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있는 것은 다 숨 쉰다

노마드 비평 19. 『나는 옷이 아니에요』, 길지연

by nomadic critic

박경리 강의 노트

『문학을 지망하는 젊은이들에게』(현대문학, 1995)에는

“조약돌 하나 나무 한 그루도 연기자”라는 말이 나온다.

그리고 『나는 옷이 아니에요』(길지연, 밝은미래, 2015) 47쪽에는

삽화 하나가 ‘제대로’ 놓여 있다.

email 주소까지 sum.com인 명함 한 장,

바로 이 책의 주제다.


<동물 잡지>
생명과 숨
기자 이 연 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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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ail ToTo@sum.com


그렇다.

‘생명’이 있는 것은 다 ‘숨’을 쉰다.

그리고 그 숨은 너나없이 하나씩이다.

지구 최강 불사신 곰벌레(tardigrade)나

이미 멸종한 공룡이나.

그리고 사람 한 명과

밍크 한 마리에게도.


- 나는 옷이 아니에요.


밍크가 절규한다.

생물 다양성의 감소는

인류의 생존을 위협할 수 있다.

이것이

우리가 동물의 절규를 들어야 하는 까닭이다.


『나는 옷이 아니에요』에서

‘나’는 ‘밍크’지만,

이 책은 밍크를 1인칭으로 삼은 의인 동화가 아니다.

토끼 릴리, 유기견이었던 뚜리 이름부터 나오고,

34쪽에서야 비로소 불려지는 3학년 지효가 1인칭 화자다.

‘지구’나 작가 입장에서는

밍크, 토끼, 개, 사람이 똑같은 무게를 가진 생명체라는 인식을 방증한다.


밍크 사육장 아저씨가

“인간이 왜 대단한 줄 알아?

지구에 사는 동물 중에 가장 똑똑하고 힘이 세거든!”이라고 하자,

이연희 기자는

“인간이 대단한 건

모든 생명을 사랑할 줄 알기 때문이에요.”라며 맞선다.

지효가 보기에

기자 언니는 용감했지만,

당당한 표정이랑은 다르게 손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고 한다.


이처럼 용기란,

두려움이 없는 게 아니라

두려움을 이기는 마음이다.

그리고 용기야말로

생명을 지킬 수 있는 힘이다.

이연희 기자는

“털옷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아이들도 알 권리가 있다.”는 말로

지효 반 담임 선생님을 설득했고,

선생님도 학교에서 쫓겨날 위험을 무릅쓰고

아이들에게 동물 보호 관련 영상을 보여 주는 걸 허락했다.


무릇 작가란

시대를 읽는 사람이고,

독자에게 사회 문제를 환기시키는 역할을 맡는다.

『나는 옷이 아니에요』는

2015년 제35회 이주홍 문학상 수상작이지만,

길지연 작가로서는

유행에 맞춤한 결과물이 아니다.


1994년 문화일보에 「통일 모자」가 당선되어 등단한 작가는,

2000년 첫 창작동화집 『또 싸울 건데 뭘』에 실린 「다 가질 거야」에서

시궁쥐를 키우고 싶어 하는 영미로부터 생명에 대한 물음을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동물 보호에 한결같은 목소리를 내고 있으므로,

이 책도 작가가 지향하는 일관된 철학,

‘생명 존엄’이라는 가치관의 일직선상에 놓인 한 편일 뿐이다.


작가는

『삼각형에 갇힌 유리새』(세상모든책, 2004)와

『엄마에게는 괴물 나에게는 선물』(국민서관, 2005)에서

드러내고 환경 보호와 유기견에 대해 말하더니,

심지어 기획동화 시리즈에서조차 빵조각을 흘려놓았다.

표지에 ‘마음이 자라는 가치동화 용기편’으로 제시되어 있는

『모나의 용기 지팡이』(을파소, 2007)와

‘가치동화 포용력’을 내세우는

『동생 따윈 필요 없어』(기댄돌, 2009)에는 각각


- 은비는 내가 다섯 살 때부터 함께 살았다.

길에 버려진 아기고양이를 아빠가 데리고 온 것이다.


- 유치원 다닐 때다.

눈이 펄펄 내리던 날

엄마가 새하얀 털 뭉치 덩어리를 들고 들어왔다. …

알고 보니 길에 버려진 고양이를 주워 온 거였다.

그 고양이가 햇살이다.


라며 유기묘를 등장시켰다.


뿐만 아니라,

『엄마에게는 괴물 나에게는 선물』에서는

마레가 엄마 몰래 유기견을 키우려고

아빠 차에 숨길 때 오리털 점퍼를 깔아 주었는데,

『나는 옷이 아니에요』에서

지효는

겨울 추위를 타지만

오리털 점퍼를 기증받는 가게에 갖다 주기로 결정한다.

작가의 시선이

유기 동물에게서

모피를 위해 사육되는 동물에게로 확장될 뿐 아니라,

어린이 주인공도 더 적극적으로 행동한다.


바야흐로 공감이 필요한 시대이다.

소통은

공감의 필요충분조건이고,

지효는 동물을 많이 키워 봐서 공감 능력이 있다.

그래서 밍크의 절규를 알아듣고,

구조된 아기 밍크와 대화도 한다.


“약속할게.

동물을 잡아서 만든 털옷은 절대 안 입을게.

