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제로 상대방과 어떤 갈등으로 인해 감정이 격해져 있는 친구에게 저 이야기를 했다가 'T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다'란 소리를 들었지만. 오래된, 끝이 없는 갈등으로 도무지 답을 찾을 수 없는 관계일수록 저 모드를 실천해보기를 추천한다. 특히 가족이나, 연인 간에 적용해 보면 좋을 것 같다. 이걸 진작에 알았더라면 돌아가신 우리 엄마랑은 좀더 다른 이별을 할 수 있었을 거다.
거울모드의 가장 큰 장점은 극단성을 줄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극단성은 항상 반동을 낳고 자칫 더 큰 극단으로 흐르기가 쉽다. 사람들의 싸움이 보통 그렇다. 한쪽이 이쪽 뺨을 갈기면 반대편은 더 쎄게 두세대를 갈긴다. 이쪽은 그러면 더 화가 나고...반대편은 더 쎄게...이렇게 극단성은 커져만 간다. 사실 지구에서 현재 벌어지고 있는 전쟁이 대부분 이런 식으로 이어지고 있다. 최초에는 뭔가 싸움의 이유가 있었겠지만 이제는 그 어떤 이유를 갖다 붙이기도 힘든 만성적인 전쟁이 이어지고 있다. 그냥 서로 더더더 화가 나서 점점 더 극단으로 흐를 뿐이다.
어떤 여정을 택하든지간에 본인의 자유일 거다. 찐 극단을 경험하고 싶은 존재들도 많을 거다. 그렇지만 극단성과 반대 극단성의 반동 안에서 오락가락 하는 삶이 그저 반복된다면, 그것도 그것이 몇 생이나 이어진다면 그 자체로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지옥이 아닐까. 그건 굴레 안에서 그저 맴도는 것과 같다.
일단 나는 그러한 굴레 속에서 살고 싶지 않았다. 소원을 쓰는 대로 이루어진다는데, 내가 누군가에게 말했거나, 적었던 소원은 '나 돈 많이 벌고 싶어' '유명해지고 싶어'이런 말들이었다. 그런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왜냐면 많이 확언하면 이루어진다는 말을 어디선가 주워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사실 내가 진짜 더 많이 원했던 것은,
'나의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어'
였던 것 같다. 이제는 저 문장으로 정리할 수 있지만, 당시에는 전혀 알지 못했다.
사실 저 굴레라는 것이 바로 카르마다. 카르마라고 하는 것은 다른 비슷한 단어로는 '원죄' '죄'등으로 표현되고, 솔직히 카르마라는 단어 자체도 권선징악, 사필귀정의 뉘앙스를 지우기는 어려울 것 같다. 그러니까 '무언가 잘못된 것'의 개념으로 받아들이기가 쉬운 개념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이것은 굉장히 뿌리깊은 신념에 가까워서, 여기서 벗어난 사고를 하는것도 참 어렵다. 그렇지만 무언가가 옳은 절대적인 기준이 있고, 그것에 맞느냐, 맞지 않느냐 를 가린다면 우리는 끊임없는 이분법(이원성이라고도 하는)에서 자유롭기는 어려울 거다.
무언가가 끊임없이 양분된다고 하는 것은 끝없이 양 극단을 생성하는 가능성이 커지는 것이다.
이쯤에서 우리는 카르마라는 단어에 대해서 조금 달리 접근해보는 것은 어떨까. 사실 카르마는 나쁜 짓을 해서 지은 죄에 대한 벌이라기 보다는, 그저 자기 자신이 갖고 있는 극단성과, 그로 인한 반동 안에서 계속 오락가락만을 반복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나 자신이 어떤 극단성을 갖고 있을 수는 있다. 그러나 그 극단성이 만들어 내는 반동속에서 그저 왔다갔다 하는 것 만이 많은 존재들이 바라는 것은 아닐 거다. 뭔가 좀더 나은 방안은 없을까. 좀더 부작용이 없으면서도, 내가 발전할수 있고 굴레에서 벗어나는 그런 방법 말이다. 사실 그 반동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더 나은 삶을 위한 선택이었다. '내가 이러이렇게 했을때 뭔가 별로 안좋았어, 그러니 다음번엔 그 반대쪽으로 실천해봐야지.'하는 선택 속에서 우리가 분명 삶을 낫게 개선한 부분도 있지 않던가. 그렇지만 그 방법으로 더 이상 삶이 개선되지 않는다면, 무언가 한계에 다다랐다면, 이제는 자신이 가진 극단성은 없는지, 혹시 나는 그 극단성과 그 반동 사이에서 오락가락 하는 반동을 반복하고 있는 건 아닌지 살펴보면 좋을 것 같다.
