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멈춰 서서 나무를 바라본다.
이제 막 피어나려는지 꽃봉오리가 맺혀있다.
상큼한 내음이 콧속을 통과해 뇌 속으로 스며든다. 나무의 상큼한 꽃향내엔
신선한 산소가 곁들여 들어온다. 나뭇잎이 햇볕을 받아 광합성으로 만들어낸 산소인 것이다.
이 순간, 이 식물과 나는 몸끼리 교류하는 것이다. 식물이 내뱉는 산소와 향기 분자가
내 몸의 콧속을 통해 몸속으로 돌아다니는 것이다.
식물의 절정기는 꽃이다.
그 화려함은 오래지 않다. 황망히 저버린 자리엔 열매가 달려 있다.
꽃과 잎들을 벗어버리고 가느다란 가지마다 매달린 가지각색의 열매들.
보라색, 노란색, 빨간색, 검은색 색채의 향연이다. 아름다운 꽃이 떨구어지지만, 그 자리에 열매가 맺히게 된다. 감탄과 존경을 주는 것은 늦가을의 열매이다.
열매는 식물의 존재 의의이다. 후손과 조상을 이어주는 연결고리이다.
열매의 색과 꽃의 색이 늘 같은 것은 아니다. 흰 찔레꽃이 핀 그 자리에 붉은 열매가 열린다. 영실營實이라 한다. 벚나무는 흰색, 분홍색 꽃이 피지만 열매는 빨간색, 검은 색깔이다.
식물에도 생장수장(生長收藏)의 자연법칙이 그대로 구현된다.
주역에서 말하는 나고 자라서 열매 맺어 다음 세대를 준비하다는 의미이다.
바로 이 생명의 드라마가 수풀 속 식물들에게서 이루어지고 있다. 여름 내내 뜨거운 햇빛을 받아들여 왕성한 광합성 작용을 한다. 그 결과로 무성한 잎과 산소를 뿜어낸다. 산에 오르는 등산객, 수풀 사이를 뛰노는 곤충, 동물들에게 생명의 산소와 피톤치트를 마구 나눠준다.
식물, 동물, 인간이 공존하는 생명 순환의 첫출발인 식물들의 아낌없는 기여가 넘친다.
맨 위의 목련의 겨울눈 속에서 화사한 꽃이 나오는 것이다.
식물은 내일을 위한 준비를 겨울눈 속에 해놓았던 것이다.
산천의 초목의 생김새에는 엄밀한 과학성이 담겨 있다
식물들이 마구 뒤섞여 있어 보이지만 나름의 질서가 있다.
양지 식물 아래에는 음지식물이 있다.
소나무 주변에는 소나무의 송진(resin) 때문에 다른 식물이 자라기 힘들다.
그래서 약초를 찾을 때는 소나무 군락지를 피해야 하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양지 식물들은 저마다 생명의 근원인 햇빛을 채가고자 보나
조록싸리처럼 많은 잎사귀를 내보이든가 후박나무처럼 잎 면적을 크게 한다.
잎사귀만 해도 큰 것, 작은 것, 둥근 것, 길쭉한 것,
끝이 뾰쪽한 것, 줄기도 가느다란 것, 굵은 것 등등 헤아릴 수 없다.
식물들이 경쟁 속의 공존을 위한 지혜인 것이다.
놀라운 것은 열매의 색깔, 크기가 서로 다르더라도 대부분 동그랗다는 것이다.
기하학적으로 구형에는 최소의 면적으로 최대의 것을 담을 수 있는 형태이다.
식물들은 배우지 않았어도 자연질서 속에서 생존에 가장 적합한 원리를 구현하고 있는 것이다.
식물의 생존전략
식물들은 제각기 있어야 할 자리에 터 잡고 있다.
습지를 좋아하는 천궁은 물가에서 나고 음지를 좋아하는 족두리풀과 천남성은 그늘 밑에 자리 잡고 있다.
산행하다 이들을 찾으려면 허리 숙여 자세히 보아야 눈에 띈다.
바위말발도리는 다른 식물이 자리잡기 힘든 바위에 뿌리내리고 있다.
다른 식물들은 엄두를 못 내고 있는 곳에서 자기 터를 마련한 것이다.
꽃이 큰 것은 개수가 적고, 작은 것은 개수가 많다.
꽃이 크다는 것은 그 꽃을 유지할 정도로 줄기의 탄성력이 있다는 것이다.
뿌리에서 수분과 영양분을 빨아들이는 힘이 크다는 것이다.
