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려동물이 무지개다리를 건너면
당연히 슬픈건데,
유난히 오래, 깊게 아파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처럼.
그래서 생각해봤다.
왜 이렇게까지 오래, 많이 아픈 걸까.
1
사람 사이에는 암묵의 룰이 있다.
서로 간 보는 시간, 말투의 결, 은근한 눈치.
좀 더 괜찮은 사람처럼 보여야 하고,
그에 맞는 말투와 반응, 감정 조절이 필요하다.
그런데, 그 녀석 앞에서는 그런 게 없었다.
더 예뻐지려 애쓰지 않아도 괜찮았고,
굉장한 성취를 보일 필요도 없었다.
그냥, 날것 그대로의 나여도 괜찮았다.
그걸 알려주는 눈빛이 있었다.
거울 속 나보다, 더 먼저 나를 사랑해주는 눈빛.
2
세상이 뒤틀릴 때 나는 늘 그 녀석에게로 돌아갔다.
지쳐서 퇴근하는 날에도 문만 열면
똑같은 꼬리, 똑같은 눈, 똑같은 발걸음.
그건 마치
세상에 단 하나 남은 정상 좌표 같았다.
그런 완벽하게 안정적인,
고정된 세계.
그게 사라진 거다.
3
그리고, 관계.
사람과의 유대는 늘 거리 조절이 필요하다.
가깝다가 멀어지고, 맞춰가다가 뒤틀리고.
언제나 조심스러운 계산이 뒤따른다.
하지만 그 녀석은
늘 일정한 거리에서,
늘 그 자리에 있어줬다.
믿을 수 있는 유일한 확실함.
4
나는 그 녀석을 돌보면서
내가 꽤 괜찮은 사람인 줄 알았다.
먹이고, 안아주고, 산책시키고,
목욕시키다 물 다 튀겨도 웃고.
그렇게 누군가를 위해 온갖 뒤치닥거리를 해내며
웃을 수 있는 나를 나 스스로 좋아했었다.
그런데 그 대상이 사라지니까,
나의 일부도 함께 사라진 느낌이었다.
정체성의 절반쯤이 부서진 채로,
남은 절반을 질질 끌고 걷는 기분.
결국,
펫로스는 그냥 ‘반려동물을 잃는 일’이 아니다.
조건 없이 나를 좋아해주던 시선,
무너지지 않는 위로의 루틴,
거리 없는 유대,
그리고 내가 나를 좋아할 수 있게 해주던 감정.
그 모든 걸
한순간에 잃는 일이다.
그러니까
이건 유난이 아니라,
지극히 정당한 상실이다.
5
토토가 아플 땐
토토가 말을 좀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어디가, 얼마나 아픈지 알고 싶으니까.
지금 생각해보면
말이 없다는 게 어쩌면
핵심이었다.
사람은,
말로 너무 많은 상처를
주고받으니까.
펫로스를 유독 혹독하게 겪는 사람들은
원래부터 좀 허전했던 사람들일지도 모르겠다.
사람한테 기대하다가 여러 번 실망하고,
말에 다치고, 눈치에 지쳐서
“이젠 기대 안 해” 하던 사람들이
그 녀석한테만은 마음을 풀어버린 것.
말도 없고, 요구도 없고, 배신도 없는 존재.
그래서 그냥…
그 녀석이 옆에 있는 것만으로
사는 게 좀 덜 외로웠던 거다.
그리고 그걸 다시 무엇으로 채워야 할지를
도무지 모르겠는 그런 사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