그러자면 첫번째로 내가 가진 극단성이 무엇인지 아는 것이 좋을 것이고, 두번째로는 내가 가진 극단을 더 크게 키우지 않는 방향의 선택을 해 나가는 것이 반동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이다. 사실 거울 모드가 가진 가장 큰 장점이 바로 그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대부분의 경우 우리가 거울 모드를 발휘해야 하는 때에는 발작버튼이 심하게 눌리는 지점들이다. 어떤 특정 상대와 특정 이슈로 이야기하면 불같이 화는 때가 있다. 이때 그저 피하거나 화를 누르기 보다는, 일단은 화를 가라앉히고
'내 안의 어떤 에너지가 이런 일을 나에게 창조하였는가'
살펴보는 것이다. 솔직히 초반에는 그럴수록 화가 더 날 수도 있다. 그러나 극도로 화가 날수록, 더 극도로 더 많이 화가 날수록, '이것은 내가 갖고있는 극단성이 아주 강한 것이며, 그 역풍을 내가 맞은 것 뿐이다' 라고 생각회로를 돌려보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래도 도저히 인정이 안된다면
'전생에 뭐가 있었나보지' 하고 생각해 보는 거다. 사실 이건 우스개 같기도 하지만 마냥 우스개가 아니다. 당신이 미처 인지하지 못하는, 당신 내면에 아주 깊이 자리 잡은 자신의 에너지에 대한 알아차림이자 인정이고, 내가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자기 자신과 더 온전히 하나가 되는 과정이다.' 내가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나 자신을 알아가는 것' 이것은 더 큰 나로서의 나를 알아간다는 뜻이며, 실제 성장의 과정이라고도 볼 수 있다.
이것은 말하자면 자기 인정의 과정이다. 어떻게 보면 거울모드 자체가 자기 인정의 과정이라고도 볼 수 있다.'아 나에게 저런 극단성이, 혹은 저 반대의 극단성이 저렇게나 심하게 있구나'
하고 인정이 진실로 x1000000 어려울 것이다. (그것은 내가 너무도 잘 안다......) 그러나 그것이 빠르게 될 수록, 내가 자유롭다. 사실 자기 인정의 과정에는 스스로의 과오에 대한 부끄러움, 자괴감, 부정하고 싶은 마음, 죄책감 등의 감정의 해소가 따라오기 때문에 사실 매우 격렬한 과정이기도 하다. 그러나 당신이 진정 원하는 것이 굴레로부터의 자유라면, 당신은 그 모든 과정 또한 잘 넘길 수 있을 것이다.
아주 어렵게 어렵게 , 혹은 억지로, 어거지로라도, 정 안되면 기억도 안나는 전생까지 끌어들여와서 '나의 어떤 극단의 에너지가 어떤 사건들로 발현되어 나는 반대 극의 역풍을 맞은 것 뿐'이라고 조금이라도 인식이 되었다면 당신은 절반은 성공한 것이다. 솔직히, 그부분이 가장 어렵기 때문이다. 자기 인정만큼 어려운 것이 또 있을까? 내가 전생에 어떤 범죄자였을지 모를 일이다. 살인마였을 수도 있고, 부처님의 제자였을수도, 로마의 공주였을수도 있는 일이다. 자기자신이 상상도 못한 삶을 살았을 수 있다.
