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신의 아이콘, 세기의 화가들 Ⅲ

22. 페르메이르,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by 박인권

요하네스 페르메이르(1632-1675)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 반 고흐 미술관, 마우리츠 하이스 미술관. 이른바 네덜란드가 자랑하는 3대 미술관이다. 이 중 헤이그 소재 마우리츠 하이스 미술관에는 ‘북유럽의 모나리자’ 또는 ‘네덜란드의 모나리자’라고 불리는 유명한 그림이 한 점 있는데, 바로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다.


1999년 미국 작가 트레이시 슈발리에가 동명(同名)으로 출간한 소설이 전 세계적인 베스트셀러에 오르며 널리 알려진 데 이어 2003년에는 이 소설을 원작으로 한 동명의 영화까지 나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는 그 명성과 달리 아주 작은 그림이다. 세로가 44.5cm, 가로가 39cm밖에 안 되는 소품이다.


이 그림은 지금으로부터 350여 년 전인 1665년경에 세상에 나왔다. 그림을 탄생시킨 화가는 네덜란드 서부 조이트홀란트 주에 있는 인구 10만여 명의 작은 자치도시 델프트에서 태어나 평생을 그곳에서 보낸 요하네스 페르메이르. 우리가 잘 아는 렘브란트(1606-1669)보다는 덜 익숙한 이름이지만 그와 동시대 인물로 17세기 네덜란드 미술을 빛낸 거장이다.


지금이야 서양미술사에 당당히 대가(大家)로 이름이 올라 있지만, 화가로서 페르메이르의 존재 가치는 사후 거의 200년 동안 유럽미술계의 수면 아래에 묻혀 있었다. 1632년생인 그는 1675년 심장병이 도져 43세의 나이로 사망했는데, 1866년 프랑스의 미술평론가이자 미술사가인 테오필 토레(1807-1869)가 기획한 전시를 통해 비로소 새롭게 조명을 받았다.


요하네스 페르메이르,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캔버스에 유채, 44.5 x 39cm, 1665년경. 네덜란드 헤이그 마우리츠 하이스 미술관 소장. ⓒ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페르메이르의 삶은 베일에 가려져 있다. 그의 인생 행적을 확인하고 추적할 수 있는 자료나 기록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에 대해 온갖 추측과 불확실한 주장이 난무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페르메이르는 또 평생 남긴 작품이 40점이 채 되지 않는다. 과작(寡作)이 그의 존재성을 알리는 데에 한몫한 것도 사실이다.


페르메이르는 풍속 화가다. 사소하고 평범한 일상의 풍경이 그의 그림 전체를 지배하고 있다. 그가 그린 일상의 풍경은 특별하지 않다는 점이 특별하다. 페르메이르는 일반적인 풍속화에 나타나는 시대정신이 담긴 풍속이나 당대의 시대상을 알 수 있는 사회적인 이슈를 주제로 삼지 않았다. 그는 지극히 하찮은 일상 속에서 예술성을 추구했으며 그것을 통해 회화 고유의 근원적인 가치 탐색을 성공적으로 정착시켰다는 점에서 20세기에 와서야 눈을 뜨게 된 현대 미술의 정신을 앞장서 구현한 인물로 칭송받는다. 그 매개체는 ‘빛’이다.


페르메이르의 그림을 보면 그가 빛을 얼마나 자유자재로 다루는지, ‘빛의 마술사’와 같은 놀라운 솜씨에 감탄하게 된다.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나 ‘우유를 따르는 하녀’, ‘회화의 우의, 알레고리’ 등 그의 대표작들에서 빛은 대상의 표현을 위한 종속변수가 아니라 그 자체가 온전하게 그림을 구성하는 독립된 주체로 등장하고 있다. 인물이나 물체에 비치는 빛의 각도와 빛의 양, 빛의 강약을 능수능란하게 조절함으로써 공간적인 느낌이나 깊이는 물론 원근법적인 효과까지 얻어낸 것이다. 그래서 그의 그림 속 빛은 화가의 묘사력을 돋보이게 하는 보조 수단의 역할을 뛰어넘어 아예 주도적인 독립변수로 기능하고 있다.


회화의 세계에서 빛을 다룬 화가들은 여럿 있다. 그러나 부드러운 빛의 움직임을 객관적이고 사실적으로 기록한 것은 페르메이르가 거의 유일하다는 평가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페르메이르의 그림 속 평범한 일상은 결코 평범하게 다가오지 않고 진한 여운을 남긴다. 특히 그가 파란색과 노란색을 의도적으로 즐겨 사용한 것도 빛의 움직임이 자아내는 극적인 효과를 배가시키는 데에 영향을 끼쳤다. 훗날 빛과 물체, 빛과 색채와의 역학관계 탐구에 몰두했던 인상파 화가들에게 페르메이르의 그림이 연구 대상이었던 점은 자연스럽다.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큰 눈망울을 한 소녀가 우리를 쳐다보고 있다. 배경에는 칠흑 같은 어둠만 있을 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적막강산의 배경 때문일까, 밝은 빛을 고스란히 받은 소녀의 얼굴은 화면을 압도적으로 점령한다. 배경과 얼굴의 극명한 명암대비로 소녀는 우리를 향해 성큼 다가오는 듯하다.


평범한 모습의 소녀, 단순 간결한 구성, 빛과 어둠의 극적인 대비…. 이게 다일까?

소녀의 눈과 입을 자세히 보자. 화면 밖을 응시하는 맑고 밝은 눈빛, 살짝 벌린 채 불그스레 빛나는 입술. 우리에게 뭔가 말을 걸어오는 것 같다. 정지된 소녀의 표정은 그래서 마치 살아 움직이는 듯, 동적으로 다가온다. 눈망울과 입술에서는 묘한 관능미까지 느껴진다. 물감의 집적(集積)에 불과한 평범한 소녀의 모습에서 어쩌면 이토록 생명력이 배어 나올까, 화가의 실력이 놀라울 따름이다.


그 비결은 소녀의 얼굴 전반을 가득 채우고 있는 ‘빛’에 있다. 연금술사처럼 ‘빛’을 다룬 화가는 세 부분에 승부를 걸었다. 모두 흰 점처럼 보이는데, 두 눈의 홍채 가장자리와 왼쪽 입가 및 아랫입술 가운데, 진주 귀걸이의 왼쪽 부분이다. 흰색 점을 찍는 방식으로 부드럽게 빛나는 빛의 속성을 사실적으로 표현함으로써 눈동자도, 입술도, 진주 귀걸이도, 마침내 소녀도 반짝반짝 빛나는 생명력으로 충만한 것이다. 흰색으로 처리한 옷깃과 푸른색 터번, 금빛 색조의 두건과 노란 옷도 밝게 빛나는 ‘빛’의 효과를 상승시키는 도우미로서 손색이 없다.


소녀가 누구인지, 존재가 알려지지 않아 신비성이라는 세평까지 덤으로 보장받은 이 그림은 또 ‘모나리자’ 작품에서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최초로 선보인 스푸마토 기법까지 감상할 기회를 우리에게 선사했다. 윤곽선을 흐릿하게 뭉개듯이 그린 눈가와 입술 언저리가 그 지점이다. 눈썹이 없어 무모증 환자처럼 보이는 점도 ‘모나리자’와 닮았다.


덧붙여 2차 세계 대전 당시 페르메이르의 진품으로 알려진 그림을 자신이 위조했다고 밝혀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네덜란드 출신 희대의 위조 작가 판 메이헤런 사건은 무덤 속 페르메이르를 다시 불러낸 것으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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