앞으로 너희를 보호하는 일에 앞장설게.”


책 한 권이

한 사람의 생각을 바꿀 수 있다면

정말 대단한 일이겠다.

하기는

한 나라의 역사를 바꾸는 일도

한 사람으로부터 비롯된 적이 있다.

1956년 미국,

흑인 로사 팍스가

버스에서 백인에게 자리를 비켜 주지 않은 일이

미국 인종차별법에 종지부를 찍은 것처럼.


물론 『나는 옷이 아니에요』가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해서

하루아침에 아이들을 채식주의자로 탈바꿈시키지는 않을 것이다.

지효는

“그동안 예슬이도

동물 털옷에 대해서는 자세히 몰랐으니까

그런 옷을 입은 게 엄청 큰 잘못은 아니다.”라고 이해하면서,

예슬이가 “생명과 숨” 잡지에서

아기 여우 사진 옆에 여우 털 코트 사진이 나란히 실린 기사를 찾아본 것을 알고,

“예슬이도 이제 동물 털옷을 안 입겠지.”라고 믿고 싶어 한다.

예슬이는

엄마가 모피 디자이너여서

삼백만 원짜리 아기 여우 코트를 입고 다니면서 자랑하던 아이다.


아는 것이 먼저다.

『나는 옷이 아니에요』 독자들도

예슬이처럼 지효처럼 지효 아버지처럼

알게 되고, 선택할 수 있을 것이다.

지효는

동생처럼 여기는 토끼가 실종되어서 찾으러 다니다가

밍크 사육장을 알게 되었고,

지효 아버지는

대학생 때 등록금을 벌려고 거위 털 뽑는 공장에서 일하다가

털옷을 싫어하게 되었다.


글은 힘이 세다.

그리고 아동문학은

시사 고발이 아니라

희망을 말하는 문학이어야 한다.

그리고 길지연은

어린이의 힘을 믿는 작가다.


『나는 옷이 아니에요』에서 작가는

채식 종용이나 비건 패션

(Vegan Fashion 패션 채식주의 운동.

동물성 제품을 먹지 않는 식습관과 비슷하게

진짜 동물의 가죽이나 털을 사용하지 않는 것을 추구하는 패션)을

강요하는 게 아니다.

모든 아이들이

한겨울에 오리털 점퍼 대신

신소재 솜 겨울옷을 입기 바랄 만큼 순진하지도 않다.

그저 오리털 점퍼를 입을 때,

모피 옷을 고르려는 순간에,

어느 동물의 생명이 희생되었는지

한번쯤 생각해 보자는 의도이다.


생각이 바뀌면

행동이 바뀔 수 있는 까닭이다.

밍크 코트 한 벌이 만들어지려면

밍크가 200마리 필요한 것,

그래서 밍크 200마리가 사육되거나 덫에 걸려야 한다는 것,

다시 말하자면 한 사람이 밍크 코트 한 벌을 안 입으면

200마리 밍크가 살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 주고 싶은 마음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옷이 아니에요』 설정과 달리

우리나라에는 밍크 사육장이 없다.

그러나 어디 밍크뿐이랴.

2015년 EBS 〈하나뿐인 지구〉에서는

「강아지 공장을 아시나요?」와 「강아지 공장에 갑니다」를 방영했다.

일단은 애완동물 가게에서 사지 않는 것이

강아지 공장을 양산하지 않는 셈이고,

키우고 싶다면

유기 동물 입양을 고려하는 게 좋겠다.

『내 동생 못 봤어요?』(길지연, 주니어김영사, 2015)에서처럼

가족 식탁에 의자를 마련할 의지가 아니라면,

반려동물이라는 미명으로

함부로 기르기 시작하는 일을 삼가야겠다.

사람에게나 동물에게나 생

명은 하나뿐이므로.


『토끼도 저만큼 착한 풀을 뜯어 먹고 산다』(이현주, 산하, 2005)에서

조아조아 할아버지는

올무에 걸린 산토끼의 매듭을 풀어 주고 맑은 눈동자를 보며

짐승들 눈이 맑고 착한 것은 욕심이 없어서라고 한다.

그때 바람이

“사람들은 그토록 착한 눈을 한 짐승을 어떻게 잡아먹을 수 있어요?”라고 묻자,

조아조아 할아버지가 대답한다.


“토끼도 저만큼 착한 풀을 뜯어 먹고 산다.”


그러나 토끼에게 풀은 생존의 문제다.

호랑이나 늑대에게 사슴이나 영양처럼.

하지만 사람에게 모피 옷은

생존이 아니라 선택의 문제다.


어린 독자들은

예슬이처럼,

불고기랑 삼겹살이랑 치킨은 먹으면서

왜 모피 옷은 거부해야 하는지 의문을 가질 수 있다.

그래서 작가는

지효와 지효 친구 다경이의 목소리로

조곤조곤 알려 준다.


“우리가 털옷을 입기 위해 동물들이 아파야 한다면……, 그건 싫어요.”


“모피 코트는 굳이 안 입어도 되는 거잖아.”


Earth Hour.

지구를 위한 한 시간.

해마다 딱 한 시간,

지구촌 불끄기 행사가 있다.

『나는 옷이 아니에요』를 읽으면

지구를 위해서 딱 한 가지,

모피 옷 안 입기만이라도 실천하고 싶어진다!



- 출처: 《어린이책이야기》 2016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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