당신이 만약 어떤 정복자였다고 치자. 그가 성군으로서 백성을 보호하고 잘 살게 해주었을 수 있으나, 어떤 측면에서 보면 그는 연쇄살인마이다. 전쟁을 일으켜 수많은 이를 죽게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랬다고 칠때, 당신은 스스로의 어떤 측면에 돋보기를 더 들이댈까? 성군, 정복자로서의 정체성을 더 크게 느낄 수도 있고, 반면 연쇄살인마로서의 죄책감이 아주 강하게 남아있는 존재도 있을 수 있다. 게다가 이미 지나온 세월들이며, 자기 자신의 족적이다. 그런 자신이라면, 어떻게 스스로를 이해해주고 싶을까?
그냥마냥 이분법적인 시야로, 예를 들면 선과 악이라는 잣대를 스스로에게 들이밀면 자신은 영원히 용서받을 수 없는, 그야말로 죄와 속죄의 굴레에 빠질 수밖에 없다. 때문에 특히 죄책감이나, 선/악이라는 이분법, 혹은 자신만의 이분법이 강한 사람이라면 자기자신을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이분법에서 벗어나는, 자기가 갖고 있던 시야의 한계를 조금씩 깨 나가는 과정들을 겪게 된다. 그것은 나를 좀더 이해하고, 용서하고, 더 깊이 사랑하게 되는 길이기도 하다. 또한 내가 가지고 있던 극단성(이분법적 사고)에서 조금씩 자유로워 지는 길이기도 하다.
해서 스스로 자기 인정을 거치면서 나의 극단성을 조금씩 잡아나가다 보면, 나의 에너지 자체가 극단성이 덜해지게 되고, 내가 이전에 겪었던 일을 설령 비슷하게 겪을지라도, 덜 극단적으로 발현될 가능성이 커진다. 내 에너지의 극단성이 개선되었는지, 안 개선되었는지를 알 수 있는 가장 큰 척도는 내가 극단적으로 통제가 안되는 분노가 일던 상황을 똑같이 마주했을때, 내 상태가 어떤지를 보면 된다. 똑같은 정도로 화가 난다면 아직스스로 더 내려놓고 자기 안의 극단성을 좀더 잡아가는 작업이 필요하다.
덤덤히 풀어놓았지만 이것은 끊임없이 스스로를 돌아보고, 내가 가진 고집이나, 때로는 종교적 신념, 정치적 신념 등등 내가 갖고 있는 강한 사고의 틀을 내려놓아야 하는 과정이다. 내가 절대적으로 맞다고 생각했던 것이 꼭 그렇지 않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하고, 내가 절대적으로 싫고 나쁘다 생각했던 것들에 대해서 '그럴 수도 있음'을 받아들여 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이것은 나에 대한 더 깊은 이해와 깊은 자기사랑의 과정이기도 하며, 나 스스로에게 그런 깊은 이해를 갖게 되면 우리는 타인을 바라볼 때에도 더 깊은 이해와 사랑으로 바라보기가 점점 쉬워진다.
한편으로, '모든 것은 내가 창조했다.' '내게 발생한 모든 일은 나에게 잠재된 에너지의 결과다'라고 했을때,분명히 상처받는 사람들도 많을 거라고 생각한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갑작스러운 이별이라던지, 살인이나 강간,가정폭력 등의 강력범죄를 겪은 분들에게는 특히 더욱 그럴지도 모른다. 전생이라는 것이 그렇게 와닿는 느낌도 아니고 말이다. 그런 분들께는 일단 깊은 위로를 보낸다. 회복할 시간이 충분히 필요할지도 모르고, 감정적인 해소와 정화의 시간도 필요하다.
