 도영이 노트북으로 무언가 열심히 치고 있었고, 한바탕 가게가 붐빈 탓에 빈자리가 없어서 도영의 테이블에 합석했던 윤오도 귀에는 무선이어폰을 낀 채 그녀 못지않게 노트북 화면에 집중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카운터와 가까운 테이블에서는 소율과 연준이 작은 고사리손에 가위를 들고 초록색 색종이와 빨간색 색종이를 오려가며 크리스마스카드를 만드는 데 열중하고 있었다.

모두가 바빠 보이는 가운데, 겨우 한가해진 운은 손님들이 떠나간 테이블을 깨끗이 정리하기 시작했다.     

“사장님, 오늘 되게 바쁘셨죠.”     

고심하는 얼굴로 타자 치던 도영이 겨우 고개를 들어 운을 쳐다봤다.     

“네……. 아무래도 크리스마스 주간이라 그런 거 같아요…….”     

요즘 들어 그녀는 원래 생산량의 3배 이상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이전에 폐기를 염려하던 날들이 무색하게도 서너 시쯤이 되면 모두 품절이었다. 

물론 도시의 목 좋은 가게 매출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확실히 이전보단 늘긴 늘었다. 기분 좋게 테이블 정리를 마친 운이 도영에게 다가갔다.     

“도영님은 오늘 휴가 내신 거예요?”     

평일 낮에 카페에 있는 도영이 의아해 묻자, 그녀가 밝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연말이니까, 남은 연차 좀 소진하려고요. 쉬고 싶기도 했고.”

“쉰다면서 노트북은 왜?”

“아, 요즘은 글쓰기에 꽂혀서요! 저번엔 뜨개질을 했었는데, 아무래도 그건 안 맞나 봐요. 목도리에 빵꾸가 많더라고요…….”     

도영이 머쓱하게 웃으며 말했다. 마침 도영의 맞은편에 앉아있던 윤오가 귀에서 무선이어폰을 빼내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거 저번에 하고 오시지 않았어요?”     

운은 덩달아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언제? 전 도영님이 이상한 목도리 하고 온 건 못 봤는데요?”     

파란 목도리. 그렇게 짧게 덧붙이며 윤오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사장님. 이상한 목도리까진 아니에요.”     

체념한 목소리로 도영이 대꾸했다.     

“전 그게 도영님 애착 목도리라 아주 조금 너절해진 줄 알았어요. 잘 뜨셨던데요!”

“그날이 첫 개시였어요, 사장님….”     

큼큼. 운이 무안한 얼굴로 헛기침했다. 도영을 위로하려 했으나, 되려 역효과만 난 듯했다.     

“저 위로하지 않으셔도 돼요…….”

“그래요. 사람이 어떻게 다 잘해요.”     

운은 윤오가 도영을 위로한답시고 하는 비정한 말을 듣다가, 문 열리는 소리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서 오세요-.”     

숙 자매 할머니 두 분이 안으로 들어오며 방긋 웃었다. 오늘은 웬일인지 세 자매 중 성숙 할머니만 보이지 않았다.     

“성숙 할머니는 어디 가셨어요?”

“연말이라 손주들 본다고, 큰아들 집 갔어-. 안 그래도 언니 없이 심심해서, 여기로 왔지.”     

미숙이 그렇게 말하며 한쪽 손에 들고 온 쇼핑백을 운에게 건넸다.     

“이건 선물이여. 오전에 팥시루하고, 가래떡 했거든-.”     

운이 거절해야 하나 잠시 고민했지만, 이내 해사하게 웃으며 받아 들었다.     

“감사합니다. 잘 먹을게요.”     

둘은 기분 좋은 얼굴로 디저트 쇼케이스를 바라보았지만, 기대와 달리 텅 빈 것을 발견하고는 실망스러운 기색을 띠었다.     

“빵은 없지만, 대신 여기서 골라보실래요?”     

운이 문 옆에 둔 크리스마스트리를 가리켰다. 그리곤 금세 종종걸음으로 트리 앞으로 걸어가서 둘에게 보란 듯 리본으로 묶인 것들을 하나씩 가리켜 보이며 설명했다.     

“이건 쿠키고, 이건 녹이면 초콜릿 우유가 돼요.”

“시상에. 이게 먹는 거여? 아휴, 예뻐라.”     

미숙은 눈사람 모양 아이싱 쿠키를 만지작거리며 반짝이는 눈으로 그것을 바라보았다.     

“진짜요? 다행이다. 예쁘게 보여서.”     

미숙과 영숙이 트리에 관심을 보이며 밝은 낯빛을 띠자, 운이 종이와 트리 바로 옆 협탁에 올려놓았던 작은 종이와 펜을 들었다.     

“그럼 드시고 싶은 쿠키 하나씩 고르시고, 소원 적어서 여기 붙이고 가세요.”     

그 말에 영숙이 조금 곤란한 기색을 띠었다. 운은 순간 자신이 실례를 했다는 생각이 들어, 다시 입을 열려고 했지만.     

“언니 소원 빌 거는 내가 써주면 되니께. 싸게 싸게 불러봐.”     

그렇게 미숙이 말하며 영숙과 테이블로 자리를 옮겨갔다. 운은 사이좋은 숙자매 할머니들을 흐뭇한 얼굴로 바라보다가 부엌으로 들어가 차를 준비했다. 얼마 전에 자신이 마시려고 새로 들여놓은 국화차였다. 투명한 유리 주전자에 몇 송이를 덜어 넣고 뜨거운 물을 붓자, 꽃이 투명한 물속에서 개화했다.

