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을 지배한 공자의 죽음

소현세자빈 강씨와 허난설헌 공자의 심장에 비수를 꽃다

by 희망사회연구소


조선은 분명히 남성중심의 사회다. 여성은 아이를 낳고 남성 즉 남편을 조력하는 역할에 국한됐다. 그래서 미망인과 노처녀는 사실상 설 곳이 없는 사회였다. 그렇지만 조선의 정치 사회 흐름의 변곡점에는 항상 여성이 있다.

조선 전기 태조, 정종, 태종, 세종, 문종, 단종, 세조, 예종, 성종까지 이어지는 조선 중흥 전성기를 마감한 연산군의 광끼 이면에는 성종의 조강지처이자 연산군의 어머니인 폐비 윤씨의 그림자가 어려 있고 조선 당쟁사의 시초이자 사화의 비극 이면에도 중종의 두번째 조강지처인 장명왕후와 세번째 조강지처인 문정왕후가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나쁜 역할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현대에 역사가 많이 왜곡된 감이 있지만 사실상 조선이 중세를 탈피해 근대사회로 나아가려는 시작과 마침내 '조선'을 넘어 '대한'의 문을 연 것에도 명성황후의 후광이 있었다.

그리고 조선 백성들에게 남존여비의 유교 성리학적 가치관에 의문을 제기하고 마침내 그 길에서 벗어난 이면에는 두 여성(소현세자빈 강씨와 조선 최고의 여류 작가 허초희(난설헌))의 피흘림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소현세자의 아내인 세자빈 강씨의 피는 백성들로 하여금 사대부와 유교적 가르침에 반기를 들도록 했다면 사가의 여인이었던 허난설헌의 죽음은 예수의 도가 이 땅 백성들 에게 심겨지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먼저 이 땅에 피를 뿌린 여성은 허난설헌이다.
허난설헌은 서양 르네상스 시대 레오나르도 다빈치나 볼 프강 아마데우스 모짜르트처럼 혹은 중국의 두보처럼 천 재적인 두뇌와 감각을 타고난 여인이다. 그러나 조선중기 였던 당시 양반 사회에서 여성에게 살림 기술과 자녀의 훈 육을 위한 기본소양 이상의 역량은 전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허난설헌도 당시 사대부 여성이 그러하듯 부모가 일방적 으로 맺어준 남자를 남편으로 맞이하고 평범한 사대부 여성의 삶을 살았다.
그녀는 시집에서 정숙한 아내와 며느리의 삶을 살았다. 조선시대 사대부 여성의 정숙한 삶이란 안방에서 보내는 시간이 거의 대부분이었다.
이 때 허난설헌은 다른 사람들처럼 자수, 시, 독서 등으로 소일을 했는데 그 수준이 다른 사람보다 월등했고 그래서 주변에 명성이 높아져 갔다. 여기서 그녀의 남편이 문제가 됐다. 허난설헌의 남편은 한량이었다. 학식도 그리 뛰어나 지 않았고 시와그림 등에도 조예가 없었다. 인품도 밴댕이 소갈딱지라는 말이 딱 어울릴 정도다.
그는 자신의 역량과 명성을 아득히 뛰어넘은 아내에게 심각한 열등감과 자격지심을 느꼈고 그 것이 아내를 향한 구박으로 나타났다. 기록에 따르면 그 수준이 아주 과도하다. 그래서 허난설헌은 남편과 시댁의 폭력적인 멸시와 구박속에 하루하루 죽어가다가 마침내 20대 꽃다운 나이에 죽음을 맞이했다.
그런데 허난설헌에게는 남동생이 한 명 있었다. 그가 바로 허균이다. 허균은 누나 허난설헌을 존경하고 그 재능을 인 정했다. 당연히 사이가 아주 좋았다.
허균은 누이의 시집살이와 죽음을 지켜보면서 울분을 가 졌다. 그러나 성리학적 윤리관에 따르면 허난설헌의 죽음 에 남편은 아무런 잘못이 없다 그래서 허균에게 누이의 억 울하고 어이없는 죽음에 대한 안타까움과 분노는 결국 성 리학적 윤리관과 세계관에 대한 의구심으로 발전했고 결 국 천학(天學) 이라는 이름으로 천주학 사상 즉 예수주의 를 들여와 유교의 심장에 칼을 꽂았다.
허난설헌의 억울한 죽음이 대한국민의 조상인 조선백성 들을 지배하고 있는 공자의 사망의 시발점이 됐다.

