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코알라 Sep 06. 2022

'하고 싶은 일'과 '꿈'의 차이

 몇 년 전 보육교사를 하면서 같은 반 아이들과 꿈에 대한 이야기를 했었다. 때는 크리스마스 무렵이었고, 크리스마스 장식으로 쓸 여러 가지 것들을 아이들과 만드는 중이었다. 아이들은 자신이 만든 다양한 알록달록 장식물들을 나무모형에 걸면서 재잘재잘 소란스러웠다. 나는 머메이드지로 만든 비둘기 모양 장식물에 아이들이 갖고 싶은 것이라든가, 되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 등을 물어보고 적어서 걸어주고 있었다. 아이들에게 꿈이나 소원이란 말은 이해하기 어려워서 쉽게 풀어서 이야기하느라 그런 식으로 질문을 한 것이었다. 그것에 대한 아이들의 대답은, 귀여우니까 토끼가 되고 싶다든가 맛있으니까 당근이 되고 싶다든가 하는 식의 매우 뜬구름 잡는 이야기 뿐인데 나는 그런 말들이 너무 좋아 싱글벙글 웃으며 아이들 한 명 한 명 붙잡고 다 물어보았다. 그런 나를 보고 한 아이가 불현듯 내 꿈이 무엇인지 궁금해졌었나 보다.


 “이모, 이모는 꿈이 뭐예요?”

   *우리 어린이집에서는 전국 유일하게 교사를 선생님 대신 ‘이모’라고 부른다.


당근이 되고 싶다는 아이들에게 나의 꿈을 진지하게 이야기할 필요야 없겠지만 나는 그래도 성심성의껏 아이들에게 대답해주었다.


 “이모는 멋진 할머니가 되는 게 꿈이야.”


 그러자 아이들은 배꼽을 잡고 까르르 웃었다. 아이들에게 웃음 포인트는 ‘멋진’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할머니’에 있던 터였다. 항상 같이 사는 교사가 할머니가 된다는 것이 아이들에게는 믿기지 않는 일이라 그냥 웃기려고 하는 이야기인가 보다 하고 웃음이 터졌을 것이다.


 언제부턴가 내 꿈은 ‘멋진 할머니가 되는 것’이었다. 아마도 내 아이가 조금씩 성장하면서 성인이 된 이후의 삶을 그려보기 시작했을 때부터였던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가끔 주변에서 만나는 비상식적이고 뻔뻔한 노인들을 보면서도 들었던 생각인 것 같기도 하다. 선거철이 되면 청소년기에 투표권이 없듯이 나이가 70이 넘어가면 투표권을 주지 않는 것이 더 좋은 것이 아닐까 생각할 정도였으니까. 세상은 젊은 사람들이 움직이고 있으니 그들에게 더 많은 권리를 줘야 하는 게 아닐까, 늙은이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세상이 때론 현명할 수 있어도 변화된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은 많이 편협하고 왜곡될 수밖에 없으니까라고 생각했다. 나 또한 나이가 들면 그렇게 변할 수 있으니 나도 기꺼이 70이 넘으면 투표권을 갖지 않겠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그래서 멋진 할머니가 되는 일은 내게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오래 사는 것도 바라지는 않았지만 내가 정한 대로 살아지는 게 인생이 아니니 언젠가 할머니가 된다면 나는 매우 현명한 노인으로 살고 싶다는 게 꿈이었다. 그땐 보육교사를 하기 힘들겠지만, 그래도 가능하면 어린아이들 곁에 있고 싶고, 그런 아이들 곁에서 옛날이야기를 재밌게 들려주는 할머니로 있고 싶다. 혼자서도 다른 사람들에게 신세를 지지 않고 살 정도로 몸을 가눌 수 있게 건강하게 살고 싶고, 때론 삶이 힘든 젊은이가 찾아와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을 수 있도록 다정한 사람이 되고 싶다. ‘라테는 말이야’라고 굳이 들먹이지 않고, 조용히 이야기를 들어주며 그들 스스로 현명한 답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리고 이기적이고 편협하게 늙어가는 어른들을 스스로 부끄럽도록 속 시원하게 혼내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 지금 내 꿈은 그렇다.