운은 유리 찻잔 세트까지 준비해서 숙 자매 테이블에 내어갔다.     

“국화차예요. 이건 제가 드리는 크리스마스 선물. 저 떡을 너무 많이 받아서, 차라도 대접 못 하면 죄송해서 잠 못 자요.”

“하여튼. 운이 야는 못 당하것어.”     

그렇게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내내 있는 듯 없는 듯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해서 조용하던 윤오의 목소리가 들렸다.     

“숙 여사님들은, 유사장님만 예뻐하시네.”     

깜짝이야. 미숙과 영숙은 윤오가 자리에 있는 줄도 몰랐던 것처럼 화들짝 놀랐다.     

“언제부터 거기 있었대?”

“……처음부터요.”     

윤오가 섭섭한 눈치로 둘에게 말했지만, 숙 자매는 전혀 개의치 않는 표정이었다.      

“근데 웬 떡이에요?”     

운이 가래떡 몇 개를 잘라서 흰 접시에 옮겨 담은 후 조청을 작은 종지 그릇에 덜어내며 물었다.     

“갑자기 쌀이 많이 생겨서 해치우느라 떡 좀 지었지. 다음 주엔 날이 좀 따뜻하면, 더 지어서 장에 가서도 팔아야것어.”     

그렇게 말하는 영숙의 말을 들으며 운은 조금 염려하는 얼굴로 말했다.     

“춥지 않을까요? 건강 조심하셔야죠.”

“에이. 소일거리라도 해야지. 우리 같은 늙은이는 몸 안 움직이면 더 병 나.”

“나도 들기름 짠 거 있으니께, 같이 가면 쓰겄네.”     

영숙을 뒤따라 말하는 미숙이 웃었다.

그리 말하자 운은 시장에 좌판을 작게 벌려놓고 나물을 팔던 모습이 눈앞에 그려지는 듯했다. 밝은 햇살 아래서 소소한 일거리. 개나리처럼 노란 보자기를 덮은 작은 손수레를 끌고 장을 보는 어르신들. 그 모습에서 생생한 활기가 묻어났었다.

옛날엔 겨울에도 거리 혹은 시장에 좌판을 벌이고 있는 어르신들을 걱정 어린 눈으로 볼 때가 있었는데, 이런 모습을 보니 활기차고 좋은 거였구나. 그런 생각이 괜히 들었다.

운은 이제 영숙과 미숙의 수다 시간을 보장해 주고자 테이블에서 떨어져 부엌을 향했는데, 때마침 도영이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났다. 이제 저녁 약속이 있다며 가봐야 한다고 했다.     

“이건 드릴게요. 나름 성공작?”     

도영이 제게 건네준 투명한 비닐에 싸인 세잎클로버 열쇠고리를 내려다보았다. 초록색 털실로 짜인 세잎클로버가 꽤나 귀여웠다.     

“네잎클로버가 아니네요?”     

운은 보통 네잎클로버 상품들을 많이 봐온 터라 세잎클로버 모양으로 짜인 열쇠고리가 신기했다.     

“이미 사장님 이름에 행운이 들어가 있으니까, 행복은 열쇠고리로 들고 다니시라고요. 그리고 여기 이름도 행복과자점이잖아요. 그럼 메리 크리스마스-.”     

도영이 가게를 나선 후, 운은 입가에 웃음을 띤 채로 그녀가 주고 간 세잎클로버 열쇠고리를 잠시 만지작거렸다. 정말 마음에 쏙 드는 선물이라서, 카페 공간 어딘가에 장식해 두고 싶었다. 제 자리에 선 채로 주변을 둘러보다가 협탁 옆에 세워놓은 트리가 눈에 들어왔다.

운은 들고 있던 세잎클로버 열쇠고리를 트리의 윗부분에 걸었다. 무언가 아쉽게 느껴졌던 행복과자점의 트리가 이제야 비로소 완성된 것 같았다. 

그녀는 마음에 쏙 드는지 사진을 찍고는, 도영이 가져간 크리스마스 쿠키의 자리에 남은 소원 쪽지를 발견했다.     

[책 쓰기!]     

운은 가만히 웃으며 글자를 바라보다가 다음엔 도영에게 어떤 내용의 책을 쓸 것인지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져서 뒤돌아보자,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윤오가 보였다.     

“뭐해?”

“어, 아니. 그냥 사람들 소원 좀 봤어.”     

이제는 각양각색으로 적힌 소원들이 트리를 장식하고 있었다. 몇 개 남은 크리스마스 쿠키와 뒤섞인 소원들, 그리고 반짝거리는 조명들 사이로 불쑥 고사리 같은 작은 손이 튀어나왔다.     

“내 소원도!”     

소율이 삐뚤빼뚤한 글씨로 쓴 소원 적힌 종이를 금색 빵 끈으로 매달았다. 소율의 옆으로 다가온 연준도 그 모습을 따라 했다. 운은 윤오와 함께 뒤로 물러서서 연준과 소율의 모습을 웃는 얼굴로 지켜보다가 둘이 트리에서 떨어져 나가자 적힌 소원을 읽었다.

둘의 소원을 읽은 운과 윤오가 동시에 서로를 쳐다보며 웃었다.     

이전 18화 행복과자점 18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