제 자리에 고정되어 있는 것 같지만 잎사귀도 뿌리도 절대 정지되어 있지 않다. 뿌리는 물과 영양분을 찾아 어둡고 딱딱한 땅속을 더듬어 파고든다. 잎사귀 또한 광합성을 위해 햇빛 찾아 방향을 잘 잡으려 애쓴다. 낮이면 광합성을 위해 잎사귀에서 이산화탄소를 받아들이고 산소를 내뿜어 낸다.
식물의 키가 크고 작고, 줄기가 두껍거나 얇거나 형태는 다를지라도 모두 땅에 뿌리 받고 하늘을 떠 받기에 최적화된 생존전략인 것이다.
키가 크기 위해서는 줄기가 두꺼워진다. 식물에 가해지는 중력을 감당하기 위해서이다.
줄기가 가늘다면 탄성력이 충분해야 할 것이다. 잘 바람을 타면서도 꺾이지 않기 위해서이다.
쓰러지지 않기 위해 줄기는 적당한 견고성과 탄성을 갖고 있다.
뿌리로부터 상층부의 잎사귀까지 영양분이 전달되기 위해 중력을 거슬러 올라가야만 한다. 쉼 없이 아래에서 윗방향으로 영양분과 수분을 운반해주는 것이다. 가지는 수많은 나뭇잎을 매달고 있을 정도의 견고성이 있어야 한다. 따라서 식물 크기에 따른 뿌리의 깊이와 뻗침의 정도, 줄기의 길이와 두께 그리고 견고성과 탄력성의 정도가 최적화되어 있는 것이다. 식물의 형태에는 물리학과 화학적, 생물학적 원리로 최적화되어 있는 것이다.
모든 식물이 따뜻한 곳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햇빛이 잘 들지 않는 곳에 자리 잡은 족두리풀, 천남성도 있으며, 물가의 습지를 좋아하는 궁궁이도 있다.
무덤가에 자리 잡은 할미꽃, 사람 발길에 밟히는 길가의 질경이, 바람 많은 산등성에 잘 자라는 쥐오줌풀이 있다. 뿌리를 깊이 내리는 칡도 있지만, 물 위에 떠있는 수련도 있다.
하늘의 뜻과 땅의 법칙에 따르는 것이 식물의 생존 지혜이다. 거기에는 화려했던 꽃이 시드는 것도, 탐스런 열매를 가지에서 떠나보내는 것도, 훗날 뿌리의 힘이 다하는 날 땅으로 돌아가는 것도 말이다.
하늘의 변화는 식물에게 나타난다
인간은 영양분 섭취를 몸의 윗부분에서 입에서 취한다. 식물은 아랫 부위인 뿌리에서 취한다.
인간은 노폐물을 아랫 부위인 항문과 요도로 배출한다. 식물은 윗부위인 잎에서 배출한다.
줄기는 하늘을 향해 뻗어 올라가지만, 뿌리는 땅속을 향해 내려간다.
식물도 생존하기 위해서 윗방향으로도 자라고 아랫방향으로도 자라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생명활동을 위해 생체 밖에서 물질을 받아들이고, 체외로 배설하는 것은 인간이나 동물이나 식물이나 같다.
식물은 뿌리로 수분과 영양물질을 받아들이고, 잎사귀로 햇빛, 이산화탄소를 받아
광합성(光合成 , photosynthesis)을 해서 포도당(탄수화물)을 만들어 낸다. 이때 발생하는 산소를 배출한다.
따스한 봄이 오면 식물의 가지에 움이트고 꽃이 핀다. 뜨거운 여름이 오면 가지마다 잎들이 무성하다. 서늘한 가을이 되면 꽃은 지고 열매가 맺어진다. 추운 겨울이 되면 잎들은 떨어지고 가지만 남긴 채 내년 봄을 기다린다.
계절에 따라 식물들은 꽃이 피고 진다. 시간 간격을 두고 피고 지는 것이 마치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는 것과 같다. 이 식물에서 잎이 돋은 며칠 후 그 옆 식물에서 잎이 돋았다. 나무마다 잎이 처음 돋았을 때 건반을 두드린다면 자연의 교향곡이 되지 않을까?
식물에게도 다양한 개성이 있다
같은 산속에서 같은 햇빛을 받으며 자라지만 식물마다 꽃, 열매 등 형태가 제각기 다르다.
잎이 넓은 활엽수가 있는가 하면, 잎이 뾰쪽한 침엽수가 있다. 꽃의 색깔이 노란색이 있는가 하면 빨간색도 있다.
꽃도 봄에 피는 것이 있는가 하면 겨울에 피는 꽃도 있다. 열매도 맛이 단 것(예: 산딸나무)이 있는가 하면 신 것(예: 모과)도 있다. 모양도 색깔도 향도 다르지만 한데 섞여 잘도 자란다.