 그렇다고 어릴 때부터 내 꿈이 그랬던 것은 아니다. 어릴 때의 내 꿈은 보다 현실적이고 미래지향적이었다. 그리고 매우 많았다. 워낙 호기심이 많은 편이라 궁금한 것도 많고, 하고 싶은 것도 많은 터였다. 아주 어릴 때부터 추리소설 마니아로서 셜록홈스 같은 명탐정이 되고 싶기도 했고, 글을 읽고 쓰는 것을 좋아해서 작가가 되고 싶은 적도 있었다. 혼자서 여행을 다니는 것이 가능해질 무렵부터 나는 여행가를 꿈꿨고, 여행지 이야기를 적으며 먹고살아도 좋겠다 싶어 여행작가를 꿈꾸기도 했었다. 요즘이야 여행작가가 흔하지만 내가 여행작가를 꿈꿨던 시기에는 그런 게 어떻게 직업이 되겠어 싶을 정도로 꿈같은 이야기였기에 혼자서만 ‘난 선구자였어’ 하며 자족하는 꿈 중에 하나기도 하다.

 많은 꿈들 중에 아직도 포기하지 않고 있는 꿈은 선생님이 되는 것이다. 이런 꿈을 꾸었던 때는 고등학생 때였는데 문득 학교생활을 하다가 나를 생각해주는 진정한 선생님이 계실까에 대한 의구심이 들었던 때였던 것 같다. 이해하지 못한다고 욕설하는 선생님, 성적이 나오지 않았다고 살인적인 숙제를 내주던 선생님, 숙제를 해오지 않았다고 당연한 듯 매를 드는 선생님, 심지어는 대들었다고 그 학생에게 이단옆차기를 기가 막히게 선보여주시던 선생님, 여학생들에게 거리낌 없이 신체접촉을 하시던 선생님 등 말하자면 입 아프고, 열거하자면 손가락 아픈 수많은 선생님들의 유형들 속에서 어떤 선생님이 좋은 선생님일까를 고민하게 만들던 시절이었다. 그때 내가 내렸던 결론은 질풍노도의 시기를 사는 청소년에게 가장 중요한 사람은 멘토가 되어주는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인생의 수많은 질문을 갖게 되는 시기에 시원하게 답으로 향하는 길을 알려주는 선생님, 그런 선생님이 아무도 없다는 걸 알게 되면서 나는 그런 선생님이 되어야겠다고 마음먹었었던 것이다.


 선생님이 되는 길은 쉽지 않은 길이었다. 우선 공부를 열심히 해야 했으니까. 나는 공부와는 거리가 멀었다. 노는 것을 더 좋아하는 편이었다. 한창 대입을 준비해야 하는 고3 시절에도 거리낌 없이 땡땡이를 치던 사람이었으니 좋은 대학에 들어갈 리 만무했다. 심지어 대학에 들어가서도 공부를 하지 않았다. 세상에 부당한 것이 많다고 그것을 직접 고쳐야겠다며 맨주먹으로 거리를 뛰어다니느라 공부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러다 보니 선생님이 되고 싶다던 내 꿈은 점점 멀어져 갔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한 번 마음먹은 꿈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나는 보육‘교사’가 되어 있었고, 아동복지시설에서 일할 수 있는 사회복지사 자격증도 갖게 되었으며, 청소년을 직접적으로 상대하며 생활할 수 있는 청소년지도사 자격증도 따게 되었다. 어쨌든 내 꿈은 청소년기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보다 멘토링에 목적이 있었으니까 부분적으로는 꿈을 향해 잘 달려가고 있는 중이다. 지금 당장 그 일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나는 내 삶을 진지하게 한 발 한 발 걸어 나가다 보면 언젠가는 그 목적지에 다다르게 되어 있을 거라고 믿고 있다.





 내가 부모가 되고 보니 꿈은 나의 꿈으로 끝나지 않았다. 아이의 꿈을 찾아주고 지원해주는 일을 해야 했다. 그보다 앞서 아이가 멋진 꿈을 가질 수 있도록 해주어야 했다. 주변엔 내가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내가 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찾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물론 모든 사람들이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잘 알아야 한다는 법은 없다. 하지만 그것때문에 방황하고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니 사는 것이 그리 재밌지 않았던 것이다.

