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합과 불협화음의 한 입 한 잔
맛있다. 보기 좋다. 조화롭다. 평온하다. 그것은 곧 정상의 범주이다.
맛이 없다. 보기 좋지 않다. 조화롭지 못하다. 시끄럽다 그것은 곧 비정상의 범주이다.
맞을까?
정상과 비정상의 기준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화목하다는 안온하다는 평화롭다는 가정의 상징적 모습은 어떠한가?
다양한 품종들이 섞여 있지만 그 누구의 맛도 해치지 않게 잘 블랜딩 된 와인은 좋은 와인의 기준에 부합하며 꽤 값이 나간다.
다양한 사람들이 섞여 있지만 불협화음 없이 잘 조화가 된 그룹은 훌륭한 가족, 동기, 모임이 되며 사람들의 부러움을 산다.
우리는 이렇게 좋아 보이는 것. 어떠한 규칙과 질서에 크게 벗어나지 않고 체제에 수긍하는 것을 좋음이라 인식한다. 이는 사람과 음식도 사랑도 와인도 그 뜻을 같이한다.
여기 이유리 작가의 <치즈 달과 비스코티> 짧은 단편 소설이 이러한 정상과 비정상의 범주를 표현한 훌륭한 소설이 있다. 주인공인 30대 남자는 비만이며 돌과 대화를 나누는 비정상의 궤도의 삶을 사는 사람이다.
반면, 그의 어머니는 패션잡지의 편집장으로 엄청난 수의 팔로우를 자랑하는 정상의 궤도 중 성공한 여성의 삶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다. 돌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망상장애'를 앓고 있는 주인공은 글쓰기 치료센터에서 보름달이 뜨면 달은 곧 치즈가 되며 그로 여행을 할 수 있다고 믿는 또 다른 망상 장애인 쿠커를 만난다. 우연한 계기로 둘은 함께 낚시터를 가게 된다. 그곳에서 쿠커는 웅덩이에 빠지고 이를 구해주는 과정에서 주인공은 유일한 친구인 돌 "스콧'을 분실하게 된다. 이에 쿠커는 돌의 존재를 인정하며 이해하고 잠수부를 불러 스콧을 찾는 것에 성공한다. 그곳에서 쿠커는 주인공의 망상증에 진심으로 공감을 표시하며 스콧의 존재를 인정한다. 그렇게 주인공은 쿠커와 조금씩 (돌이 아닌 인간과) "대화"를 하는 과정에서 그는 쿠커를 얻는 대신 돌멩이 친구인 스콧을 잃는다. 나는 나의 주변에 주인공과 같은 사람이 있다면 정신이 나간 조금 이상한 사람 즉. 정상의 궤도에서 벗어난 인간으로 치부한다. 왜냐하면 그는 인간들끼리 통용 가능한 언어를 사람이 아닌 돌멩이와 대화를 나누는 표상의 모습만으로 그를 인지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를 다른 사람들 즉, 일반인과는 다른 '부류'로 아주 간단하게 분리한다. 이러한 나의 얄팍하고 편협한 시선에 질문을 던진 소실이다.
'말하지 못하는 존재' 즉, 인간의 음성이 아닌 사물이 갖고 있는 그들의 언어를 인정하는 것은 어쩌면 오랜 시간 서구사회를 지배해 온 남성 권력 중심의 사상 즉, 이분법 가치관으로 인간이 자연을 지배할 수 있다는 인간 특권에 대해 비판적 시각이 잘 묻어난 작가의 의도가 아닐까 생각이 든다. 푸코는 말한다. 우리의 신체는 권력 즉 '힘'의 작동에 유리하게 시스템화 되어 있다고, 그렇다면 우리가 평소에 사용하는 언어와 더불어 주인공에게 부여된 신체의 모습 즉, 주인공은 비만으로 그러니 비정상의 궤도로, 그의 어머니는 아주 날씬하고 세련된 모습 그러니 정상의 궤도의 측면으로의 신체로 표현되고 있다. 평론가 오창은 씨의 글처럼 목소리 없는 존재가 말을 한다는 설정은 결국 위로와 연대의 방식이다. 이들에게 목소리를 기꺼이 내어주는 즉, 상처받은 자들에게 자기표현을 가능케 해주는 작가의 아름다운 내면의 목소리는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같은 공간에서 살아가지만 전혀 다른 생각과 가치관을 갖고 있는 우리 부부는 매일의 불화의 연속이다. 불화는 결국 서로의 목소리에 더 힘을 싣기 위함이며 그 목소리는 권력, 힘의 의지이며 동시에 더 강력한 목소리를 갖는 사람이 상대방을 자신의 가치관으로 재구성할 수 있다고 믿는 의지이기도 하다. 불협화음의 남발하는 우리 집에서 오늘 나는 다양한 야채들을 조합해 맛있음 즉, 화합이 되는 정상의 궤도에 있는 월남쌈과 쇼비뇽 블랑과 샤도네이의 적당한 조합이 좋은 앙시앙 땅 화이트 와인을 저녁 메뉴로 선택했다. 그리고 우리집으로 초대된 부부는 역시 불협화음이 끝없이 쏟아지는 또 다른 부부이다. 조합이 잘 된 음식으로 조합이 아슬아슬한 부부들의 아슬아슬한 저녁식사 시간이다.
달큼한 당근, 신선한 파프리카, 상큼한 파인애플과 신선한 토마토, 향긋한 깻잎과 잘 구워낸 고기가 한 껏 어우러져 그 맛을 통일시켜줄 수 있는 공장식 소스를 찍어 먹으면 그 누가 먹든, 그 맛에 길들여진 사람은 아주 맛있다고 느낄 것이다. 거기에 칠링 된 화이트 와인의 한 모금은 음식의 풍미를 더해주며 아마 나와 나의 남편 그리고 초대된 부부들은 "아~ 맛있다. 행복하다. 이게 행복이야~~"라고 느낄 것이다. 이는 신체가 그것에 적절하게 훈련되어 있으며 우리의 맛있음을 행복의 첫 기준으로 둘 수밖에 없는 자본주의의 얄팍한 행복감에 빠져들 것이다. 지극히 자본적 행복감에 젖어든 타성의 행복, 이러한 나의 미천한 혀의 감각적 행복감에 소설가 이유리는 "목소리 없음에 목소리를 주는 의지"로의 확장이 일침을 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