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의 상흔에 대한 서사와 이를 살리지 못한 연출
2024년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필자가 가장 놀랐던 수상은 <고질라 마이너스 원>의 시각효과상 수상이었다. 1000억원이 넘게 투입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들을 제치고 200억원이 투입된, 비영어권 국가의 괴수영화가 시각효과상을 받은 것은 굉장히 신기한 일이고 대단한 일이었다.
그렇지만 이 글은 <고질라 마이너스 원>의 시각효과에 대한 칭찬을 하는 것만이 목적은 아니다. 시각효과가 분명 중요하고 강점인 영화임은 맞지만, 이 영화의 시각효과에 대해서만 말하기보다는 이 영화의 장점과 단점을 서사와 연출에 집중해 말해보려고 한다.
<고질라 마이너스 원>의 시대적 배경은 새롭지는 않지만 신선한 느낌을 준다. 현재 할리우드에서 전개되고 있는 몬스터버스의 고질라 시리즈는 이제 동시대를 넘어 미래를 배경으로 삼고 있다. 하지만 <고질라 마이너스 원>은 고질라 시리즈 70주년작 답게 처음 고질라 영화가 탄생한 시대와 가까운 2차 세계 대전 직후 일본을 배경으로 다루고 있다. 현재 할리우드의 고질라처럼 인간의 편에 서서 지구를 위협하는 다른 괴수들과 싸우기만 하는 그러한 방식이 아니라, 전쟁 이후 생겨난 트라우마를 상징하는 존재로 고질라를 그려내고 있다. 1954년 영화 속의 고질라가 원자폭탄의 두려움 또는 그 당시 일본 정부의 주도 하에 시행되고 있던 원자력 발전과 이에 따른 피폭의 두려움을 상징하는 존재라면, 이번 <고질라 마이너스 원>의 고질라는 전쟁이 남기고 간 트라우마, 전쟁의 상흔을 상징한다. 특히 영화 초반부에 주인공 시키시마가 자신의 집 앞에서 이미 전쟁 중에 죽은 병사들과 과거 마주한 고질라가 함께 나타나는 꿈 장면을 통해 명확히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점을 미루어 보아 우리는 이 영화의 제목이 단순히 ‘고질라’가 아닌 <고질라 마이너스 원>인 이유가 1954년 작 <고질라>보다 더 이전으로 배경을 옮겨와 21세기에 이르러 너무나 다양해진 고질라를 오리지널로 회귀하면서 동시에 새 시대의 고질라를 그려내고 있기 때문이란 걸 유추할 수 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에서 파생된 주인공 시키시마의 설정도 상당히 흥미롭다. 전쟁 당시 가미카제로 징집되었지만 두려움에 도망쳐 도쿄로 살아 돌아온 시키시마는 대공습 때 폐허가 되어버린 집과 부모님의 사망 소식을 마주한다. 살아 돌아온 그에게 옆집에 살던 스미코는 가미카제가 왜 살아있냐면서 전체주의에 물든 시대를 상징하듯이 화를 낸다. 그러는 동시에 시키시마는 살기 위해 비행기 결함을 핑계로 도망쳤던 비행기지 섬에서 갑자기 나타난 고질라에게 죽음을 맞이한 병사들에 대한 죄책감과 트라우마에 시달린다. 하지만 시키시마 앞에 자신이 낳지도 않은, 전쟁 중에 부모를 잃은 아이를 홀몸으로 키우고 있는 노리코가 나타나고, 우연한 계기로 전쟁의 아픔을 겪은 세 사람이 함께 시키시마의 집에 살게 되면서 이들은 일종의 유사 가족을 이루게 된다. 