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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버섯 Sep 20. 2023

님아, 그 말은 하지 마오

언젠가 콘센트 속에 사는 작은 요정의 얘기를 떠올린 적이 있다. 혼자 집을 지키는 아이가 지루함과 외로움을 견디다 못해 집 안 구석구석을 뒤지고 다니다가 콘센트 속에 사는 요정을 발견하면서 시작하는 이야기다. (작은 방에만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콘센트가 있었다는 설정이었다.) 그런데 나는 이 이야기를 시작도 못 하고 마음을 접었다. 이유는 단 하나. 아이들이 따라할까 봐.

이 동화를 읽고 아기자기한 콘센트 속 세상에 호기심 (또는 호감)을 느낀 나머지 그 속을 쑤시고 드는 어린이가 나올까 봐 겁이 났던 거다.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끔찍했다. 그래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 얘길 접었다.


동화를 쓰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어린이에게 더 관심을 가지는 사람일 수밖에 없는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좋아하고, 염려하는 마음이 커지는 바람에 바른 말을 하고 싶고, 바른 길로 인도하고 싶어지는 거다. 그런 나머지 훈계를 하거나 교훈을 주려는 말이 나도 모르게 튀어나오게 된다. 어떨 땐 연령이 어린 독자들이 재미 속에 슬쩍 버무려 놓은 주제를 못 찾을까 봐 직접 나서서 말해 주기도 한다. 그것도 한 번으론 모자란 것 같아 두 번, 세 번이나.


그렇게 하다가 떨어졌다.


합평 모임에 가져간 단편 한 편이 떠오른다. 반응은 나쁘지 않았다. 모임을 이끌어 주시던 선생님께서 별다른 지적 없이, 등장인물의 입을 통해 나온 대사 한 줄을 빼면 어떨까 하는 언급을 하셨을 뿐이다. 물론 그걸 취사 선택하는 건 전적으로 쓴 사람의 선택이기 때문에 참고만 하면 된다. 나는 빼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때 내가 쓴 글은 일종의 알레고리여서, 어린이 독자들이 내가(작가) 하고 싶은 말을 못 알아 들을까 봐 조바심이 났기 때문이다.


여기서 두 가지 문제가 있다는 걸 나중에야 깨달았는데,

첫째는,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을 독자가 못 알아 들었다면 그건 잘못까지는 아니라도 잘 못 쓰여진 글일 수 있다는 것.

둘째, 애초에 주제라는 건 작가의 마음 속에 있는 '무엇'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그러니까 주제를 파악하든 말든, 심지어 내 의도와 다르게 주제를 해석하더라도 그건 독자나 평론가의 몫이라는 거다. 쓰는 사람은 쓸 때의 방향성으로 주제를 품으면 된다는 것 정도가 내가 깨달은 점이다.


시간이 지나서 나는 합평 때 들고 갔던 그 글을 꺼내 선생님께서 지적해 주셨던 그 문장을 슬그머니 지웠다. 그때는 그 문장이 없으면 불친절한 작품이 될 거라는 생각이 강했는데, 지금은 그 문장이 없어서 한층 세련된 글처럼 보인다.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이렇게 자꾸 설명하려고 하고 가르치려고 하는 것은 내가 어린이를 믿지 못해서였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내 마음 속에, 어린이들은 경험이나 지식이 부족해서 잘 이해하지 못할 거라고 낮잡아 보는 마음이 숨어 있었던 거라고.

이제는 믿는다. 나보다 깊고 훌륭한 어린이의 세계를.


그러니까 나는 이제 쓸까 말까 할 때는 안 쓰는 쪽으로.

할까 말까 할 때는 마는 쪽으로.

그래도 그래도 정말 정말 딱 한 번만 쓰고 싶을 때는 작가의 해설을 통해서가 아니라 등장인물의 입을 통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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