사실 많은 영혼들이 자신이 갖고 있는 어떤 극단성도 있겠지만, 전통적으로(?) 자기 자신의 어떤 틀을 깨 나갈때 극단적인 방식을 많이 선호하기도 했었다. 우리가 선인 하면 어떤 고행을 통해 무언가 깨달음을 얻는 이미지가 강하게 남아 있듯이, 우리도 무의식중에 가장 어려운 길을 택하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어려운 어떤 것'만을 계속 하는 것이 깨달음과 득도의 길은 아닐 것이고, 때로는 '어려운 것 만을 하는 그 자체'에 집착하게 되는 경우도 많다(내가 그랬다). 우리가 성장함에 있어서 두려운 순간은 분명히 찾아온다. 그러나 나의 경우를 보면 내가 진짜 두려워 하는 그 부분을 마주하는 것이 두려워서, '진짜로 두렵지는 않지만 고행이라고 할 만큼 어려운 것'에 자꾸 도전하면서 마치 무언가 자유를 얻은 것 마냥 착각했던 세월이 아주 길었던 것 같다. 사실 내가 '진짜' 두려워 하는 부분은, 말 그대로 진짜 두려운 것이라서 마주하는 순간 줄행랑치고 도망가고 싶고, 의당 도망쳐야 맞는 것만 같은 때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그런 극단적인 사건을 겪어가면서 자신의 무언가를 깨 나가려고 하는 방식 또한 극단과 반동의 굴레에 빠지기가 쉽다. 해서 사실은 굉장히 구시대적인 방식이며, 현시점에서 딱히 권장되기도 어렵기도 하다. 그러나 여전히, 내가 가진 극단이 아주 강하다면, 아주 강한 극단의 반동이 올 수밖에 없는 것도 자명한 이치이기도 하다.
극단성이라고 하면 아주 드글드글 끓는 큰 액션만을 생각하기가 쉬운데, 사실 평화롭고 아무 일도 없는 듯 보인다고 해서 그것이 완벽한 조화와 균형의 상태는 아닐 수 있다. 극도의 안정성 자체도 극단이다. 극도의 안정성을 가진 분들은 그 자체로 평화롭기 때문에 위와 같은 상황에 마주했을때 특히나 더 당황스러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극도의 안정성의 반동으로 따라올 수 있는 것을 떠올려본다면 어떤 일이 발생했을때 이해하기 좀더 쉬우시지 않을까 싶다. 한편으로, 이 넓고 넓은 우주에서 불가능한 것은 없다는걸 상기해 보면, 나에게 어떤 극단성이 없다고 할 지라도, '그냥' '벼락같이'내가 무언가를 겪을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길 가다 던진 돌에 개미가 죽기도 하듯이 말이다.
어쨌거나 우리가, 아마도 지구상의 다수가 가고 싶은 방향성은 자신 안의 극단성을 잡아가는 일일 거라고 생각한다. 그럼으로서 자신을 이해하고, 또 타인을 더 깊이 이해해 가는 것.그것은 내 안의 경계를 없애간다는 이야기도 되고, 또 다른 말로는 타인을 이해하며 새로운 지혜를 알아간다는 이야기도 된다. 그러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중심을 찾아가며, 매번 더 깊은 조화와 균형으로 가고자 할 것이다. 흔히 하는 말로, 이원성을 좀 더 극복하게 될 것이고, 한편으로는 나와 남이 사실은 그렇게까지 남은 아니며, 따지고 보면 서로 모두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더 깊이 알아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사실 그러한 시도들은 나름대로 계속 있어왔다. 우리는 항상 더 행복한 삶과 더 나은 세상을 만들려고 노력해왔기 때문이다. 우리가 흔히 '부처님 손바닥 안이다'라는 표현을 쓰는데, 우리가 뭔가 혁신을 이룬 듯 보이는 것이, 그저 굴레의 반복인 경우도 너무 많았다고 생각한다. 어떤 이념이 한 사회를 지배했는데, 그것으로 인한 폐해가 발생하고, 그것이 곪아 터져서 원래 체제를 전복시키고 새로운 신념이 한 사회를 지배한다. 그리고, '세상을 바꿀 것이다' '이제 정부가 바뀌었으니 유토피아가 펼쳐질 것이다'라는 희망이 무색하게 또 그 신념이 가진 극단성의 반동이 사회에 드러난다. 인간의 역사 전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고, 물론 그 안에서도 디테일한 부분에서의 합의와 진보가 있었긴 했지만, 아주 큰 틀에서 봤을때 어딘가 '양극단의 굴레에서 벗어난 것 같지는 않다'는 느낌이 강하게 드는 것이다.
