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 이주 한지 어느덧 2주가 지났다. 아파트 생활에 익숙한 나는 제주도의 고즈넉한 전원주택의 생활이 새롭고 신선하다. 때문에 나는 매일 아침 눈을 뜨는 게 즐겁다. 침실에서 나와 거실 커튼을 열면 커다란 창문이 있고 그 창문에 펼쳐진 초록이 가득한 풀잎과 나무가 그려준 풍경은 꽤감상적이며 심지어 낭만적이기도하다. 그리하여 우리 가족은 행복한 나날을 즐기고 있다. 아침에 일어난 나는 왠지 모르게 허세를 부리고 싶은 마음에 평소에 틀지 않던 재즈 음악을 켠다
그리고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손을 씻고 아이의 아침밥을 만든다. 하지만 음식이란 여간 수고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설거지가 지겨운 나는 어떻게 하면 최소한의 조리 도구로 많은 음식을 만들 수 있을까? 아.. 칼도 쓰기 싫은데... 아.. 국자도 쓰기 싫은데... 도마도 싫은데... 어떤 날은 두부같이 부드러운 음식은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대충 썰어버리기도 한다. 매일의 수고스러움을 조금이라도 덜기 위한 나만의 방식이라고 해야 할까? 여하튼, 나는 오늘 아침 아이를 위해 계란에 우유를 붓고 숭덩숭덩 치즈를 뜯어 보슬보슬 고소한 스크램블을 만들고, 향긋한 사과를 반듯하게 깎아주고, 버터를 듬뿍 바른 빵을 구웠다. 버터와 계란은 벌써 코끝을 배부르게 해 준다. 다행히도 아이는 아주 맛있게 먹어준다. 그 모든 수고스러움이 씻겨져 내려가는 건 나의 밥상을 향해 음식을 한 입 가득 입안에 넣고, 그것들을 삼키기도 전에 따봉을 터프하게 던져주는 아들의 칭찬이다. 어른인 엄마도 6살 작은 아이가 주는 칭찬은 콧노래를 절로 부르게 하고 나를 흥겹게 만들어준다.
아이도 집을 즐기는지, 매일 마당을 찾아온 까치를 좋아하고, 함께 유치원으로 등원하는 차 안의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귤 밭 풍경과 하늘의 구름 감상을 좋아하곤 한다. 구름을 가만히 들여다보면서 어떤 모양을 발견했는지 재잘거리며 즐겁게 유치원으로 간다. 나는 아주 큰소리로 “이든아 오늘 너에게 즐거운 일이 생길 거야. 오늘도 행복한 하루가 되길 바랄게 사랑해”라고 외쳐주면 아이는 나를 향해 햇살보다 밝은 미소로 생긋 웃어준다.
무엇이든, 아름다움이 생성되기 위해 수고스러움과 번잡스러움은 동전의 양면처럼 함께 찾아온다. 보기 좋은 떡이 먹기에도 좋다? 흠... 그건 살림살이를 번거롭게 만드는 일종의 갑질이 아닐까? 예쁘게 플레이팅을 하려면 접시를 많이 사용해야 하는 귀찮음이 있다.
식기 세척기에 휘리릭 돌리고 싶어도 자연 밥상으로 둔갑하기 좋은 나무 접시는 하나하나 닦아내야 한다. 향유하는 사람은 즐겁겠지만 노동자는 괴롭다. 발레를 감상하는 관객, 미술관의 전시된 작품을 관람하는 관객, 영화를 즐겁게 보는 객석의 관객들 그들 모두 아름다움을 감상하고 즐긴다. 그래 맞다. 그 괴로움이 적당한 보상으로 다가오면 괴로움 속 즐거움과 일종의 뿌듯함이 생겨난다. 프로 발레리나로서의 자부심. 큐레이터로의 성취감, 배우로서의 명예들을 얻게 될 경우 그들은 적당한 보상과 금전의 여유를 만끽하거나 주변의 존경을 받는 걸로 수고스러움이 즐거움이 된다.
하지만 그러한 궁합과 박자가 엇갈릴 경우 파도처럼 몰려오는 서러움은 당해낼 재간이 없다. 억울함을 어떻게 표출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노동의 댓가가 없는 어두운 그림자가 나의 삶에 드리워질 때, 그 그림자를 피할 수 없을 때 한탄한다. 그리고 혼자 말한다. 마치 우리들의 어머니들의 하소연처럼 말이다. 그들은 말한다 아무도 듣지 않는 목소리 없는 말들을 중얼중얼 뱉어내어 버리고 만다. 웅얼거림이 적은 사회를 지향한다. 그리고 나는 오늘도 그러한 웅얼거림이 내 속에서 아이의 가슴에서 남편의 마음에서 쏟아져 나올까 살금살금 면밀하게 살펴보도록 애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