세자빈 강씨는 실제 현존했던 전설적인 인물이다. 그녀는 병자호란의 결과로 인조 대신 청나라로 끌려간 인조의 큰아들 소현세자의 조강지처다. 그녀는 속칭 '환향녀'를 만들어 낸 장본인이다.
본래 청은 소현세자 부부를 조선의 차기 왕으로써 우대하 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소현세자를 친 청 인사로 만 들어 인조 사후 더욱 관계를 공고히 하려는 것이다. 그래서 처음에는 마치 작은 궁궐같은 의리의리한 저택과 조선의 왕자로서의 품위를 유지할 수 있는 재물도 제공했 다. 그러나 이듬해 청에 극심한 기근이 들었고 명나라와 최후의 일전을 벌일 시간이 다가오면서 청나라도 전쟁준 비에 빠듯한 처지가 됐다. 그리고 조선에서는 아직도 명을 도와 청의 후위를 처야 한다는 여론이 상당했고 이것이 청 의 심기를 자극했다. 이에 청 조정은 소현세자에게 제공되 던 생활비와 품위 유지비 지원을 멈췄다.
이에 소현세자 집안의 모든 살림을 총책임 지었던 세자빈 강씨는 청으로부터 받은 땅에 스스로 농사를 짓고 부족한 것은 장사를 하기로 마음먹고 일을 할 노예들을 구매하기 위해 노예시장에 들린다. 이곳에서 강씨는 강간ㆍ윤간 당하며 팔려나가는 조선 여성포로들과 개 돼지보다 못하게 부려지는 이들을 보고 충격을 받는다. 그래서 일단 자신의 패물로 포로들을 닥치는대로 구매하여 데리고 온다. 그리고 이들과 함께 쌀, 담배, 대마 등을 재배해 자신들이 소비할 식량 이외의 생산물 전부를 청 조정에 납품해서 만대한 이익을 얻는다. 그리고 그 이익금으로 조선인 노예를 계속 사들이고 먼저 샀던 노예는 속량한 후 조선으로 돌려보내기를 반복한다. 또 강씨의 남편 소현세자는 이 이익금 중 일부를 사묭해 청의 고위 관료와 친분을 맺고 적극적인 로비활동을 하면서 조선의 이익을 대변한다. 사실상 우리민족 최초의 현대식 외교관 역할을 한 것이다.
환향녀는 병자호란의 결과로 청에 노예로 끌려간 조선인 포로들 중 다시 조선으로 돌아온 여성들을 말한다. 그런데 우리들에게 장하고 명예로운 이름으로 인식되야 하지만 당시 송시열을 필두로 하는 사대부들은 이 단어를'화냥년' 이라는 아주 불명예스롭고 모욕적인 의미를 붙였고 이 의 미가 지금까지 내려오고있다.환향녀가 화냥년으로불리게 된데에는 당시 사대부 서인들의 이기적이고 나쁜 의도가 있었고 그 의도가 백성들의 공자주의 이탈을 가속화시켰 는데 이는 추후에 다룬다.
아무튼 소현세자 부부로 인해 조선으로 귀환한 환향남, 환향녀들로 인해 소현세자의 명성은 높아졌다.
그러나 이같은 명성은 인조의 열등감을 자극했는데 이로 인해 인조는 자신의 아들 소현세자를 독살하고 세자빈 강씨를 역모(인조 독살 미수)로 몰아 가문 자체를 몰살시켰다.
소현세자 부부의 사망 이후 백성들은 공자님 말씀을 앞세 운 조정과 사대부들의 통치와 지도에 적극적으로 반항하 기 시작했다. 검계와 살주계 등이 창궐하고 전국적으로 지방수령들이 쫒겨나기를 반복했다.
당시 공자님 말씀을 대체할 사상이 민요, 마당놀이 등으로 널니 퍼져나가고 있었는데 그 것이 바로 허균이 설파한 천학이다.
한편 소현세자는 귀환하기 전 예수회 선교사를 만나 천주 학을 배우고 천주교에 귀의했다. 이때 소현세자의 호위무 사인 묵암 이경상도 소현세자와 함께 천주교와 서학을 접 하고 관련 서적과 자료들을 선물받았다. 이경상은 소현세 자 부부가 억울하게 죽은 후 고향집으로 내려갔는데 이 집안에서 실학과 최초의 예수교가 탄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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