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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들국화 Sep 29. 2024

이슬 맺힌 술잔

1. 나

그 미소는 이상하리만큼 고색창연해 보였다. 단순히 나이를 먹은 인간의 시간과 깊이가 아니었다. 모든 것을 감싸 낼 수 있을 것 같은 아니, 분명하게 감쌀 수 있는 그런 미소였다. 그 모습을 보고선 배 중간으로부터 그리고 양쪽 귀로부터 찌릿한 기분이 들었고 그 끝은 눈과 연결되어 있었는데 나도 모르게 따뜻한 눈물이 두 번 흘렀다. 정말 따뜻한 눈물이었다. 내 얼굴의 근육들은 조용했다. 단지 두 줄기의 눈물이 한 번 스르르 미끄러지듯이 흘렀다. 다 흐르고 나서야 아차 싶은 마음으로 안주방으로 향하였고 눈물을 수돗물로 가린 채 애먼 국자를 휙 저었다. 


수돗물에 가려진 눈물이 진정되었을 즈음 가게 주인이 다가왔다.  

“주방 정리 먼저 할까?” 

나는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  


가게 주인도 그 후 묵묵히 정리를 시작하였다. 현재 상황에 대한 어색함이 느껴지긴 했지만 불편하지는 않았다. 우리는 그렇게 한 동안 말없이 가장 익숙한 행동들을 이어 나갔다. 문득 오늘은 왠지 모르게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직감했다. 말로 형용할 수 없지만 무언가 타분한 느낌이 들었다. 중요한 사실을 잊은 듯이 말이다. 그런 생각을 이어 갈 틈도 없이 가게 정리는 끝이 났다. 그 후로 우리는 너무나도 익숙하고 편안한 곳으로 향했다. 그곳은 가게에서 300미터 안에 위치해 있으며 가게 문 밖으로 나와 우측으로 가다 보면 왼편에 있었다. 퓨전음식과 국적을 가리지 않는 주류들이 셀 수 없을 만큼 준비되어 있는 그런 공간이다. 우리가 항상 주문을 하는 메뉴는 ‘스페셜 양지수육’인데 사실 크게 특별한 것은 없다. 잘 삶은 양지수육과 아주 조금 특별한 소스들이 함께 나온다. ‘특제 간장소스’, ‘깻잎 치미추리’, ‘레몬 고추장소스’ 이렇게 세 가지가 나온다. 간장소스 같은 경우에는 주인장이 직접 끓인 간장에 첨가물이 들어간 것이며 치미추리는 말 그대로 이태리 파슬리 대신에 깻잎과 액젓을 넣었다. 고추장소스는... 그냥 넘어가도록 하겠다. 하지만 우리는 그중에서도 소금을 살짝 찍어 먹는 것을 좋아한다.(기본 구성에 포함되어 있진 않지만 알아서 내어 주신다.) 계절에 따른 나물이나 야채들을 함께 데쳐서 주곤 하신다. 오늘은 냉이가 함께 나왔다. 가게의 조명은 오직 전구색으로만 이루어져 있다. 그래서인지 365일 내내 따뜻한 느낌을 준다. 


음식이 나오기 전 시원한 소주를 두 잔 따른다. 술의 차가운 온도로 인해 소주잔의 표면에는 금방 이슬이 맺혔다. 가게 안에는 들국화의 ‘그것 만이 내 세상’이 흘러나온다. 


가게 주인이 소주잔을 들며. 

“한잔하지.” 

우리는 오랜 시간을 말없이 술잔을 기울였다. 오래된 레코드에서 흘러나오는 오래된 노래들, 그 노랫소리와 섞인 사람들의 술기운이 섞인 대화, 가게 고유의 냄새를 느끼던 도중 침묵이 깨졌다. (그리 좋은 냄새는 아니지만 왠지 그리운 냄새가 있다.)  

“내가 자식이 없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또 이런 이야기가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자네 같은 자식이 있었다면 삶이 더 풍요롭진 않았을까? 이런 재밌는 상상을 하기도 해.” 

“오늘따라 많이 감성적 이 시네요. 기분이 나쁘진 않습니다.” 하며 좋은 웃음을 지었다. 

“세상이 너무 빠르게 변해. 항상 그래왔지만 서도 말이야. 도저히 따라잡을 구석이 보이지 않는 달까? 여유로이 세월을 흘려보내고 싶은데 말이지. 하지만 자네를 보고 있자면 왠지 모르게 마음이 놓이네. 차분하게 말하는 것도 참 좋고 말이야. 노인네와 시간을 보내는 것도 취향을 공유하는 것도 아주 즐겁지.” 

“할머니 품에서 자라서 그런 것 같습니다. 학교에 입학하기 전 까지는 흙길에서 동생과 뛰어놀았어요. 할머니 손을 잡고 40분은 걸어 나가야 과자 한 봉지를 사 먹을 수 있었죠.” 

“그랬군. 내가 괜히 마음이 놓인 것이 아니었어. 그래서 할머니는 어떠신가?” 

“3년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정말 좋은 분 이셨어요. 저의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분이셨습니다.” 

“미안하게 됐군. 혹시 이야기를 좀 더 들려줄 수 있나?”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 누군가에게 깊게 얘기를 꺼내 본 기억이 없다. 딱히 대상도 없었을뿐더러 내 속을 들키고 싶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은 쏟아지는 그리움을 막을 방도가 없기에… 아니다. 나는 굳게 닫았던 입을 스스로 열어 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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