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철보국, 불꽃처럼 피어난 신념

산업화를 이끈 제철보국의 정신, 오늘의 포스코에 묻다

by 결담

앞선 글에서 저는 교보생명과 무인양품을 다뤘습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살아 있는 브랜드 가치를 통해, 기업이 어떻게 사회적 울림을 만들어낼 수 있는지를 이야기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시간을 거슬러, 대한민국이 산업화를 향해 뛰어들던 시기로 돌아가 보려 합니다. 소비와 라이프스타일의 브랜드가 아닌, 국가를 세우는 기업, 포항종합제철주식회사(이하 포항제철)의 이야기입니다.



국민적 염원으로 태어난 포항제철


1970년대 초반, 한국은 ‘철 없는 나라’였습니다. 자동차도, 배도, 건물도 지을 수 있었지만, 그 뼈대가 되는 철강만큼은 스스로 만들지 못했습니다. 철은 언제나 수입해야 했고, 산업화의 꿈은 늘 벽에 부딪혔습니다.


그때 등장한 말이 있었습니다.

제철보국(製鐵報國)
철을 세워 나라를 살린다.


이것은 단순한 기업의 구호가 아니라, 국가의 존립을 건 절박한 신념이었습니다.


포항제철의 종잣돈이 된 것은 1965년 한일협정으로 일본이 지급한 경제협력 자금이었습니다. 당시 박태준은 이를 두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돈은 국민이 흘린 피와 땀의 대가다.
단 한 푼도 허투루 써서는 안 된다. 실패한다면 영일만 바다에 빠져 죽을 각오다.


한•일 기본조약


국민의 혈세, 민족의 희생으로 모아진 자금이라는 인식은 제철소 건설에 임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무거운 압력이자 동시에 신념이 되었습니다. 포항제철은 그렇게 국민적 염원 속에서 태어났습니다.



냉소와 회의, 그러나 불길은 타올랐다


하지만 이 위대한 사업은 처음부터 환영받지 못했습니다. 당시 외국 전문가들은 “한국이 제철소를 짓는다니, 모래밭 위에 성을 쌓는 격”이라며 비웃었습니다. 국내에서도 “청구권 자금을 쏟아부었다가 실패하면 나라가 거덜난다”는 우려가 거셌습니다.


제철보국은 거대한 도박처럼 보였습니다.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1973년 6월 9일, 영일만의 모래밭에서 제1고로에 불길이 솟구쳤습니다. 연산 103만 톤 규모의 첫 쇳물. 규모는 크지 않았지만, 한국은 그날 이후 스스로 철을 생산하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제철보국의 신념이 현실이 된 순간이었습니다.

포항종합제철소 준공식


성취로 이어진 제철보국의 정신


포항제철의 불길은 곧 한국 산업화의 심장이 되었습니다.

그 강판이 없었다면 현대자동차의 자동차도, 현대중공업의 선박도, 삼성전자의 공장도 세워질 수 없었습니다.


1980년대 초, 현대중공업이 세계 1위 조선소로 도약할 수 있었던 것도 값싸고 안정적으로 공급된 포항제철 강재 덕분이었습니다. 매년 수입 철강에 쓰이던 수십억 달러의 외화를 절감했고, 그 자금은 다시 한국 산업 전반의 성장으로 흘러들었습니다.


1980년대 중반, 포항제철은 세계 10대 철강사에 진입했습니다. 제철보국이라는 말은 더 이상 이상이 아니었고, 국가경제를 움직이는 실질적 성과로 입증되었습니다.



완벽을 향한 집념, 무소유의 리더십


준공을 앞두고 용광로 설비에 결함이 발견되었을 때, 박태준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차라리 폭파하고 처음부터 다시 지어라.


겉으로는 과격해 보였지만, 그 속에는 원칙이 있었습니다. 결함 있는 설비를 그대로 가동한다는 것은 단순한 기술 문제가 아니라, 국민의 피값을 배신하는 일이었습니다. 완벽하지 않다면 차라리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한다는 결기. 그것이 제철보국 정신의 압축된 표현이었습니다.

포항제철소

그리고 그는 포항제철을 평생 이끌면서도 단 한 주의 주식도 소유하지 않았습니다. 기업을 사유화하지 않고, 철저히 국가와 국민의 것임을 강조한 무소유의 리더십. 이 선택이야말로 포항제철이 단순한 기업이 아니라 사회적 가치와 국가적 헌신이 결합된 신화로 자리매김하게 만든 이유였습니다.



오늘의 포스코, 흐려진 비전


하지만 오늘의 포스코를 바라보면 아쉬움이 남습니다.

포항제철은 국민적 염원과 국가적 사명으로 시작했지만, 포스코는 이제 민영화 과정을 거쳐 글로벌 기업으로 도약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친환경과 경쟁력 강화를 내세우며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 있지만, 과거 제철보국이 가졌던 선명한 목적의식만큼 강한 울림을 주지는 못합니다.


“철은 국력이다”라는 분명한 메시지와 달리, 오늘의 포스코는 때로는 방향성이 흐릿해 보입니다. 기업시민, With POSCO 등 공공성을 그룹의 비전으로 삼았던 시기도 있었지만, 지금은 그 기조가 옅어져 예전만큼 선명하게 드러나지 않습니다.

어려워진 철강업의 현실을 반영하듯, 때로는 공공성보다는 단기적 성과와 글로벌 시장 논리에 휩쓸리는 듯한 인상을 주기도 합니다.



DNA는 여전히 살아 있다


그럼에도 저는 포항제철의 뿌리에 새겨진 DNA가 포스코 안에 여전히 살아 있다고 믿습니다.

포스코는 처음부터 오너기업이 아니었습니다. 개인의 이익을 위해 만들어진 회사가 아니라, 국가적 필요와 국민적 희생 위에서 태어난 기업이었습니다. 오너가 없는 기업이기에 더 많은 부침과 갈등을 겪었지만, 동시에 그것은 포스코가 개인의 욕심을 넘어 사회적 가치를 품을 수 있는 토대가 되었습니다.


제철보국의 신념, 국민의 피값을 허투루 쓰지 않겠다는 각오, 결함 앞에서도 완벽을 고집했던 집념, 그리고 무소유의 리더십. 이 DNA는 오늘도 포스코 안에서 흐르고 있습니다.



맺음말 – 대도의 길 위에서


포스코는 민영화된 기업이지만, 여전히 태생의 뿌리에서 비롯된 공공성과 책임을 지니고 있습니다. 산업의 쌀이라 불리는 철강의 기반을 지켜온 이 역할은 앞으로도 변함없이 중요할 것입니다.


유교의 「예기(禮記)」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大道之行也 天下爲公(대도지행야 천하위공)
대도가 행해지는 세상에서는
천하가 모두의 것이다.

포항제철이 국민적 희생 위에서 세워진 기업의 상징이었다면, 포스코는 여전히 사회 전체의 기업이라는 점에서 이 말과 맞닿아 있습니다.

제철소 불기둥

저는 포스코가 앞으로 글로벌 기업으로 도약하면서도, 그 뿌리인 공공성과 사회적 가치를 잃지 않기를 바랍니다. 제철보국의 신념은 과거의 구호가 아니라, 오늘날에도 실천해야 할 대도의 길입니다.


철을 녹여 나라를 세웠던 포항제철이, 이제는 철을 벼려 인류와 사회를 지키는 포스코로 성장해 가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불씨는 아직도 형산강을 따라 피어오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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