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정일과 폴 오스터에게서 찾는 책 읽기의 기쁨
“어린 시절의 내 꿈은 이런 것이었다. 동사무소 하급 공무원이나 하면서 아침 아홉 시에 출근하고 오후 다섯 시에 퇴근하여 집에 돌아와 발 씻고 침대에 드러누워 새벽 두 시까지 책을 읽는 것. 누가 이것을 소박한 꿈이라도 조롱할 수 있으랴. 결혼은 물론 아이를 낳아 기를 생각도 없이, 다만 딱딱한 침대 옆자리에 책을 쌓아놓고 원 없이 읽는 것이 원대한 꿈이다. 그러나 나는 재수 없게도 공무원이 되지 못했을 뿐더러, ‘행복한 저자’ 역을 맡지도 못했다. 시인, 소설가라는 꿈에도 원치 않았던 개똥 같은 광대짓과 함께 또 한 권의 책을 출간하고자 머리말을 짜내고 있는 나는 ‘불행한 저자’이다.”
<서문, 장정일의 독서일기 1994>
책 읽기를 좋아하는 지인이 보내준 이 구절을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읽었다. 책 읽기를 향한 장정일의 한껏 달뜬 마음에 내 마음도 덩달아 순도 높은 흥분으로 널뛰었다.
오락은 물론이요 교양 지식 쌓기 영역까지 영상매체가 제패한 지 오래지 않은가. 그렇다고 책 읽기의 쇠퇴를 개탄하며 책 읽기의 ‘쓸모’에 목소리를 높이고 싶지는 않다. ‘공부하라’ 는 잔소리만큼이나 헛된 말이 ‘책 좀 읽어라’ 조언이다.
벌어진 사태는 단순하다.
오락과 지식과 교양 쌓기의 원천이 문자 정보였던 시대를 넘어 그 영역을 영상 매체에 내어준 것 일뿐이다. 사람은 어디까지나 ‘쾌’를 추구하는 동물이다. 영상 매체는 책과 비교할 수 없는 현란하고 다채로운 ‘쾌’를 손쉽게 제공한다. 책을 영상매체와 동일 선상에 두는 일 자체가 시대착오적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쪼그라들었을지언정
책은 살아남아 여전히 우리와 함께 하고 있다.
때로는 나는 이 사실에 놀라면서도 안도감을 느낀다.
구시대 유물 같은 책 읽기가 살아남은 것도 역시 책이 주는 ‘쾌’ 덕분이다. 삶의 속도가 하루가 다르게 빨라지고 산만함이 넘치는 세상에서 어쩌면 책 읽기가 주는 고유한 즐거움이 있다.
“책 읽기는 나의 탈출구, 위로, 위안, 자극제였습니다. 순수한 즐거움을 위한 독서, 머릿속에 울려 퍼지는 작가의 말을 들을 때 나를 둘러싸는 아름다운 고요함을 위한 독서말이다 “
“Reading was my escape and my comfort, my consolation, my stimulant of choice: reading for pure pleasure of it, for the beautiful stillness that surrounds you when you hear an author’s words reverberating in you head.”
-Paul Auster, The Brooklyn Follies
‘쾌’를 위한 독서는 본질적으로 도피다.
일상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는 피난처,
미지의 세계로 통하는 신비로운 문,
새로운 관점과 활력으로 현실로 복귀하게 되는
일시적 유예이다.
책 읽기는 철저히 개인적인 경험이면서도 저자와 독자사이의 가장 은밀한 대화이기도 하다. 책 읽을 때 우리를 감싸는 고요함은 영혼을 어루만져주고 삶의 혼란 속에서 평온한 순간을 선사한다. 책을 펼치는 순간 언제 어디서든 우리는 책이 주는 고요를 만날 수 있다. 분주하고 소란한 기차역에서도, 군중으로 휩싸인 광장에서도. 모든 책은 또한 발견되기를 기다리는, 다른 이야기와 관점으로 가득 찬 보물창고다.
책이 주는 이 고유한 ’ 쾌‘의 맛을 본 사람이라면
책을 찾을 수밖에 없다.
한동안 다른 ’ 쾌‘에 흥건하게 빠져 살다가도
결국은 책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
다른 도리가 없다.
오늘 밤엔 무슨 책을 펼쳐볼까?
이 지극히 순수한 ‘쾌’를 무엇이 대체할 수 있을까?!
표지사진: Unsplash, Annie Sprat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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