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 루소, 잠자는 집시
앙리 루소(1844~1910)
우리가 다 아는 빈센트 반 고흐(1853~1890)와 폴 고갱(1848~1903)은 1888년 예술적 동반자의 꿈을 이루고자 의기투합했다. 이들이 손을 맞잡은 곳은 문화유적지로 유명한 프랑스 남동부의 유구한 역사의 도시 아를이었다. ‘노란 집’이란 애칭으로 불린 이곳에서 그해 10월부터 동지애를 불태운 둘 사이는 그러나 삶과 미술에 대한 지향점과 성격 차이로 2개월 만에 파탄이 나고 말았다.
앙리 루소, 자화상, 캔버스에 유화, 41 x 33cm, 1906, 개인소장 ⓒ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동시대에 활동한 화가란 사실 말고도 두 사람을 따라다니는 공통점은 여럿 있다. 둘 다 정규 미술 교육을 받은 적 없이 독학으로 자수성가했으며 다른 직업에 종사하다 뒤늦게 화가의 길로 들어섰는가 하면, 지독하리만치 외골수를 고집했을 뿐 아니라 사후에 명성을 얻게 됐다는 점 등이다. 이 중 미술을 전문적으로 가르치는 아카데미 근처에도 가본 적 없이 오로지 혼자만의 힘으로 미술사에 불멸의 이름을 아로새긴 천재성이야말로 두 화가를 가장 잘 나타내는 수식어다.
고흐보다 아홉 살 위, 고갱보다 네 살 위인 앙리 루소도 독학으로 성공한 대표적인 화가다. 화가로 전직(轉職)한 나이는 셋 가운데 가장 늦다. 고흐가 27살 때, 고갱이 34살 때 전업 화가의 길로 들어선 데 비해, 루소는 지천명(知天命)을 코앞에 둔 마흔아홉에서야 미술에 승부를 걸었다. 화가가 되기 전, 고흐는 화랑 점원과 실패한 전도사의 길을 걸었다. 고갱은 짧은 도선사(導船士) 생활을 거쳐 11년 동안 증권회사 중개인으로 근무했다.
반면 루소는 22년 동안 파리 세관에서 세관원으로 종사했다. 오십 줄에 전업 화가의 길을 선언하기에 앞서 루소는 서른 중반 때부터 취미 삼아 틈틈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마흔이 넘어서면서부터는 앙데팡당전 등 전시회에 꾸준하게 작품을 출품하며 화가의 꿈을 키워나갔다. 특히 주말마다 그림을 그렸다는 이유로 ‘일요화가’로 불리기도 했다.
전업 화가가 된 지 4년이 되던 1897년, 루소는 훗날 자신의 대표작으로 명성을 날리게 된 한 점의 작품을 세상에 선보인다. 참신성과 독창성, 단순성과 원시성으로 요약되는 루소 특유의 화풍이 고스란히 집약된 그림 ‘잠자는 집시’다.
부자연스럽고 어울리지 않는 인체 비례, 현실성이 떨어지는 생뚱맞은 묘사 등으로 별 볼 일 없는 아마추어 화가라는 화단의 비아냥과 멸시를 받았으나 루소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10년 뒤, 루소는 자신의 진가를 알아주는 한 사람을 운명적으로 만난다. 1908년에 이루어진 만남의 주인공은 한 해 전 입체파의 화려한 탄생을 알리는 ‘아비뇽의 아가씨들’(1907)을 발표해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한 20대의 천재 화가 피카소다. 루소가 세상을 떠나기 2년 전, 64세의 할아버지와 27세의 손자뻘 되는 두 화가의 조우는 사실 피카소가 주선한 것이었다.
앙리 루소, 시인에게 영감을 주는 뮤즈, 캔버스에 유화, 131 x 97cm, 1909, 스위스 바젤미술관 소장 ⓒ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루소가 자신의 지지자인 초현실주의 시인 아폴리네르(오른쪽, 1880~1918)와 아폴리네르의 연인으로 프랑스 화가인 마리 로랑생(1883~1956)을 모델로 그린 그림이다. 아폴리네르는 루소를 돕기 위해 주문한 이 그림을 5만 프랑을 주고 산 것으로 알려져 있다.
피카소는 몇 년 전부터 루소의 작품을 마음에 두고 있었다. 회화의 기술적 솜씨가 보잘것없다며 평가절하한 세간의 평은 피카소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피카소는 루소의 그림에서 나타나는 사물을 단순하고 명확하게 구성하는 기하학적 능력과 평면성, 다시점(多視點)에 이어 환상과 현실을 엇갈리게 하는 투박하고 소박한 원시미를 눈여겨본 것이다. 입체파의 대가다운 안목이다.
