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음: 사람이 본래부터 지닌 성격이나 품성. 사람이 다른 사람이나 사물에 대하여 감정이나 의지, 생각 따위를 느끼거나 일으키는 작용이나 태도. 사람의 생각, 감정, 기억 따위가 생기거나 자리 잡는 공간이나 위치
# 정신: 육체나 물질에 대립되는 영혼이나 마음. 사물을 느끼고 생각하며 판단하는 능력, 또는 그런 작용. 마음의 자세나 태도
# 심리: 마음의 작용과 의식의 상태
# 영혼: 육체에 깃들어 마음의 작용을 맡고 생명을 부여한다고 여겨지는 비물질적 실체
엇비슷한 의미들이 펼쳐져 있어서 그 말이 그 말 같기만 하다. 명확한 구별도 확연한 파악도 어렵다. 알쏭달쏭하기만 하다. 인간을 이루는 것 중에서 육체와 대비되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는 공통점은 있다. 실제로 사용하고 있는 말에 초점을 맞춰서 알아보자. 먼저 ‘정신’이다. ‘정신(mental)’은 이런 말로 흔히 쓰곤 한다.
“멘탈이 강해야 해!”
“난 유리멘탈이야.”
“멘탈이 강해지려면 어떻게 하지?”
“나, 멘탈이 좀 나갔나 봐!”
특히 ‘유리 멘탈’이라는 신기한 표현은 국어사전에도 나와 있다. ‘유리처럼 깨지기 쉬운 멘탈이라는 뜻으로 대범하지 못한 성격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정신장애를 ‘Mental Disorder’라고 표기한다. 한마디로 정신병, 정신질환, 정신이상을 일컫는다. 회자하는 의미로 보건대, ‘정신’은 뇌 기능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 뇌는 다양하고 다채로운 시스템을 갖고 있다. 상상, 생각, 추리, 연산, 사유, 감정, 정서 등등이다. 뇌의 기능이 원활할 때 정신이 또렷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강한 멘탈을 소유하고 있다면 정신적으로 건강한 상태를 뜻한다.
심리(心理)의 한자는 마음 심과 다스릴 리이다.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이치와 체계가 필요하다. 한마디로 하자면 시스템이다. 대개 마음의 시스템을 의미할 때 ‘심리’라는 말을 쓴다. 누군가 이해되지 못할 행동을 하거나 그 사람의 행위가 궁금할 때 흔히 이렇게 말한다.
“그 사람의 심리는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마음의 이치와 체계 즉, 마음의 시스템을 연구하는 학문이 바로 ‘심리학’이다.
이제 마음을 들여다볼 차례다. 우리의 마음을 도형으로 나타낸다면 어떤 도형이 될까? 하트, 별, 육각형일까? 어차피 보이지 않는 마음인데 내 마음대로 그려보면 되지 않을까? 물론 그럴 수도 있겠지만, 예부터 전해온 현자들의 답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지구는 둥글고 달도 둥글다. 태양도 모든 항성과 행성도 둥글다. 현자들은 한결같이 인간은 작은 우주라고 했다. 이쯤 되면, 어떤가? 마음은 ‘원’이라고 해도 될 듯하지 않은가?
원을 하나 그려두고 바깥쪽을 눈여겨보자. 점들이 위치를 이동해서 선을 이룬다. 원의 바깥은 무수한 점들이 찍혀서 선을 이루고 있다. 미세하게 위치 이동을 한 선들을 ‘자아(ego)’라고 할 수 있다. ‘내 안에 내가 너무도 많아’라는 노래 가사처럼 무수한 자아가 있다. 슬픈 나, 괴로운 나, 기쁜 나, 즐거운 나, 어린아이 같은 나, 성숙한 나, 현명한 나, 어리석은 나... 셀 수도 없는 무수한 나들이 존재한다. 게다가 자아는 좋고 싫음이 분명하다. 나하고 코드가 맞으면 오케이지만, 맞지 않으면 당연히 외친다. 놉!!! 상황상 그렇게 시원하게 외치지 못할 때는 ‘척’이라는 수완을 사용한다. 싫으면서도 좋은 척. 그렇지 않으면서도 그런 척. 그러니, 척하는 나도 역시 ‘자아’의 모습이다.