시키시마는 두 사람과 함께 지내면서 자신의 눈앞에서 죽은 병사들에 대한 죄책감, 자신도 전쟁에서 죽었어야 한다는 트라우마에서 조금은 벗어나 다시 삶을 살아보겠다고 마음을 먹는다. 이 지점이 영화의 중반부이고 이후에 굉장히 강렬한 플롯 포인트가 등장한다. 고질라가 노리코의 회사가 있는 긴자에 등장하고, 건물을 부수고 시민을 밟아 죽인다. 시키시마는 노리코를 구하려 긴자에 가 함께 도망치지만, 고질라가 발사한 방사열선 폭발의 후폭풍으로 인해 노리코는 시키시마의 눈앞에서 흔적 하나 남기지 않고 사라진다. 시키시마는 방사열선으로 인한 버섯 형태의 구름과 그 앞에서 포효하는 고질라를 서서 바라만 본채 분노하고, 하늘에서는 낙진으로 인해 검은 비가 내리며 시키시마를 뒤덮는다. 이 장면은 단언컨대 이 영화에서 가장 훌륭한 장면이라고 말 할 수 있다. 2차 대전이 다시금 재현된 듯한 버섯구름과 트라우마와 상흔의 상징인 고질라, 그리고 그 앞에서 무력하게 서서 분노할 수 밖에 없는 남자. 그리고 그 남자의 감정을 이미지화하여 보여주는 낙진으로 인해 내리는 검은 비까지. 영상 이미지로서 이야기를 보여주는 지점이 탁월하고, 동시에 서사적으로도 이제 긍정적으로 살아 보겠다고 마음 먹은 주인공을 한순간에 절벽에서 밀어버리는 듯한 전개 역시도 이 영화에서 가장 강력한 에너지를 느끼게 한다.
내용 외적으로 바라봤을 때 이 씬에서 고질라의 묘사, VFX 또한 좋았다고 언급하고 싶다. 고질라의 고전 작품들에선 고질라의 움직임을 VFX로 전부 만든 것이 아니라, 사람 사이즈의 슈트를 제작하여 사람이 슈트를 직접 입고 미니어처 세트장에서 움직임을 취하는 방식으로 촬영된, 특수촬영물의 제작방식으로 만들어져왔다. 이 방식으로 촬영된 고질라의 움직임은 VFX로 전부 만들어지는 현대의 고질라의 움직임과는 다르게 움직임이 한정적이다. 하지만 그런 한정적인 동작에서 오는 긴장감과 무게감이 있는데 <고질라 마이너스 원>에서는 비록 VFX로 고질라의 움직임을 만들었지만 이러한 움직임의 느낌을 내려고 노력했고 그 부분이 좋은 선택이었다고 느껴진다. 하지만 이런 장점들에도 불구하고 이 이후부터 이 영화의 문제들이 시작된다.
후반부의 이야기는 전쟁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고질라란 새로 도래한 위협에 대항하기 위해 힘을 합쳐서 고질라를 죽일 방법을 찾아내 실현하는 전개로 흘러간다. 이 후반부의 전개는 인물들의 조국이 자신들을 전쟁으로 내몰아 상흔을 갖게 된 사람들이 절체절명의 위기 앞에서 다시 얻게 된 소중한 삶을 지켜내기 위해 본인들이 직접 본인들의 손으로 트라우마와 상흔을 이겨내겠다는 것을 보여주려 한 것이 감독의 의도일 것이다. 그렇기에 시키시마가 고질라와 맞서기 위해 타게 되는 전투기는 앞서 전쟁 당시 정부가 태웠던 비상 탈출 장치 없이 전투기와 함께 파일럿이 폭사할 수 밖에 없었던 것과 달리 비상 탈출 장치가 존재하는 전투기에 탑승시킨 것이 그 예이다. 그렇지만 <고질라 마이너스 원>의 후반부는 이러한 의도들이 잘 느껴지게 연출되지 않았다. 나아가 본래 의도를 해치는, 혹은 반하는 방식으로 연출되어 있다. 다시 말해 영화가 초반부터 가지고 오던 이데올로기를 퇴색시킨다.
