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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명흔 Oct 20. 2023

07  손택수 시인의 '그해 여름의 방'


그해 여름의 방

손택수 시인

 

플라스틱 화분에 금이 갔다

비좁은 껍데기를

당장에라도 뛰쳐 나가고 싶어

뒤틀리고 비틀어진 뿌리들

흙을 움켜쥔 채 벽을 밀어보다가

숨이 막힐 만큼

몸을 움츠리고 한데

엉켜 있는 뿌리들

분을 갈아 줘야 하는데

온 몸에 쩍, 쩍 주름이 간

어머니가 말했다

이대로 그냥 견뎌요

화분 살 돈이 어딨어요

그해 여름이 다 가도록

몸을 뻑뻑하게 죄어오는

후끈거리는 방속에 틀어박혀

암수 한 몸 달팽이처럼

누이들과 사춘기를 막 지나고 있었다.

시집 <호랑이 발자국>. 25쪽​



 뿌리가 꽉 차  플라스틱 화분이 금 간 것을 보고 시인은 단칸방에서 누이들과 여름을 나던 그때를 떠올린다.  얼마나 덥고 숨이 막혔을까. 시를 읽고 있으니 시인의 상황이 그려지면서 "이대로 그냥 견뎌요" 라는 시 구절이 눈에 밟힌다. 깜냥은 깜냥끼리 통한다고 선풍기도 없던 반지하  단칸방 신혼 시절이  불쑥 떠올라 세월이 흘러 그 때에 비하면 아파트살림이라 살만 한데도 나도 모르게 속에서  더운 김이 올라와 후,하고 숨을 내 쉰다. 

 폭염과 폭우에  힘들었던 지난 여름은 고약한 갱년기 증상까지 합세해 그야말로 숨이 턱턱 막혔었다. 좀처럼 가지  않을 것 같은  여름도 가을에게 자리를 내 주고 나니  그 사이 나는 견디는 쪽으로 기울어져 깊어가는 가을을 고 있다. 삶에서 견뎌야 하는 순간은 늘 온다. 맘 먹은 대로 일이 안 될 때, 사람 사이가 원만하지 못할 때, 심신이 고단할 때,  힘들어지고 지난한  터널 속일지라도  "우리 이대로 가을을 견뎌 봐요!" 라는 말을 넌지시  건네고 싶은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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