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페롤 스프리츠, 해산물 요리, 카리칸테 와인
전날 빡빡했던 일정 탓에 아침에 일찍 일어나기가 쉽지 않았지만 골프일정 때문에 일찍 호텔을 나섰다. 10시에 도착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기사가 길을 못 찾아 헤매는 바람에 30분 정도 늦게 도착했다. 다행히 손님이 많지 않아 라운딩에는 문제가 없었다. 원래 골프는 시아카Sciacca의 베두라 Vedura 리조트에서만 하기로 되어 있었다. 오늘 라운딩할 피치올로Picciolo골프클럽은 활화산인 에트나산의 용암석 위에 경사면을 따라 중턱에 조성된 골프장이라 호기심에 일정에 넣었다. 특별한 경관을 기대했으나 군데 군데 드러나 있는 용암석을 제외하고는 여느 골프코스랑 별 다른게 없었다. 코스관리 상태도 썩 좋은 편은 아니었고 복잡하고 불친절한 코스 레이아웃, 그리고 안내표지가 거의 없어 다음 홀을 찾기가 가끔 어려워 애를 먹었다.
라운딩을 끝낸 뒤 점심식사는 클럽하우스에서 간단히 하고 호텔로 돌아온 뒤 자유시간을 가졌다. 우리 부부는 샤워를 하고 호텔 주변을 둘러 보기 위해 밖으로 나왔는데 함께 산책하고 있는 최사장님 부부와 마주쳤다.
“이 사람들 이렇게 좋은 곳에 묵으면서 낮잠을 자네.”
아마 박사장님과 전사장님 부부는 낮잠을 자는가 보다. 어제 꽉찬 일정을 소화하느라 힘들었는데 오늘도 오전부터 골프 라운딩 하는라 모두들 많이 피곤했을 터라 이해가 간다. 우리 방만 다른 층에 떨어져 있고 세 부부방은 옆에 붙어있다. 아니게 아니라 이 호텔은 면적이 엄청 넓은데 전체가 정원이다. 정원과 스파, 풀장, 스포츠 센터 등 부대시설도 객실처럼 경사면에 계단식으로 지어져 있는데 위에서 내려다 보면 한눈에 들어 온다. 호텔 주변을 모두 들러 본 우리 부부도 방에 들어와 짧은 휴식을 취했다. 5시경에 타오르미나 시내구경을 가자고 박사장님이 단톡 방에 글을 올렸기 때문이다.
로비에서 모여 정문을 나와 밑으로 조금 내려갔더니 왼쪽으로 길게 난 중앙거리가 펼쳐진다. 레스토랑과 쇼핑점이 즐비하다. 우리가 묵은 호텔은 걸어서 돌아다니기에는 최고의 위치였다. 제법 넓은 길에 사람들로 붐볐지만 차가 다니지 않아 불편하지 않았다. 멀리 반대편 끝에 있는 광장까지 이어져 쇼핑점과 레스토랑이 빼곡한 거리 주위를 구경하며 걷는 것이 즐겁다. 레스토랑 앞에 세워 둔 메뉴를 보면 어느 하나 지나치고 싶은 곳이 없다. 피자와 파스타는 물론이고 특히 풍부한 지중해의 다양한 재료로 만든 해산물 요리는 근사해 보였다. 당장 들어가서 식사를 하고 픈 유혹을 뿌리치기 힘들었다. 큰 길 중간 중간은 골목길이 나 있는데 골목의 양쪽 벽에는 진분홍의 부겐빌레아Bougainvillea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계단으로 된 골목길에는 참이 있는 층마다 레스토랑이나 기념품을 걸어 놓은 갤러리 같은 상점이 있었다. 타오르미나 시내 구경이 이번 여행 중 첫번째 일정이라 이곳의 화려한 거리와 아기자기한 골목길 모습이 시칠리아의 전형적인 풍경이라 생각했는데 일정이 끝날 때까지 이처럼 세련되고 아름다운 모습은 다시 보지 못했다.
