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라파엘로, 아테네 학당
라파엘로(1483-1520)
르네상스는 세상의 중심이 신(神)이 아니라 인간임을 선언한 인문주의 문화운동이다. 14~16세기 유럽 전역을 휩쓴 르네상스의 물결은 신대륙 발견, 지동설의 등장, 봉건제의 몰락과 상업 부흥, 종이, 인쇄술, 화약 발명 등 인류 역사를 뒤바꾼 획기적인 결실을 낳았다.
인간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르네상스의 가치가 가장 선명하게 드러난 분야는 단연 예술, 그중에서도 미술이었다. 당시 미술은 단순히 예술의 한 장르에 머무는 위치가 아니라 시각적인 관찰과 수학적인 분석, 과학적인 탐구 정신을 망라한 학문의 핵심 기둥으로 전성기를 구가했다. 그 결과 미술이론의 전범(典範)인 원근법의 발견과 유화물감의 번성, 균형과 비례의 법칙, 명암대비, 해부학적 지식을 토대로 한 신체 묘사 등 근대회화로 나아갈 수 있는 중요한 토양을 확보하게 됐다.
이처럼 르네상스 미술의 황금기를 이끈 세 명의 천재 예술가가 있었으니, 바로 레오나르도 다빈치(1452-1519)와 미켈란젤로(1475-1564), 라파엘로가 그 주인공이다. 이들 중 가장 늦게 태어난 라파엘로는 불과 37살의 나이로 요절(夭折)하지만 짧은 생애를 만회하고도 남을 찬란한 업적으로 르네상스 3대 거장에 이름을 올린 천재 화가다.
라파엘로의 수많은 업적 중 첫 손에 꼽히는 것이 르네상스 미술 정신을 완벽하게 구현한 걸작 ‘아테네 학당’이다. 라파엘로가 1509~1510년에 그린 ‘아테네 학당’은 인류문화 유산으로 손색이 없는 명작들의 보고(寶庫)인 로마 바티칸박물관 내 성 베드로 대성당 안의 서명의 방을 위풍당당하게 지키고 있는 거대한 프레스코 벽화다.
라파엘로, 아테네 학당, 프레스코화, 500 x 700cm, 1509-1510. 로마 바티칸박물관 소장. ⓒ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세로 500cm, 가로 700cm 크기로 보는 사람을 압도하는 이 작품은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수학자, 천문학자 등 54명의 내로라하는 위인들이 학당에 모여 토론을 하는 장면을 상상력을 동원해 그린 대작이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소크라테스, 피타고라스를 비롯한 고대 그리스 시대 학자들 모습을 다빈치와 미켈란젤로 등 당대의 실제 인물들을 모델로 내세워 그린 것이다. 심지어 라파엘로 자신도 모델로 등장한다.
1483년 이탈리아 중부 마르케주의 작은 도시 우르비노에서 태어난 라파엘로는 8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11살 때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삼촌의 보살핌 아래 성장기를 보냈다. 궁정화가이자 시인이었던 아버지의 피를 물려받아서인지, 일찍이 미술에 남다른 재능을 보인 그는 1504~1508년 르네상스 미술의 본거지인 피렌체에 머무는 동안 다빈치의 작품을 집중적으로 연구하면서 대가로 발돋움하기 위한 숨 고르기에 들어갔다. 피렌체 시기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방울새의 성모’, ‘도니 부부의 초상화’, ‘대공의 성모’ 등이 있다.
피렌체 시기의 마지막 해인 1508년, 라파엘로는 교황 율리우스 2세의 호출로 로마로 건너가 바티칸 궁전 내의 교황의 서재인 서명의 방에 초대형 벽화를 제작했는데, 이게 바로 ‘아테네 학당’이다. 율리우스 2세는 물론 후임 교황 레오 10세의 아낌없는 지원을 받으며 교황의 화가로 승승장구한 라파엘로는 그러나 1520년 급사로 생을 마감한다. 시신은 로마 도심의 돔 구조 고대 건축물 판테온 신전에 매장됐다.
우아하고 아름답고 편안한 그림으로 해석되는 라파엘로 회화는 훗날 프랑스 낭만주의와 고전주의 화가들에게 귀감(龜鑑)이 됐다.
아테네 학당
아테네 학당은 실제로 존재했던 교육기관이다. 기원전 385년경 플라톤이 아테네 교외에 세운 학교로 철학과 수학, 천문학, 음악 등을 가르친 것으로 알려진 오늘날 아카데미의 기원이다. 서기 529년까지 900년 이상 존속했다.