위치가 변하지 않는 점도 있다. 유일하게 단 한 군데에 엄연히 존재한다. 그곳은 원의 중심이다. 그곳을 ‘자기(Self)’라고 한다. 이렇게 명칭을 구별하는 것은 분석심리학의 창시자 융(Jung)에 의해서다. 융은 ‘자기’에 대해 놀라운 말을 했다. 그곳은 우주의 에너지가 합일을 이루는 곳이며, 단지 관념 속의 존재가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실체라는 것이다. 아름다운 신앙이 있다면, 신앙 속의 절대자를 떠올려도 좋을 것이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면서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고 초월할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인간의 마음 중심에 ‘신’ 혹은 ‘우주의 에너지’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융은 적극적으로 마음의 방향을 중심을 향해 옮겨야 하며, 그 과정을 ‘자기실현화 과정’, ‘자기 개성화 과정’, ‘자기 개체화 과정’이라고 했다. 인간은 고유한 특성을 가지고 태어났다. 그 독특한 자신만의 ‘개성’ 또는 ‘개체성’을 발휘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삶의 목적일 것이다. 자기실현화 과정은 한순간에 이뤄질 수도 없고, 쉽게 건너갈 수도 없다. 인생 전반을 거쳐 조금씩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고, 무수한 고통과 고난을 겪으면서 갈 수밖에 없다. 역경을 딛고 ‘자기’ 안으로 한 걸음씩 내딛는 삶은 한마디로 하자면, ‘영혼의 성장’이다. 인간은 누구나 ‘영혼의 성장’을 위해 태어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융에 의하면, 자기 실현화 과정을 제대로 거치지 못할 때 마음이 병들게 된다. 생각해보자. 자아가 추구하는 ‘자아실현’은 단언하자면, ‘꿈’인데 이 ‘꿈’은 욕망과 손을 잡고 있다. 이른바 돈, 명예, 권력이다. 여기에서 벗어날 엄두를 전혀 내지 않는 것이 자아실현이다. 흔히 듣거나 하는 “꿈을 높게 가져! 그래야 반이라도 이루지!”라는 말의 의미인 바로 그 ‘꿈’이 자아가 추구하는 것이다. 자아는 한껏 부풀기를 원하지만, 삶의 끝 날까지 원이 확장되지는 않는다. 결정적인 두 가지, 건강과 나이 때문이다. 아무리 좋은 지위, 권력, 명예를 가졌다고 해도 건강이 허락하지 않으면 그 일을 하지 못한다. 오랫동안 건강을 유지해서 그 일을 했다고 하더라도 퇴직할 나이가 되면 그만둘 수밖에 없다. 혹은 노화가 된 육체로 더 이상 지탱할 수 없을 때가 되면 그 일을 놓아야 한다. 자아에만 갇혀있는 이들은 이쯤 되면, 좌절이 몰려오게 된다. 삶이 허무하니 우울할 뿐이다. 그도 그럴 것이 평생 원 안을 들여다보지 않았으니 마음은 두렵고 무섭기만 하다. 공갈빵처럼 부풀어 오르고 안은 텅 비어 있는 꼴이다. 혹은 구멍 뚫린 도넛 같은 게 마음이라고 여긴다. 그러다가 도대체 살 자신이 없고, 우울이 깊어지면 극단적인 선택까지 하게 된다. 그것만이 아니다. 모든 것을 다 바쳐 투자를 한 다음 파산할 때도, 명예가 실추되어 수치감이 엄습할 때도 그런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된다. 우리나라는 39분당 한 명씩 자살을 하는 자살공화국이다.
내 안에 아무 것도 없고 텅 비어있을 뿐이라고 여기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허무에 사무친 엄청난 착각에 불과하다. 오랫동안 마음을 돌아보고 돌보지 않은 탓에 그런 터무니 없는 오해를 하고만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Self)’를 가지고 있고, 우주의 에너지, 또는 신이 함께 하고 있다. 에너지 보존의 법칙에 의해서, 이 ‘자기’는 절대로 없어지지 않는다. 2011년에 학계에서 공식 인정을 받은 통합 예술 · 문화치료인 심상 시치료(Simsang-Poetry Therapy)에서는 이 자리를 ‘빛’이라고 일컫는다. 신은 빛이며, 인간은 신의 속성을 가지고 태어났다. 이 ‘빛’의 자리가 바로 ‘영혼’이다. 영혼(靈魂, 신령스러운 넋)은 인간이 인간의 한계를 초월해서 신과 닮을 수 있는 길을 예비하고 있다.
원으로 나타낸 마음의 바깥쪽인 자아와 원의 중심인 자기(빛)을 합쳐서 ‘마음’이라고 할 수 있다. 흔히 ‘마음’이라는 단어를 넣어서 이런 말을 한다.
“마음에 들어.”
“마음먹은 대로 해봐.”
“마음이 썩 내키지 않아.”
“마음을 크게 가져.”
“마음을 다쳤어.”