얼마 걷지 않았는데 벌써 티셔츠가 땀에 흠뻑 젖었다. 9월인데도 시칠리아의 한낮 기온은 30도 이상이었다. 앞서가던 박사장님이 쉬었다 가자고 한다.
“여기에서 잠시 쉴까요?”
나는 바로 앞에 있는 가까운 가게를 가리켰다. 자리를 잡고 앉아 아페롤 스프리츠Aperol Spritz를 시켰다. 아페롤 스프리츠는 탄산수에 얼음과 오렌지를 원료로 하는 리큐어인 아페롤을 넣은 칵테일이다. 유럽에서 가장 인기있는 칵테일인데 여름에 어디를 가나 흔히 마시는 것을 볼 수 있다. 오렌지 산지로 유명한 시칠리아에는 특히 더 그렇다. 상큼한 오렌지향은 더위에 지쳤던 몸을 다시 깨워주었다. 우리는 다시 큰 길을 따라 걸었다.
거리 끝에 다다르니 광장 아래로 확 트인 지중해가 펼쳐진다. 관광객의 눈에는 그저 아름다운 풍경으로 보일테지만 굳이 이 높은 곳에 살아야 했던 고대인에게는 얼마나 고단한 일상이었을까. 고기를 잡아서 생계를 유지했던 고대 타오르미나 사람들은 울퉁불퉁하고 좁을 길을 힘들게 올라 마을에 이르렀을 것이다. 이런 불편을 감수하고 가파른 산자락에 마을을 건설한 것은 적이 침입하기가 용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원전 4 세기초 시라쿠사가 침공하자 바닷가에 살고 있던 원주민들이 언덕 위로 도피해서 만든 도시가 타오르미나였다고 한다.
광장을 둘러 보고 호텔로 되돌아오는 길에 저녁식사를 하기로 했다. 무엇을 먹을지는 걸어가면서 식당들을 보고 정하기로 했다. 나는 레스토랑 앞에 놓여 있는 메뉴를 꼼꼼히 읽어 보고 메뉴가 괜찮으면 8명이 앉을 수 있는 좌석이 남아 있는지 일일이 확인했다. 그러다가 앞서 간 일행을 놓쳐버렸다. 한 레스토랑의 메뉴를 살피고 있는데 야외테이블에 앉은 손님들이 식사를 마치고 일어섰다. 급히 일행들에게 오라고 전화하니 이미 자리 잡아 앉았으니 나보고 오라고 한다. 도착하고 보니 주문을 마친 후였다. 모두 시장했던 모양이다. 오징어, 굴, 스켐피Scampi, 홍합 등 시칠리아 해산물 요리였다. 화이트와인 카리칸테Carricante를 소몰리에가 추천해서 주문했는데 어제 와이너리에서 테스팅한 에트나에서 재배한 품종이다. 타오르미나 시내를 지나오면서 본 길가에 펼쳐진 다른 레스토랑의 와인리스트에도 이 품종의 와인이 대부분이었다. 이곳 지중해에서 나는 해산물로 만든 요리와 와인의 풍미가 잘 어우러져 훌륭하다. 시칠리아의 레스토랑에서는 음식값이 대부분 비싸지 않다. 와인값도 마찬가지여서 참 좋다. 거기에다 노을진 타오르미나 풍경을 바라보며 먹는 저녁 식사는 황홀하다는 표현 말고는 딱히 적당한 어휘를 찾을 수 없다.
괴테가 오래전에 타오르미나 해질녘의 아름다움을 보고 남긴 기록이 있다. 1787년 5월 7일 이곳에 왔던 괴테는 그날의 타오르미나 노을을 보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해가 질 때까지 눈물을 흘릴 수 없었다. 모든 면에서 너무나 놀라운 이 풍경이 천천히 어둠 속으로 가라앉는 것을 보는 것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시칠리아 타오르미나의 하루가 저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