실제로 지금 지구의 상황만 봐도 그렇다. 지구 곳곳에서 격렬한 전쟁과 첨예한 갈등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 원인을 타고타고 올라가다 보면 네 논리가 내 논리고 내 논리가 네 논리다. 시시비비는 더이상 문제가 아닌 듯 보인다. 이제는 그냥 악만 남은, 서로의 반동과 감정적인 정화가 만들어내는 극단성의 심화로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그 안에서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너무도 극단적인 사건을 겪고, 그 극단성은 또 더 큰 극단성을 낳는다. 이런 것들이 심화되었을 경우는?
우리는 인류의 역사에서 수도 없이 비슷한 일을 겪었다. 굳이 꼭 안 가봐도 양극단성이 심해지면 어떻게 될지 위기의식을 겪었고, 나름의 불안한 평화를 지켜왔던 것이다. 사실 지구에서 일어나는 일은 지구인 한명한명의 극단성의 총합일 거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사는 이 곳을 좀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고 싶다면, 우리의 삶이 행복하기를 바란다면, 각자가 가진 극단성과 이원성을 다스리는 것이 좋은 방법일 거라고 생각한다. 평화를 수호한다며 이게 맞네, 저게 맞네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 조차 '무엇은 맞고 무엇은 틀리다'의 굴레 안에서 맴도는 것일수도 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거울모드가 만능은 아니다. 내게 있어 거울 모드는 많은 면에서 유용함을 주었지만, 어떤 미묘한 지점에서의 오류를 범하게 하기도 했다. 첫번째는, 앞서도 살짝은 언급했지만 모든 사건에 있어서 나 자신을 먼저 돌아보다 보니 모든 사건을 '내 탓'으로 돌리게 된다는 거였다.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 때 그 긍정적인 부정적인 모든 결과가 내 탓이다'
와(보통은 부정적인쪽으로 더 치우쳤음)
'내 안의 어떤 에너지가 이런 식으로 그저 발현된 것 뿐이다'
는 아주 비슷한 문장같지만 스스로를 대하는 태도에서 굉장히 큰 차이를 보였다. 전자는 스스로를 끊임없이 죄인으로 만드는 사고방식이었고, 후자는 죄/죄가 아닌것 이라는 판단에서 좀더 자유로워져서 좀더 적극적으로 스스로를 바꿔나가는 방식이었다. 전자의 경우도 스스로를 바꿔나가는 작업이었지만, (도대체가 그 기준은 모르겠지만 하여간에)죄의식이라는 것에서 자유롭지 못했었고, 후자의 경우는 좀더 폭넓게 스스로를 이해하고 좀더 당당해진 태도로 스스로를 바라보는 느낌이었다. 뭔가 좀더 주체적인 태도로 에너지를 바꿔나가는 느낌이었다고나 할까. 나의 경우에는 이 둘의 아주 미묘한 차이, 그렇지만 아주 큰 차이를 이해하는데 굉장히 오랜 시간과 시행착오를 겪었지만 독자분들은 그 시간이 없거나 아주 짧았으면 좋겠다.
내가 범하게 된 두번째 오류는, '내 앞의 사건이 모두 나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쪽으로 너무 열심히 나 자신을 돌아보다 보니, 이 세상이 사실은 모두 다 섞여 사는 세상이라는 것, 여러 존재의 상호작용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때로 간과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한창 저 생각에 극단적으로 빠져 있을 때는 마치 상대방은 아무런 자유의지도 없는 것 마냥 인식되어버렸던 적도 있었다. 요즈음은 이제 그런 시야에서 한걸음 물러나, 모두 함께 어울려 사는 세상, 더 큰 시야에서 서로의 균형과 조화 라는 관점에서 삶을 바라보려고 노력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