 내 아이는 다행히도 그러지는 않았다. 그래서 나는 아이가 어릴 때부터 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무엇이든지 해보게 했다. 새로운 일에도 도전할 기회를 주었다. 심지어는 하고 싶지 않은 일도 마음을 내어 한 번쯤은 해보게 했다. 많은 기회 속에서 아이는 자신이 무엇을 잘하고, 무엇을 못하는지,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경험해 볼 수 있었다.

 아이가 어릴 땐 그림 그리는 것을 무척 좋아했다. 어디서 들었는지 모르지만 어느샌가 아이는 자신이 꿈은 화가라고 이야기를 해주었다. 아이의 그림이 어느 정도로 잘 그린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계속 그리고 노력하다 보면 그림을 그려서 먹고살만한 정도는 되지 않을까 생각해보기도 했다. 실제로 아이 아빠는 그림에 솜씨가 있어 대형 걸개그림을 혼자서 그릴 정도이기도 했다. 아빠의 재능을 조금 닮았다면 봐줄 정도의 그림은 그리지 않을까 싶었다. 외동으로 자란 아이는 혼자 있는 시간에는 그림을 자주 그렸다. 방 안에 틀어박혀 온갖 상상의 세계를 그림으로 표현하며 놀았다. 나이가 한 두 살 먹어갈수록 그림 그리는 도구도 업그레이드되어 수채화 물감, 유화 물감 등을 사용해 다양한 그림을 그려보기도 했다. 언젠가는 무엇에 홀렸는지 모르겠지만 작은 엽서 크기의 수채화를 여러 장 그려서 주변 아이들에게 선물로 주기도 했다. 캐릭터 그림에도 관심을 가져 책을 사다가 따라 그리기도 많이 했다. 하지만 아이는 어느 날 어릴 때 가졌던 화가의 꿈은 접은 지 오래라고 이야기했다. 그림을 그리며 즐겁기는 하지만 직업으로 삼기에는 자신의 실력이 턱없이 부족하다고 했다.

 

 그렇게 화가의 꿈은 접었지만 변함없이 진행 중인 꿈이 있다. 바로 ‘노래를 잘 부르는 일’이다. 어릴 때부터 쉴 새 없이 노래를 부르며 살더니, 지금은 한 달에 서너 번 정도는 지역의 행사에서 불려 다니며 즐겁게 노래 부르는 일을 하고 있다.

 사실 아이가 어릴 때는 노래를 잘 부르리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다. 아이의 아빠는 지독한 음치였는데, 그런 음치 아빠가 불러주는 자장가를 들으며 잔 아이가 노래를 잘할 거라고 누가 생각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아이의 아빠는 자신이 음치라는 사실을 성인이 되어서야 알았다고 했는데 주변에서 자신이 노래를 부를 때마다 좋아하고 손뼉 치며 박장대소를 하고 웃어서 그 반응에 자신이 노래를 잘 부르는 줄 알았다는 것이다. 노래 한 곡을 다 부를 때까지 노래의 음은 매우 비슷한데, 그 음악에 대한 열정은 대단해서 감정의 강약 표현은 생각보다 섬세했다. 그래서 주로 신나는 노래나 락 장르의 노래를 부를 때 그의 장점이 두드러지게 나타나 사람들을 포복절도할 정도로 즐겁게 만들어주는 재능이 있었다. 그런 사람이 아이의 자장가를 부르고 있는 것을 보면 혼자 보기 아깝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진지해서 간혹 정말 노래에 재능이 있는 것이 아닌가 싶을 때가 많았다. 심지어 노래라는 것이 꼭 기술적으로 잘 불러야 노래를 잘 부르는 것인가 라는 근원적 질문을 뒤집어 생각해 볼 정도였다. 다행스럽게도 아이는 아빠의 음정, 박자를 무시하는 기술보다 성량과 음악을 대하는 감성을 닮았다. 어릴 적 어린이집에서 아이의 노래를 들어 본 한 부모가 노래를 너무 잘 불러서 나중에 가수를 시켜도 되겠다고 말했던 것을 기억하는데 아이는 이후로 가수가 되겠다는 꿈을 키우기 시작했다.


