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외젠 들라크루아,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외젠 들라크루아(1798~1863)
18세기 중후반에서 19세기 중후반, 유럽 미술계에는 낭만주의 사조(思潮)가 넘실대고 있었다. 낭만주의는 질서보다 개성, 객관보다 주관, 합리보다 비합리, 타율보다 자율, 이성보다 감정, 사실보다 상상, 집단보다 개인을 우선시하는 문화적 흐름이다. 문학에서 기지개를 켠 후 미술과 음악 등 다른 예술 장르로 번져나갔다. 낭만주의 미술에서 문학의 체취가 많이 묻어나는 이유도 그래서다.
외젠 들라크루아는 바로 이 낭만주의 미술을 대표하는 프랑스 화가다. 발군(拔群)의 색채 구사와 자유분방하고 역동적인 붓질, 강력한 구도가 전매특허다. 역사적인 사건이나 당대의 이슈, 문학 작품과 음악 등 예술적 소재를 바탕으로 방대한 작품을 남겼다. 특히 들라크루아의 색채 묘사는 인상파 화가들에게 예술적 영감을 자극한 것으로 유명하다.
외젠 들라크루아,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캔버스에 유채, 260 x 325cm, 1830, 루브르박물관 소장. ⓒ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들라크루아는 18~19세기 혁명의 나라였던 프랑스 출신답게 당시 아카데미가 강조한 교훈적인 주제와 정확한 데생, 계획적이고 엄격하며 질서정연한 미술이론을 온몸으로 거부한 풍운아였다. 그는 정밀한 묘사 대신 색채에, 고리타분한 이론에 함몰된 미술 지식 대신 자유롭고 풍부한 상상력에 매료됐다. 상상력 배양에는 낯설고 이국적인 장면과의 만남이 제격인 법.
실제로 들라크루아는 34살 때인 1832년, 북아프리카 모로코로 떠나 그곳에서 수개월 동안 머무르며 낭만적인 삶과 문화에 탐닉했다. 원시적인 순수함이 자아내는 숭고함, 찬란하게 빛나는 태초 그대로의 태양에서 느껴지는 화려하고 감각적인 색채, 때 묻지 않은 현지인들의 생활상과 자연풍광 등은 그가 추구한 낭만주의 화풍의 내공을 다지는 활력소가 됐다.
레즈비언 등 파격적인 내용을 담은 시집 ‘악의 꽃’의 저자인 프랑스 시인 보들레르(1821~1867)가 전무후무한 천재 예술가로 칭송한 들라크루아는 19세기를 눈앞에 둔 1798년 프랑스 생모리스에서 외교관의 아들로 태어났다. 유복한 가정환경 속에서 유년기 때부터 문학과 철학 등 인문학적 소양을 키워나갔다. 16~17살 무렵 화가이자 귀족 신분이던 피에르 나르시스 게랭의 제자로 들어갔다. 18세 때 국립미술학교인 에콜 드 보자르에 입학했다. 들라크루아는 서로 다른 장르의 예술가 간의 사교 모임이 활발하던 때라 소설가와 시인, 음악가들과도 끈끈한 우정을 주고받았다. 이들과의 만남은 후일 들라크루아의 작품세계를 빛내는 자양분 역할을 했다.
1824년, 20대 중반의 들라크루아는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지배를 받던 그리스인들이 무참하게 도륙된 사건을 다룬 작품 ‘키오스섬의 학살’을 파리 살롱 전시에서 선보였다. 정복자의 잔인성을 고발한 역사화인 이 그림을 통해 들라크루아는 천재성을 입증하며 일약 낭만주의의 기린아로 부상했다.
들라크루아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은 이로부터 6년 뒤에 등장한다. 이 그림은 1830년 7월 프랑스 국왕 샤를 10세의 기본권 제한 칙령에 반발해 일어난 시민혁명인 7월 혁명을 기념해 제작한 것이다. 샤를 10세가 축출되고 루이 필리프가 새로운 왕위에 오르게 된 7월 혁명의 전선에 직접 가담하지 못한 들라크루아가 그림을 통해서라도 조국을 위해 헌신하겠다는 다짐 끝에 나온 예술적 산물이다.