이렇게 쓰이는 것을 봐서는 주로 ‘마음’을 ‘자아’의 영역에 국한해서 말하는 듯하다. 단언하자면, ‘마음’은 의지나 느낌, 생각을 나타내는 개인의 주관적 작용이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마음은 ‘뇌’에만 있지 않다. 미국의 레슬리 다쿠치 박사는 “기억은 뇌에만 저장되는 것이 아니라 몸에 퍼져 있는, 내장으로 뻗는 신경 경로와 더불어 우리의 피부에까지 퍼져 있는 연결망에도 저장되어 있다.”고 했다. 즉, 인체의 모든 세포 조직에서 신경펩타이드(neuropeptide, 아미노산의 아미노기 사이에서 물이 떨어져 나가고 차례로 연결해 사슬 모양을 이룬 채 화학 결합한 것)를 발견한 그는 세포 수용체를 통해 생각이나 기억이 무의식 속에 남아 있다가 의식으로 되살아날 수 있다고 했다. 인간의 체내에 세포가 없는 곳은 없다. 당연히 마음은 온몸에 존재한다. 게다가 역시 ‘에너지 보존의 법칙’에 의해서 마음의 중심인 영혼은 육체가 사라져도 존재한다.
이제, 원래의 질문으로 돌아오자.
“인공지능(AI)이 심리상담을 할 수 있을까?”
누군가는 안될 거라고 하고, 누군가는 될 거라고 한다. 안될 거라고 말하는 이들은 대부분 이렇게 반문한다. “AI한테 감정이 없는데 상담이 되겠냐?”고. 될 것이라고 하는 이들은 또 이렇게 말한다. “AI도 감정이 있어!”라고.
2022년에 공개된 AI 휴머노이드 로봇 ‘아메카’한테 너한테 악취가 나는 것 같다고 하니 아메카는 바로 얼굴을 찡그리며 굉장히 불쾌한 표정으로 대꾸한다. “뭐라고요? 그게 무슨 뜻으로 한 말인가요?” 2023년 9월에 등장한 로봇 ‘아우라’는 아메카의 수 배나 진화된 모습으로 농담도 술술 해낸다. 이제, 솔직해지자. 오래전부터 AI 로봇은 뇌인지과학과 손을 잡고 있다. ‘뇌인지과학’은 마음과 행동의 근간을 ‘뇌’로 여기고 뇌의 통합적 기능을 연구하는 분야이다. 인간의 뇌 기능이 고스란히 휴머노이드에 이식되는 셈이다. 얼마 되지 않아 이식은 놀라운 속도로 이뤄질 것이다. AI는 당연히 심리상담을 할 수 있다! 단, 자아(ego)의 측면에서만!
결론을 말하자면, AI는 영혼을 흉내 내기는커녕 영혼 근처에 얼씬거리지도 못한다. 영혼의 성장은 영혼을 가진 존재만이 할 수 있으며, 유한한 생명을 가진 이만이 영혼 성장을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육체를 벗어나서 영혼만 존재할 수 있는 상태, 사후에도 영혼의 삶이 가능한 존재가 영혼 성장을 이룰 수 있다. 이런 이유로 AI는 얕은 물에서 물장구칠 수는 있지만, 깊은 바다에서 헤엄치며 바다의 보물을 캐낼 수 없다. AI가 심층적인 내면을 다룰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하다. 영혼을 자극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제 왈가왈부할 것이 없다. 명확한 한계를 알아차렸다면, 더 이상 따질 것도 없다. 21세기 붐처럼 일고 있는 심리상담사, 심리 정신치료사를 꿈꾸는 이들이 준비해야 할 것은 분명하다. 자아가 아니라 자기, 마음의 빛을 향해 스스로 걸어가는 것이다. 그렇게 ‘마음의 빛’을 향해 걸어간 만큼, 그렇게 자각한 만큼 심리상담을 할 수 있다. 현대인의 대다수는 외부에만 눈을 돌리고 마음의 눈은 아예 감은 채 살아가고 있다. ‘마음의 빛’을 알아차릴 엄두도 내지 않는다. 늘 우중충한 날씨에 피할 수 없는 스트레스가 비처럼 내리는 내면을 가지고 안간힘을 내며 살아가고 있다. 그렇지만 원래의 하늘이 사라져서 비가 내리는 잿빛 하늘이 된 것이 아니다. 먹구름이 물러나면, 당연히 파란 하늘이 본래의 모습을 드러낸다. 자신도 모르게 쳤던 마음의 철벽들, 화, 짜증, 분노들이 본래의 빛을 자꾸 가려왔다. 너무 많이 가려서 빛이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거나 거부할 따름이다. 그런 이들에게도 빛은 여전히 변하지 않고 늘 그 자리에 빛나고 있다.
AI 시대에 심리상담사가 해야 할 일은 내담자가 ‘마음의 빛’을 찾는 여정을 같이 하는 것이다. 위로나 의지나 지식 따위는 AI가 얼마든지 그럴듯하게 해낼 것이다. 제대로 된 삶을 사는 이가 삶을 제대로 가리킬 것이다. 이 단호한 명제 앞에 나는 고개를 숙이며 나를 돌아보고 또 돌아본다.
* 호모 룩스(HOMO LUX)는 빛으로서의 인간을 일컫습니다. 라틴어로 인간이라는 ‘호모(HOMO)’와 빛인 ‘룩스(LUX)’가 결합한 단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