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의 중요성
병이 도졌다. 아침 여덟시 아인이 첫 번째 낮잠 타임이 되기만을 기다리다가 아인이가 잠들자마자 부산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몇 주째 생각으로만 하던 일들, 몇 달째 못 본 척 모른 척 미루고 미루던 일들, 아주 오래전부터 생각을 어지럽히던 일들을 했다.
우선 이유식 용기를 다 꺼내 깨끗이 씻고 냄비와 조리도구 연마 작업을 했다. 유튜브를 찾아보며 1차, 2차, 3차 꼼꼼히 냄비를 뒤집어 가며 뽀득뽀득 씻어냈다. 아인 이용 수세미도 꺼내고 내친김에 이것저것 미루던 식기들을 모조리 꺼내 씻었다. 삶고 끓이고 하느라 인덕션이며 싱크대가 엉망이 되었는데 그것 또한 열심히 닦았다.
그러고는 서재를 정리했다. 현관 바로 앞에 있는 우리 집 서재는 이사 오고 나서 내가 가장 애정 하는 공간이다. 계단 모양의 특이한 책장도 마음에 들고 아주 커다란 책상과 빨간 의자도 쏙 마음에 든다. 그런데 아인이가 생기고 더불어 아인이 물건들도 늘어나면서 서재는 창고가 되어갔다. 가지런하고 반듯했던 책장 위가 아인이 장난감으로 지저분해졌고, 누드톤에 빨간 의자로 포인트를 줬던 방이 형형색색 아인이 물건들로 정신 없어졌다. 앉을 곳은커녕 발 디딜 틈도 없던 서재. 하아. 볼 때마다 정말이지 답답함과 한숨이 밀려나와 웬만하면 서재 방은 문을 닫아두고 지냈다.
그런데 오늘 마음먹고 방을 열어젖혔다. 일단 부피가 큰 아이 장난감을 더 큰 비닐로 감싸는 게 첫 번째 난제. 비닐은 왜 이렇게 다들 조막만 해서 조각조각을 이어서 큰 비닐을 만들어야 했다. 테이프를 반 통을 넘게 써서 아이 화장대, 아이 말, 아이 자동차 (다 받은 건데, 아인이가 쓸려면 족히 일이 년은 기다려야 할 듯 -_ -)를 겨우겨우 비닐 안에 집어넣었다. 다음은 그 부피 큰 애들을 창고에 집어넣는 게 다른 난제. 테트리스도 그런 테트리스가 없다. 기존에 캠핑 용품에 안 쓰는 전기그릴을 모조리 다시 꺼내 다시 차근차근 쌓아 겨우겨우 공간을 마련해 비닐에 곱게 포장한 장난감들을 욱여넣었다. 부디 다시 꺼낼 때까지 그 대열을 유지해 주길 바라면서. 장난감을 해결하고 나니 이제 이곳저곳 쌓아놓은 책 정리. 보지도 않는 책을 욕심내서 사서는 책장이 꽉 차 두 겹, 세 겹으로 마구잡이 놓여있다. 일단 책을 모조리 꺼내 읽은 책과 읽지 않은 책, 읽지 않을 책과 무조건 가지고 있어야 하는 책을 구분해서 안 읽을 책, 읽은 책 중에 소장 가치 없는 책을 구분해 낸다. 그러고는 알라딘 중고 팔기에 등록. 하. 안되는 게 2/3이 넘는다. 이건 다시 헌책방 수소문 후 방문 수거를 신청했다. 그러고는 책상을 세팅했다. 내가 좋아하던 사진을 다시 붙이고 연필꽂이와 작은 서랍을 올려놓고 노트북도 옮겨 왔다.
물론 저 중간중간에 아인이 우유를 주고 손을 씻겨 주고 울면 안아주고 다시 재워주고, 눕혀서 모빌을 틀어줬다 보행기를 태웠다 꼬꼬맘을 보여줬다 하며 어르고 달래기를 수십 번 반복해야 했다. 오늘 기어이 서재와 한판 벌리겠다는 나의 의지가 느껴졌는지 아인이는 자신에게서 멀어진 관심을 되찾기 위해 더 가열하게 울었고 징얼거렸다. 환장할 노릇이지만, 난 기어이 서재와의 한판에서 물러서지 않았고, 꼬박 13시간이 걸려 모든 것이 완성되었다.
저녁을 먹고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책과 따뜻한 캐머마일 차를 들고 서재에 들어섰다. 아주 산뜻하다. 이렇게 싱그럽고 가뿐할 수가 없다. 블라인드를 열어 창밖 신천 대로도 볼 수 있다. 책상에서 책도 읽을 수 있고 무슨 책이 어디에 꽂혀있는지도 알 수 있다. 더더군다나 내가 원하는 음악을 이어폰 없이 듣는 여유가 생기고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주변에 둘 수가 있다. 갑자기 계획이 생기고 하고 싶은 것들이 생각나기 시작한다.
그렇다. 공간은 이렇게나 중요한 것이다. 내 몸과 내 정신과 내 모든 것이 아인이에게 침범당해 내가 아인인지, 아인이가 난지 헷갈릴 정도로 휘청휘청 거릴 때, 이렇게 책상과 책장 놓을 공간 하나가 숨통을 틔워준다. 게다가 아인이가 잠들고 나면 축 처져 티브이 앞 소파에 널브러져 있지 않고 우아하게 차를 한잔 마실 수도 있고, 노트북으로 글을 쓸 수도 있다. 영어 공부도 할 수 있겠지. 책도 읽을 수 있고 아나와 영상통화도 자주 할 수 있겠지. 오늘 13시간의 노동이 보상받는 기분이다.
정말이지 너무나 필요한 공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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