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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지안 Mar 21. 2023

내 아이 돌잔치에 부모님께 드리는 편지

편지 대신 써드립니다.

오은영 <화해>에 이런 챕터가 있다. '왜 부모는 잘해준 것만 기억하고, 아이는 못해준 것만 기억할까?' 자식이 부모에게 상처받았던 기억을 꺼내면, 부모는 기억하지 못하거나 전혀 다른 방식으로 기억한다고 한다. 부모가 말과 행동의 의도인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을 기억한다면, 자식은 표현 방식인 상처를 마음에 담아두기 때문이란다.


달리 해석해 보면 자식은 부모로부터 받은 사랑은 당연하고, 상처는 당연하지 않으니 상처만 선명하게 각인되어 마음에 남는 것이 아닐까. 자식을 사랑한다고 생각하며 기르는데, 내 아이가 성년이 되어 나에게 ‘당신이 내게 준 상처가 이만큼 아픕니다.’라고 이야기하는 것만큼 부모로서 두려운 순간이 있을까.


헤르만헤세 <싯다르타>, 싯다르타는 혈육이 있었다. 세상의 온갖 도를 깨달은 구도자 싯다르타도 아들을 만나자 그간 구도하고 수행한 것이 무의미해진다. 위대한 깨달음을 얻은 현자도 자기 자식 앞에서는 어찌할 수 없는 욕망의 집합체일 뿐. 고매한 인품의 구도자는 철부지 아들 앞에서 그 관계가 굴욕적일 정도로 모든 것을 내어준다. 그럼에도 아들은 원망만 남겨놓고 아비를 떠나게 된다.


나의 의뢰인 정인(가명)은 유년시절 아버지에게 단 한 번도 혼난 적이 없다고 했다. 대신 사소한 일로도 엄하게 다스리는 아버지의 성난 목소리와 공포에 사로잡힌 오빠의 상황을 상상하며 이불속에서 내내 울었던 기억이 남아있었다. 오빠는 성인이 되어서도 아버지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하며 일거수일투족을 아버지의 기준에 맞춰 만족시켜 드리길 바라고, 그런 자신감 없는 아들의 모습이 늘 못 미더운 서글픈 부자 관계. 그 속에서 ‘이제 그만 좀 하시라며’ 아버지의 신경을 퍽 건든 딸 정인은 미처 화해하지 못하고 친정을 떠나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다.


아버지가 오빠를 혼내실 때마다 이불속의 어린 나는 얼마나 무서웠는지, 직접 혼나지 않았다고 해서 아버지께 받은 것이 사랑뿐이라는 것은 부모의 지나친 착각일 뿐이라고. 그렇게 내면에 있는 울음을 내고서도 자신이 암 투병 중인 아버지께 몹쓸 불효를 저지른 것은 아닌지. 사과를 해야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 나는 과연 내 자식을 키우고 나서 그런 원망을 듣지 않을 자신이 있는 부모인지. 복잡다단한 고민을 머릿속에 가득 채운 채 정인의 아들 하준(가명)은 돌을 맞았다.


양가 어른의 병환에 큰 잔치는 하지 못하고, 가족들이 모여 소담하게 차린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편지를 읽어 드리고 싶다 했다. 손주 하준의 돌을 기념하여 정인의 부모님께 드리는 감사편지를. 정인의 사정을 상상하고 헤아리며 편지를 대신 써본다.



자식을 낳아보아야 부모를 이해한다는 말은 어쩌면 자식을 기르는 일에 기쁨보다 고통이 많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일 같아요. 고통으로 말미암아 산도를 지나 태어난 아이를 지금껏 굳세고 통통하게 키워내는 하루하루가 고행인 것을요. 그렇지만 찰나의 기쁨으로 그 모든 어려움을 이겨내고 일어섭니다.

부모는 사랑한 기억만 남고 자식은 부모에게 상처받은 기억만 남아 마음이 통하지 못한 관계를 생각하면 가슴이 철렁 무너집니다. 큰 강을 사이에 두고 서로가 말하는 목소리를 제대로 듣지 못하는 그런 외로운 부모 자식들의 이야기를요.

때때로 저희가 부모님께 그런 상처를 드러내며 받은 사랑까지 부정하던 때는 언제였나. 작고 여리고 귀한 이 아기가 자라 우리에게 그런 서슬 퍼런 날을 드러내면 어쩌나. 그럴 때 무너지지 않고 아이를 다시 안아줄 수 있는 힘이 내게 과연 남아 있을까.

이제 태어나 돌이 된 아이를 보며 저의 유년과 부모님들 나이쯤이 된 미래를 함께 생각해 봅니다.

하준이를 어렵게 가지고, 낳고, 눈짓 몸짓 하나에도 마음에 크나큰 사랑이 번졌어요. 제자식 자랑은 팔불출이라 어디 나서서 쉽게 못하는 이야기도 부모님들께는 체면치레 없이 마음껏 자랑하고 확인받을 수 있어서 참 좋았습니다. 마치 하준이가 저희를 대신해서 부모님들께 효도를 하는 착각에 빠집니다.

부모 외에,
부모만큼,
어쩌면 그보다 더,
이 아이를 흠뻑 사랑하실 존재들은 하준이의 할아버지 할머니들 밖에 없으니까요.

저희가 사랑해야 마땅할 하준이를, 곁에서 깊이 사랑하며 함께 길러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 사랑으로 정인-재현(가명)을 길러주셨을 젊은 시절 부모님들께도 감사한 마음을 보냅니다.

지금처럼 건강하고 사랑스러운 아이로 하준이 잘 기르며 보답하겠습니다.

기쁜 날에, 정인 재현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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