고대 그리스를 주름잡았던 50여 명의 석학이 자유롭게 토론하고 사색하는 장면을 묘사한 이 그림은 우선 르네상스가 지향한 인문주의 정신과 고대 그리스 문명의 총화를 상징하는 조화와 균형의 원칙을 따라 전체적인 분위기를 평화롭게 표현한 점이 가장 두드러진다.
아울러 아득한 옛날, 인류의 지적 유산의 기틀을 닦은 쟁쟁한 학자들의 학구열을 당시의 실존 인물들을 모델 삼아 재현함으로써 인물 묘사의 생동감을 극대화했다. 고대의 현인들에게는 찬양을, 당대의 거장들에게는 경의의 뜻을 동시에 나타내 고전의 부활과 인간중심의 세상으로 대변되는 르네상스 정신을 실천한 것이다.
또한 반원 모양의 천장과 양쪽 벽, 계단으로부터 정중앙을 향해 뒤로 멀어질수록 시선이 하나의 점으로 흡수되는데, 1점 소실점 원근법을 적용한 결과다. 더불어 화면은 가운데를 중심으로 좌, 우 양쪽으로 대칭구조를 이루고 있다. 그림 중앙에 수직선을 긋고 양쪽을 살펴보면 정확히 대칭 분할 구조임을 알 수 있다. 1점 소실점 원근법과 대칭 분할 구조, 이 두 가지 이유로 수많은 등장인물과 그들이 취하고 있는 다양한 자세에도 불구하고 그림을 보는 우리의 시선은 산만하지도, 혼란스럽지도 않은 것이다.
그림 한가운데에 서서 대화를 나누고 있는 두 사람은 플라톤과 그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다. 오른손으로 하늘을 가리키고 있는 이가 플라톤, 옆구리의 책은 티마이오스, 즉 형이상학이다. 관념과 이념의 신봉자답다. 라파엘로는 플라톤의 모델로 자신이 흠모했던 다빈치를 내세웠다. 반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오른 손바닥은 땅을 향하고 있다. 들고 있는 책은 에티카, 윤리학이다. 그가 현실론자임을 보여 주는 증거다.
플라톤 왼쪽으로 7, 8번째 민머리에 들창코 모습으로 손가락을 꼽아가며 뭔가를 진지하게 설명하는 사람이 플라톤의 스승 소크라테스다. 소크라테스 바로 옆, 파란 옷의 젊은이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이며 투구에 군복 차림을 하고 소크라테스와 마주 보고 있는 인물은 군인 겸 정치가 알키비아데스. 그림 맨 왼쪽 기둥에 풀잎 모자를 쓰고 필기 중인 듯 보이는 사람이 윤리 철학의 창시자 에피쿠로스다.
맨 아래 왼쪽에서 두 번째, 쪼그리고 앉아 열심히 뭔가를 기록하는 이는 수학 시간 때 배운 ‘피타고라스의 정리’의 창시자 피타고라스. 기하학의 대가 유클리드도 있다. 그림 오른쪽 아래, 허리를 굽힌 채 컴퍼스로 원을 그리며 강의 중인 사람이다. 반라(半裸)의 차림으로 계단에 비스듬히 걸터앉아 유난히 눈길을 끄는 인물은 관습과 일상의 가치를 벗어나 세상을 냉소적으로 바라본 견유학파 철학자 디오게네스이며 그 아래 왼쪽으로 턱을 괴고 골똘히 사색에 잠긴 표정으로 우리의 호기심을 자아내는 또 한 명의 사람이 있으니, 바로 ‘만물의 근원은 불’이라고 주장한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다. 얼굴을 자세히 보면 미켈란젤로가 모델임을 알 수 있다. 대리석으로 된 탁자도 조각가 미켈란젤로를 연상시킨다.
라파엘로 본인도 나온다. 그림 맨 오른쪽 기둥 옆, 흰옷을 입은 남자 곁에 얼굴만 보이는 사람인데, 우리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다. 그 옆쪽으로 등을 돌린 채 왼손에 지구의를 들고 있는 인물은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며 천동설을 주창한 천문학자 프톨레마이오스며 조로아스터가 맞은편에서 천구의(별자리본)를 들고 서 있다.
가히 고대 그리스 최고의 석학들이 모인 별들의 사상경연장이라 할 만한 그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