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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명흔 Oct 26. 2023

08  정일근 시인의 '가을부근'

가을부근

        정일근 시인​

여름내 열어놓은 뒤란 창문을 닫으려니

열린 창틀에 거미 한 마리 집을 지어 살고 있었습니다

거미에게는 옥수수가 익어가고 호박잎이 무성한

뒤뜰 곁이 명당이었나 봅니다

아직 한낮의 햇살에 더위가 묻어나는 요즘

다른 곳으로 이사하는 일이나, 새집을 마련하는 일도

사람이나 거미나 힘든 때라는 생각이 들어

거미를 쫓아내고 창문을 닫으려다 그냥 돌아서고 맙니다

가을 바람이 불어오면 여름을 보낸 사람의 마음이 깊어지듯

미물에게도 가을은 예감으로 찾아와

저도 맞는 거처를 찾아 돌아갈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시집<누구도 마침표를 찍지 못한다>.81쪽의 詩



표지가 하늘빛인 이 시집은 가지고 있는 시집 중에서 오래 되어 갈잎처럼 낡아간다. 가을을 타는지  이맘 때가 되면 가을 시를 찾아 보곤 하는데 책갈피에 눌러 논 네 잎 클로버라도 발견한 듯  와락 반갑다.


정일근 시인의 시는 시편마다  배 있는 순하고 맑은 서정이 좋다.  차고 맑은 가을날과도 참 많이 닮아 다. 시인도 가을  타는 걸까. ​창틀에 걸린 거미집을 예사로이 보아 넘기지 않는다.  측은한 마음이 창틀의 거미에게로 가 닿아 그냥 못 본 채 돌아선다는 구절이  따뜻하게 전해온다.

측은지심이란 머리로 계산하고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나도 모르게  마음이 그리로 기울어지는 것일까. 순하디순한 시 구절이 좋아  풍경속 가을부근을 그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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