이 영화의 후반부 전투 장면은 화려하게 연출 되어서는 안 됐다. 처절하고 절체절명의 위기처럼 보여야 했다. 하지만 시키시마의 전투기 장면들은 화려한 동작을 뽐내듯이 연출되고 있다. 다시 말해 과시적인 연출이다. 그리고 시키시마라는 인물은 분명 영화 초반에 설명 되는 설정으로는 급하게 훈련만 받고 실전에 투입된 전쟁 막바지의 가미카제 조종사였는데 후반부에 이르러 이렇게 화려한 전투기 조종을 보여주는 것이 괴리감이 있어 보인다. 아무리 이 인물이 긴자에서의 사건 이후 각성했다고 하더라도 전투기 조종에 있어서 서툴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화려하고 과시적으로 조종하는 게 이야기적으로도 납득이 되지 않는다.
또 하나의 큰 문제는 앞서 잠깐 언급한 이 절체절명의 위기 앞에서 다시 얻은 소중한 삶을 지켜내겠다는 일념 하나로 모인 사람들을 보여주는 방식이다. 후반부에서 그 인물들은 전쟁 이후 퇴역한 함장과 함께 전쟁 이후 무장해제 된 군함을 타고 고질라에 맞선다. 그런데 여기서 이 인물들을 일종의 유사 군대의 형태처럼 연출하고 만다. 그것의 정점을 찍는 장면이 바로 고질라를 처리한 이후 이 인물들이 단체로 군대식 경례를 하는 장면이다. 이 장면은 그야말로 이 영화가 이전에 잘 쌓아온 모든 것들을 무너트려 버리는, 최악의 장면이다. 이 장면만 보면 전쟁과 제국주의를 미화하는 프로파간다 영화로 보일 지경이다.
서사 부분에서도 영화는 끝내 결말부에서 까지 너무나도 안일한 연출을 택하고 만다. 긴자에서 고질라의 공격으로 죽은 줄 알았던 노리코가 사실은 살아 있었고, 고질라를 물리치고 살아 돌아온 시키시마와 재회한다. 중반부까지의 서사에서 제일 중요한 플롯 포인트였고, 영화 전체에서 제일 뛰어난 장면이었던 긴자에서의 씬을 의미 없게 만들어버리는 악수를 둠으로써 아쉬움을 자아낸다.
이렇게까지 후반부를 비판하는 이유는 이 영화가 중반부까지는 좋은 지점이 많았기 때문이다. 예컨대 중반부까지는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바람이 분다>의 느낌이 날 가능성을 가진 그런 영화였다. 두 영화 모두 가미카제라는 소재가 등장하고, 두 영화 모두 전쟁 속에서 망가져 버린 인물을 다룬다는 점에서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고질라 마이너스 원>과 달리 <바람이 분다>는 감독의 이데올로기가 영화 끝까지 명확히 보이는 영화이다. 저주받은 꿈을 가지고 이기적으로 꿈을 쫓았으나, 전쟁의 시대 속에서 모든 걸 잃어버리는 인물을 보여주며 결국 전쟁에 간접적으로 관여된 사람도 역시 비판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연출을 통해서도 잘 표현되고 있다. 그렇다면 <고질라 마이너스 원>을 보자. 영화의 중반부까지는 정부의 전쟁으로 인해 삶이 망가진 남자의 이야기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후반부의 연출로 인해 영화와 감독의 이데올로기가 모호해진다. 후반부에는 마치 중반부까지 잘 해오던 고심과 고뇌가 들어가 있지 않은 느낌이다. 오락영화로서 단순히 보여지는, 과시적인 것에만 신경을 써 이도 저도 아닌 태도를 가진 영화가 되어버렸다.
이처럼 <고질라 마이너스 원>은 전쟁의 상흔을 고질라라는 상징적 존재를 통해 탁월하게 형상화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후반부로 갈수록 과시적이고 그릇된 연출로 인해 초반에 보여주던 이데올로기를 잃어버리고 만다. <고질라 마이너스 원>은 분명 시각효과라는 기술적 성취를 넘어, 좋은 서사의 가능성을 지닌 영화였다. 그러나 그 가능성은 마치 고질라의 포효 속에 무너진 긴자처럼, 연출의 한계 속에서 무너지고 말았다. 이는 단지 하나의 영화에 대한 아쉬움이 아니라, 역사적 소재를 다루는 작품들이 연출에 대한 깊은 고민이 필요함을 시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