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말 모임계획은 부천에 사는 M담당이었다.
매월 3만 원씩 40년 넘게 모았더니 우린 꽤 부자다. 그래서 모이면 아끼지 않고 막 쓴다. 일 년에 많아야 두 번, 푸지게 낭비해도 통장이 통통하다.
조의금으로 축의금으로 서로에게 뭉태기로 인심써도 남는다. 남편은 쓸데없이 낭비 말고 여행해라 등 떠밀지만, 40년동안 몰랐던 다른 성향을 확인하는데 그치고 말았다. 주로 서울에서 깨작대었다. 뮤지컬에 마사지에 영화... 안 해 본 것이 없다. 식사도 호텔부터 파인다이닝까지 안 먹어 본 것을 찾는 것이 더 쉽다.
절대로 헤어지지 말자는 의미로 무리수인 '루트세븐'이다. 세븐으로 시작했으나 남아있는 건 넷, 강제로 정한 회비 덕분인지 꾸준히 만나지고 있다. 양갈래로 머리를 따고 조잘대며 여기저기 몰려다니던 때가 어제 같은데, 은퇴를 하고 사위며느리에 손자까지 볼 나이가 되어버렸다.
M은 카톡으로 모임 관련 브리핑을 했다.
일정을 말씀드리것습니다.
*10시 조조상영되는 '소방관'을 관람 위해 만남
*점심 M집
* '수피아'식물원(상동호수공원)
*저녁 6시 '목향'예약
먼 곳도 아닌 '부천'인데, 만나자마자 사연들이 많다. Y는 새로 뚫린 전철을 체험했고, 엎어지면 코 닿을 데 사는 M은 버스로 세정거장을 뛰어서 달려왔다.-그녀의 남편은 마라톤 풀코스 100번을 완주했다-
J의 파란만장함은 더 했다. 온수역이 종착역인 것 모르고 탑승한 탓에 다시 갈아타고 왔다. 몇 분 전 겪은 사연은 우리에게 전달되기도 전에 시작된 영화가 끊고 말았다.
참으로 오랜만의 조조관람이다. '소방관'... 제목에서 내용을 알 것 같은 무겁고 심란한...그 희생덕에 그나마 지금의 소방관들의 처우가 나아졌다고 하니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하나의 꺼짐이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불꽃이 되어 주는...
점심으로 내어놓은 카레는 맛이 없을 수가 없었다. 그냥 카레가 아니다. 아내의 친구들을 위해 손수 만들어 놓고는 본인은 빠져주는 센스쟁이 남편이라는 스토리텔링덕분이다. -연애 시작부터 지금까지 다 알고 있다- 친구가 직접 담근 김장김치과 천수무 동치미는 카레의 느끼함을 잡고, 추가주문을 부르고 있었다. 적당히 낡은-나이든-우리들에게 인생살이는 별거 없다. 두 다리 튼실하고, 정신말짱하며 조석으로 음식대령해주는 남편이 있으면 최고의 말년이다. 주방의 주인이 나가 아니고 비로소 우리다.
M과 J는 '수피아'식물원에서 신이 났다. 추운 바깥과의 온도차로 걸을 때마다 후드득 떨어지는 물방울이 거슬리지도 않는지 투둑떨어지던 말든 세 발자국도 못 가고는 멈춰 샷을 담는다. 마른 갬성의 Y와 나는 늘 가끔 가벼운 흘김으로 땡겨도 보지만 다시 눈이 휘둥그레지며 멈춰서는 그네들을 보며 그냥 웃어버린다.
마지막 피나레를 장식해 줄 디너는 상상이상이었다.
한정식이라 예약한 식당은
술을 주로 파는 이베리코구이점이었다. ㅗ 와 ㅜ 의 차로 안주가 식사가 될 판이다. 엮시 M답다. 뭔가 2% 부족하다.
널찍한 주차장대신 좁고 가파른 경사의 입구로 들어설 때 잔뜩 쫄아든 내 심장은 사그러지기 일보직전이다. 며칠 전 후진하다 뒤 범퍼를 작살낸 트라우마가 아직 가시지도 않았다. 그래도 그 때는 가족들이 걱정이라는 것을 해 주었었다.
전화로 길안내를 도와준 고객이 할줌마들인 것을 알게 된 어린직원들의 동그레진 눈동자가 귀엽다.
한 달 전부터 모임에 대해 고민했다던 M은 소주 한 모금에 긴장이 풀린 듯 그제야 귀엽게 꺄르륵댄다.
불판 위의 '이베리코 한 마리'는 몇 조각 남아 있지 않았다. 드디어 하루의 대 장정이 끝이 나고 있다. 그러나 아직 내게는 한 가지 미션이 남아 있다. 어마어마하게 가파르고 좁은 주차장을 빠져나가는 것이다. 깔깔대며 재미난 친구들 틈에서 혼자 단순기하학에 빠져 시물레이션하느라 그들의 대화는 띠엄띠엄 끊겨 들렸다.
꺾고 빼고 다시 꺾고 후진하기를 반복했다. 10센티꺽고 후진, 20센티꺽고 후진...꺽을 때 들이시고 후진할 때 내 쉬던 내 친구들의 숨소리는 교묘하게 발란스가 맞았다. 어쨌던 이 곳을 탈출하고보자. 아무리 좁고 휘어진 곳이라도 어차피 차가 들어오고 나가게 설계되어 있다. 여기저기 긁힌 자국들이 보였다. 거기에 내 것을 보태고 싶은 마음은 1도 없었다.
좁고 경사진 터널 같은 통로를 지나 넓은 평지로 올라서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일제히 환호성을 질렀다. 베스트드라이버라고 엄지 척해준다. 주차장 하나 벗어났다고 우량운자전라니 배려심끝판왕 친구들이다. 마지막 미션을 수행하고 나니 기분이 날아갈 듯 상쾌해졌다.
삼월에 둘째의 결혼식이 있어 2025년 첫 모임은 내 딸의 결혼식이 될 예정이다.
"나는 줄 사람이 없어."
꼭 맞잡고 있는 둘의 손을 풀어 헤치면 웨딩안내가 펼쳐지는 청첩장을 내어놓는 딸아이에게 했던 말이다. 두아이의 손을 떼어놓으며 친구들이 한 마디씩한다. "참 이뿌다"
특별하게 잘 난것도 이쁜 것도 아닌 우리들, 지나치게 부자도 아니고 찢어지게 가난하지도 않다. 평범하고 보통의 우리들은 또 그렇게 다음을 기약하며 손을 흔들었다.
"누구 한 명 정신줄 놓는 순간 모은 회비 뿜빠이하고 이 모임은 끝내는걸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