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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당신 생각

- 나의 낮술친구에게

by 조명찬


차장님 잘 계시나요?


오늘은 비가 많이 내리네요. 제가 요 며칠 목감기로 조금 고생을 했어요. 날씨 예보를 볼 정신이 없었습니다. 갑자기 비가 내리니까. 마음이 싱숭생숭해요.

제가 여전히 술친구라고 불러줘서 기분 좋지요? 사실 저는 처음에는 ‘친구’라는 말이 많이 어색했어요. 그도 그럴 게 차장님 하고 저하곤 서른 살 정도 차이가 나잖아요. 그런데 자꾸 차장님이 ‘술친구’라고 부르라고 하니까 어색해도 그렇게 부르게 된 거죠. 실은 내심 좋았어요. 어른을 친구라고 부를 수 있다는 것 말이에요.


아시다시피 저는 회사 생활을 정리하고 작은 가게를 운영하고 있어요. 저도 어느덧 중년의 나이가 됐네요.

차장님을 만난 게 저의 첫 회사였으니까 벌써 그게 몇 년 전이래요?


기억나죠? 차장님이 본사에 있다가 파주에 있는 창고로 이동 발령이 날 즈음에 제가 입사했잖아요. 그래서 우리는 일주일에 한두 번 보는 게 다 였구요. 가끔 봐서 그랬을까요? 우리는 만날 때마다 좋았어요. 그렇죠? 이제 와서 고백하지만 저는 정말 차장님이 좋았어요. 이유는 다른 게 있겠어요?

차장님이 저를 예뻐해 주는 게 진심으로 느껴졌어요. 저한테 왜 그렇게 잘해줬데요?


차장님은 저를 어떻게 기억하고 계시나요? 저는 차장님을 저에게 ‘낮술의 맛’을 알려준 사람으로 기억하고 있어요. 차장님이 본사로 오는 날에는 아침 일찍부터 저에게 전화하셨잖아요. 점심 같이 먹자고….

나중엔 그게 너무 익숙해져서 차장님이 본사로 오는 월요일에는 다른 약속도 잡지 않고 있었어요.


'모이세 해장국'도 '서씨네해장국'도 기억나시죠? 얼마 전에 갔었는데 맛은 여전하더라구요. 차장님 생각이 많이 났어요.


차장님은 앉자마자 소주 한 병 시켜서 스테인리스 물 잔에 한잔씩 가득 따르고선 저보고 얼른 한 모금 마시리고 하고 술을 마저 따라줬지요. 그러면 소주 한 병이 깨끗하게 비워졌고요. 그리고는 술병을 테이블 한편에 두면 일하시는 분이 얼른 치웠잖아요. 환상의 팀워크였어요. ^^


그게 우리가 해장국을 먹는 준비였어요. 절대로 술을 더 시키지도 않고 늘 한 병으로 우린 사이좋게 나눠마셨죠. 저는 아버지 얘기를, 차장님은 군대 간 아들 얘기를 자주 했던 거 같아요. 그러면 저는 아들의 입장에서 차장님은 아버지의 입장에서 얘기했던 거 같구요. 친아버지가 아니라서 친아들이 아니라서 할 수 있었던 얘기를 안주 삼아 얘기했었네요. 가끔 그리워요. 그때의 시간이….

아시겠지만, 저희 아버지는 지금 요양원에 있으세요. 그때만 해도 참 건강했었는데 말이죠. 저는 아버지가 술을 많이 드시는 게 걱정이라고 차장님께 얘기했었고 차장님은 그래도 건강하니까 드시는 거다. 그때가 좋은 거다라고 말씀하셨죠? 그 말이 이제야 이해가 돼요.


그거 아세요? 제가 가게에서 점심 영업을 할 때, 메뉴판 끝머리에 <생수를 가장한 소주 한잔>이라고 써넣었잖아요. 스탠컵에 소주를 가득 따라 잔술을 팔았죠. 그거 다 차장님을 생각하면서 만든 거예요.


지금도 국밥이 나오면 밥의 절반을 말아두고 밑반찬과 밥을 먼저 드시나요?

지금도 국밥이 나오면 그냥 드시다가 절반 즈음 드셨을 때 양념을 넣어 드시나요?

지금도 국밥의 마지막 한술과 마지막 소주 한 모금이 딱 맞을 수 있도록 조절해서 드시나요?


저는 차장님께 배운 대로 그렇게 먹고 있어요.


잘 배운 거 같아요. 차장님이 그러셨듯 저도 누군가에게 퍼트리고 있어요.


저 회사 관두는 날, 우리 둘이 술 더 마셨잖아요. 그게 우리의 마지막 술자리였구요. 한번 더 찾아뵙지 못해서 죄송했어요. 아시다시피 저도 그때는 이리저리 다니느라 정신이 없었지요. 회사 근처에도 가기 싫은 시절이었죠.


그런데 그렇게 빨리 가실 줄은 몰랐어요. 제가 회사를 관두고 1년이 지난 후였으니까요. 그렇게 갑자기 차장님 부고 소식을 들을지 어떻게 알았겠어요. 차장님을 다시 보러 가는 날, 일부러 사람이 없는 낮 시간에 찾아갔어요. 우린 밤술 보단 낮술을 즐겼던 사이잖아요.


차장님이 마지막으로 사주는 육개장을 먹고 종이컵에 소주 한잔 가득 따라 마셨어요. 이리저리 눈치 보다가 앞에 차장님 잔도 한잔 따라뒀지요. 아시다시피 저는 글 쓰는 일을 잠시 접고 식당 일을 열심히 하고 있어요. 차장님이라면 몇 번이나 오셨겠지만 잘 대접할 수 있는 게 마땅치 않아서 제가 괜히 불편해했을지도 모르겠네요.


비가 와요. 갑자기 차장님이 생각났어요. 우산 하나를 함께 쓰고 한 잔만 더 하자며 포장마차로 흘러 들어갔던 날이 생각나요. 그때 새로 사서 처음 입은 제 정장자킷이 흠뻑 젖어버려서 차장님이 집에 가서 햇볕에 말고 그늘에 며칠 말려두라고 얘기도 해줬잖아요. 그거 아세요? 그거 잘 말려서 넣어두었다가 차장님 마지막 배웅하는 날 그 정장 입고 갔었어요.


여전히 해장국과 낮술 좋아하시죠? 그랬으면 좋겠네요. 차장님이 그 순간 정말 행복해 보였거든요.

그거 아세요? 차장님이 제 친구 중에 가장 나이가 많은 거. 앞으로도 그건 변하지 않을 것 같아요.


계절이 바뀌고 있어요. 오늘 왜 생각이 났는지 모르겠어요.


늘은 아니지만 가끔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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