꽃 색깔도 다양하다. 하늘에서 내리는 똑같은 빗물을 빨아들이지만 짚신나물 같이 꽃이 노란색도 있고 접시꽃 같은 붉은색, 초오 같은 보라색도 있으며 구릿대 같은 흰색도 있다. 맨 꼭대기에 피는 초오도 있지만, 족두리풀은 땅 가까이에서 핀다.
열매 또한 개성이 있다. 산수유 같은 붉은색도 있지만 보라색의 야광나무도 있다. 대부분의 열매는 부드럽지만 도토리같이 딱딱한 껍질에 싸인 것도 있다. 뿌리가 있다는 것은 한 자리에 고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동을 못하는 생명체도 살아가는 방식이 있다. 생명활동을 위해 영양 흡수, 대사, 배설 작용이 식물 체내에서 모두 이루어질 수 있도록 기관, 조직, 세포가 갖춰져 있다.
식물은 겉보기와 달리 의외의 모습들도 있다.
땅 위 줄기는 가늘어 보이지만 땅속뿌리는 깊게 들어가 동그란 모양을 한 현호색이 있다. 세신의 뿌리는 가늘지만 몸속에 들어가면 열을 내게 해서 감기약이나 비염약을 요긴하게 쓰인다. 초오는 아름다운 꽃으로 뭇사람들을 끌어당기지만 독성이 강하다. 조선시대에 사약으로 쓰이기도 했다.
식물도 때에 맞춰 변신한다
움이 트고 싹이 트는 것, 아름다운 꽃이 피는 것, 탐스런 열매 맺는 것, 형형색색의 단풍 드는 것 모두가 때에 따른 변신인 것이다. 하지만 식물 독자적인 것이 아니라 외부조건에 대응되는 변화인 것이다.
계절은 봄, 여름, 가을, 겨울로 순환한다. 계절 변화는 햇빛량의 변화이다. 햇빛량의 변화는 지구의 자전축이 23.5도로 기울어진 상태로 도는(공전) 구조적인 형태에 기인한 것이다.
영양분 흡수는 물의 도움이 결정적이다. 땅속 영양물질이 뿌리를 통해 체내로 들어올 수 있는 이유는 물에 녹아 운반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영양물질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가? 근처 식물들의 잔해에서 나온 것,
땅 자체에 담겨 있는 것 등, 다른 생명체의 성분 등이 식물 체내로 들어와 생존하게 하는 것이다.
열매는 땅에 떨어져 이름 모를 산 새들과 다람쥐들의 먹이가 된다. 그들 몸속으로 들어가 뛰어다닐 영양분이 된다. 결국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식물의 생존은 이전 생명체 덕분인 것이다. 앞 선 생명체가 뒤이은 생명체를 살리는 생명의 순환인 것이다. 식물이 아름다운 자태를 뽐낼 수 있는 것이나, 후손 번식이 가능하도록 아름다운 꽃과 열매가 맺히는 것은 식물 자체의 힘만도 외부환경 요인만도 아니다. 햇빛, 물, 땅의 주어진 생존환경에서 식물 개체가 얼마나 잘 적응하느냐에 달린 것이다.
식물과 인간
식물은 그 자체의 의미도 있지만 인간과의 관계 속에서의 의미도 있다.
고구마, 감자는 현대에는 반찬이나 간식거리이지만 조선시대, 일제강점기, 근대사회에서 가뭄이나 춘궁기에는 주식 대신 구황작물로 중요한 기여를 했다. 싸리나무는 화력도 좋지만 탈 때 연기가 나지도 않는 데다 소리도 나지 않아서 빨치산들이 산속에서 불을 지필 때 주로 사용하였다. 군경이 빨치산이나 동조자를 잡을 때 이 명감나무를 많이 사가는 사람을 주의 깊게 살핀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산을 찾는 등산객에겐 아름다움으로 눈을 즐겁게 하고, 사진작가에겐 훌륭한 피사체가 되어 전시장 작품으로 내걸릴 것이다. 식물 몸체에 있는 유용한 성분 중 어떤 것은 사람 몸속에 들어가 요긴하게 치료하기도 한다.
이른바 약초의 약리성분이다. 예를 들면 인삼의 진세노사이드는 식물 속에 있을 때는 구성성분으로 머물러 있을 따름이지만 사람 몸속으로 들어가면 혈관 확장을 통해 혈액순환을 촉진시켜 몸을 따뜻하게 하고 면역력을 높여준다.
꽃의 색깔, 향기와 가지각색의 모습, 각기 다른 잎사귀의 형태, 열매의 색깔과 형태, 자연의 살아있는 미술관이다.
인간에게 주는 행복한 선물이다. 겉모습 또한 그 자체로 예술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