 본격적으로 사춘기에 들어서는 중학생이 된 아이는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쉴 새 없이 노래를 부르는 아이였다. 좋아하는 노래를 들으며 따라 부르고, 노래를 불러 녹음하는 어플에 수많은 노래들을 올렸으며, 그 결과 같은 아파트 층에 사는 분들은 아이를 보면 ‘노래 잘하는 아이’라고 알아볼 정도였다. 감사하게도 그분들은 옆집 사람들이 노래를 불러서 시끄럽다는 민원을 넣지 않았다. 오히려 칭찬을 해주니 아이 입장에서는 신이 났을 것이다. 아이는 노래를 부를수록 더 잘 부르고 싶다는 욕심을 갖게 되었다. 결국 보컬학원에 다니고 싶다고 끈질기게 졸랐다. 그 시절 나는 아이의 노래실력에 그다지 긍정적이지 않았다. TV를 보면 노래를 뛰어나게 잘 부르는 아이들이 얼마나 많은데 저 정도의 실력으로 그런 아이들과 맞설 수 있겠나 싶었다. 하지만 하고 싶다는 아이를 이길 수는 없었다. 아이는 스스로 보컬학원을 알아봤고, 집에서 꽤 먼 거리에 있는 곳이지만 성실하게 학원을 다녔다. 몇 달 다니다가 좀 더 이름 있는 학원으로 옮기기도 했다. 그렇게 1년여를 열심히 다닌 아이는 학원을 다니는 것보다 스스로 더 많은 연습을 하는 것이 실력 향상에 좋다는 것을 깨닫고 보컬학원을 그만두었다. 학원을 다니면서 연습 숙제를 많이 안 했던 반성이기도 했다. 그렇게 가수의 꿈은 접는 것인가 싶었는데 아이는 다른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비슷한 꿈을 가진 아이들과 어울리기 시작한 것이다. 청소년 아카데미 같은 곳을 찾아 노래 배우는 것을 함께 하는 아이들을 찾거나, 공연에 목말라하는 아이들을 만나 밴드를 결성하고 공연을 하기 시작했다. 밴드를 결성하는 일은 어려운 일이었는데 우선 자신의 노래 취향이 같아야 하는 일이었고, 서로의 마음이 맞아야 하는 일이었다. 모였다 흩어졌다 하는 사이 가장 마음이 잘 맞는 기타리스트 아이를 만나 지금의 2인조 밴드 활동을 4년째 하고 있다.


 하지만 아이에게 꿈은 가수가 아니다. 지금 당장 하고 싶은 일이다. 아이는 말한다. 자신이 언제까지 무대에 서서 노래를 부를지 알 수 없다고 말이다. 무대에서 노래를 부를 수 있는 나이를 24살까지 라고 아이는 말했다. 왜냐하면 지역에서 노래를 부르는 젊은 사람들을 섭외할 때 그 정도의 사람을 선호하는 듯했기 때문이다. 지역의 공연 인프라는 많지 않았고, 공연비도 적어서 아무래도 아마추어를 부르는 것이 부담이 적어서일 것이다. 아이는 그 현실을 잘 알고 있어서 지금 당장 들어오는 공연에 즐겁게 임하고는 있지만 그 이상의 것을 꿈을 꾸지는 않는 것 같았다. 노래를 부르며 사는 것은 좋지만 지금 하고 있는 일(미디어 협동조합에서 일하고 있다.)도 즐겁게 하고 배우는 중이다.


 어릴 때부터 꿈은 원하는 직업과 같은 말인 줄 알았다. 그래서 자신의 꿈과 직업이 같은 사람은 얼마나 행복한 삶을 살고 있을까 싶기도 했다. 그만큼 꿈은 이루기 힘든 일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내 꿈은 ‘멋진 할머니’가 되는 것이라고 말할 정도로 하고 싶은 일과 꿈이 다르다는 것을 안다. 꿈은 이루기는 힘들지만 노력하면 이루어지는 일이다. 내 아이는 그것을 이미 아는 것 같다. 뛰어난 가수가 될 필요는 없고, 노래 부르는 것이 즐거우면 그렇게 즐겁게 노래 부르며 사는 것이 즐거운 인생이라는 것을 말이다. 아이와 나의 꿈이 비슷하게 겹치는 부분이기도 하다. 나는 술자리에서 자연스럽게 누군가 내게 노래를 청할 때 어려워하지 않고 멋들어지게 노래를 부르면서 노래 잘한다는 칭찬을 들으면 세상 다 얻은 듯 행복하더라.


매거진의 이전글 아이를 키우며 내가 의도했던 것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