들라크루아는 루이 필리프의 재위 기간(1830~1848) 동안 정부 주도의 대형 장식벽화 제작을 도맡는 등 출세 가도를 달렸으나 지나치게 몸을 혹사한 나머지 건강이 나빠졌다. 설상가상 친형과 친구, 친척 등이 줄줄이 세상을 떠나는 아픔을 겪어 말년이 쓸쓸했다.
1863년 8월 파리에 있는 자신의 아파트에서 숨을 거둔 들라크루아는 9천여 점에 이르는 어마어마한 작품과 40년 넘게 작성해온 일기와 편지를 남겼다. 들라크루아의 아파트는 1971년 국립박물관으로 재탄생했다.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프랑스대혁명(1789년)이 발발한 지 41년이 지난 1830년 7월, 프랑스에는 또 한 차례 거센 민중들의 봉기가 일어났다. 국왕 샤를 10세가 귀족들의 권한을 보장하고 구체제(앙샹 레짐)로의 복귀를 위해 의회를 해산하고 언론출판의 자유를 제한하는 전제적인 칙령을 선포하자 부르주아 시민이 중심이 되어 대대적인 혁명을 일어났다.
1830년 7월 27일에 시작된 성난 군중들의 봉기 앞에서 국왕은 3일 만에 꼬리를 내리고 말았다. 왕정복고로의 회귀 시도를 무산시킨 7월 혁명 이틀째, 자유를 향해 파리 시내를 거침없이 돌진하는 시민군의 모습을 묘사한 그림이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이다.
1874년부터 루브르박물관에 소장 중인 이 그림은 구도에서부터 민중혁명을 그린 것임을 시사한다. 오른손으로 힘차게 깃발을 펼쳐 든 가운데 여성을 정점으로 좌우에 시민군이 배치된 전형적인 삼각형 구도다. 어떤 외풍에도 흔들리지 않을 것 같은 탄탄하고 안정적인 분위기가 충만한 것도 이 때문이다. 질풍노도와도 같은 혁명의 기세는 이 그림의 주인공인 중앙의 여성에게 압축돼 있다.
여성이 치켜든 깃발은 프랑스 혁명 정신인 자유 • 평등 • 박애를 상징하는 프랑스 국기(國旗), 삼색기다. 1794년에 프랑스의 국기로 제정된 이후 자유를 갈망하는 유럽 각국으로 퍼져나갔다. 이번에는 여성의 상체. 윗옷 자락이 흘러내려 가슴이 훤히 다 드러나 있고 겨드랑이의 체모도 또렷이 보인다. 맨발인데다 다른 등장인물에 비해 훨씬 크고 밝게 그려졌다. 왼손에 들고 있는 장총 총구에는 총검이 장착돼 있는데, 그 기세가 하늘을 찌를듯하다. 머리에 쓴 모자도 혁명을 암시하는 프리지안 캡(리버티 캡)이다. 기필코 혁명을 성공시키고야 말겠다는 결연한 투사의 의지다.
작품 제목인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의 실체를 이보다 더 잘 표현할 수 있을까. 그러므로 이 여성, 마리안느는 프랑스 혁명의 상징이자 저항정신, 즉 자유의 상징이다.
그림 오른쪽 가운데에 보이는 화염에 휩싸인 도시 풍경과 그 맨 아래 혁명의 이름으로 처형당한 2명의 정부군 모습도 민중봉기의 열기를 실감케 한다.
여성의 오른쪽에서 양손에 권총을 들고 고함을 지르는 소년과 왼쪽 끝에서 칼을 들고 뛰쳐나오는 노동자, 뒤에서 앞으로 돌격 중인 한 무리의 성난 군중들…….
왼쪽에 정장 차림으로 긴 총을 들고 있는 남자는 들라크루아 본인이라는 설도 있다. 캔버스에 유채 그림으로 세로 260cm, 가로 325c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