피카소와 가까운 초현실주의 시인 아폴리네르 등 당대의 내로라하는 예술가들도 루소의 그림에 공감하며 분위기를 띄웠다. 피카소는 새로운 질서와 가치에 대한 욕구가 분출하던 20세기 초, 전위적인 예술가들과 뜻을 모아 ‘루소의 밤’ 행사를 개최했다. 화가 루소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진 뜻깊은 자리였다. 아폴리네르는 루소에게 바치는 시를 즉석에서 지어 낭독했다. 루소가 사망하고 10여 년이 흐른 1924년, ‘초현실주의 선언’을 발표한 초현실주의 작가들은 루소를 초현실주의의 아버지로 받들었다.
잠자는 집시
등장인물은 동양풍 의상을 입고 자는 것처럼 보이는 흑인 집시 여자와 맹수의 제왕 사자 한 마리, 배경은 모래사막. 사막 뒤로 강물이 보이고, 그 너머로 산들이 줄지어 서 있다. 푸른 하늘 위로 흰 보름달이 창백한 얼굴로 떠 있다. 여자 옆에 만돌린 악기 하나와 질항아리 물병이 놓여있다. 집시 여자와 사자의 조합도, 배경도 생뚱맞고 그림 속 모든 것들이 평면적이다. 전문적인 화가의 기교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촌스럽고 생경한 그림이다.
‘제아무리 사나운 육식동물이라도 지쳐 잠든 먹이 앞에서는 망설인다’라는 부제(副題)는 더욱 엉뚱하고 어색하다. 세련미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이 그림에 묘사된 공간과 상황은 현실 세계와 동떨어져 있다. 원근법과 명암법, 입체감 등 회화 기법도 지켜지지 않았다. 루소는 정규 미술 교육을 받은 적이 없다. 미술이론을 체계적으로 배우지 않아 자신만의 감(感)으로 그림을 그렸다. 그런데도 그는 자신의 그림이 천하제일이라고 굳게 믿었다.
앙리 루소, 잠자는 집시, 캔버스에 채색, 130 x 201cm, 1897, 뉴욕현대미술관 소장 ⓒ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현실성이 없는 공간설정과 상황묘사도 자신의 상상력이 만들어 낸 산물이었다. 그런데 묘하게도 그림 전체에서 환상적이고 신비스러운 아우라가 뿜어져 나온다. 구성도 지극히 단조롭다. 그 점이 그림의 명확성을 단단하게 하는 이유다. 여인이 입고 있는 빨강, 파랑, 노랑, 녹색, 주황색 의상과 피부 빛은 원시성을 연상시킨다.
여인과 만돌린은 위에서 내려다본 모습으로, 사자와 물병은 옆에서 바라본 모습이다. 복합시점이다. 단순하고 평면적인 구성과 다시점, 이국적이고 원시적인 분위기. 피카소가 이 그림에 주목한 것은 당연했다. 현대미술의 출발점이 ‘있는 그대로의 재현’이라는 전통 미술 규범의 타파라는 점에서 루소의 그림은 피카소 등 입체파 화가들과 꿈과 상상력, 몽환성을 추구한 초현실주의 화가들을 흥분시켰다.
‘잠자는 집시’라는 제목과 달리 여인은 지금 잠든 것이 아니라, 자는 척하는 것 같다. 보일락말락 가늘게 뜬 두 눈과 입술 사이로 보이는 치아의 흰색이 이를 증명한다. 더욱이 인기척이라고는 없는 사막 한복판에서 사자를 만났으니, 어찌 한가롭게 잠을 청할 수 있으랴. 사자의 행동도 이상하다. 금빛 눈은 살기(殺氣)와는 거리가 멀고, 입을 꽉 다문 채 날카로운 이빨을 일부러 숨기고 있는 듯한 게, 맹수의 위용이 온데간데없다. 집시 여인은 지금 사자와의 평화로운 동거(同居)를 즐기고 있는 걸까. 하긴 떠도는 삶이 운명이고 머무는 곳이 집인 집시 여인에게 두려운 게 있을까.
하나부터 열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을 무너뜨리는 설정이다. 루소의 그림은 우리가 당연시한 지식과 기법, 판단과 인식을 가차 없이 혁파했다. 인위적인 의도의 개입 없이, 아주 자연스럽고 본인만의 날것 그대로의 감각으로. 프랑스 시인 장 콕토(1889~1963)는 ‘잠자는 집시’ 그림을 본 뒤 ‘본능적인 감각이 이끄는 대로 자유분방하게 그린 환상적인 그림’이라고 칭송했다. 루소가 위대한 까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