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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보수는 자존심이 없다

by 감성소년


지난 윤석열 대통령은 헌법 재판소 '탄핵심판 4차 변론 기일'에 출석하여 했던 발언 중에 아래와 같은 말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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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계엄 선포 이후 국회의원을 체포하란 지시한 적이 없었다'. 계엄포고령을 실시할 계획도 없었다





이 말은 대한민국 보수의 실체를 여실히 드러내주고 있다. 사실 윤석열뿐 아니라 대한민국에서 보수란 존재들은 책임감과 자존심이 없는 존재들이었다. 초대 대통령이었던 이승만부터 시작해서 박정희, 전두환에 이르러 단 한 번도 책임감 있는 보수 대통령은 존재하지 않았다.




1. 북진통일을 외치며 가장 먼저 피난 갔던 이승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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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은 해방 이후, 자신의 낮은 정치적 입지를 회복하기 위해서 친일 반공 세력들과 결탁하게 된다. 지금의 태극기 부대의 후신이라 할 수 있는 '서북청년단'을 적극적으로 후원했으며, 여운형과 김규식 등이 이끄는 좌우합작운동을 적극적으로 방해하고 봉쇄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맥아더에게 적극적으로 남한 내에 좌익세력들은 공산주의자라고 매도하는데 성공했다. 그렇게 한 명 한 명, 자신의 정적을 제거하면서 대통령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그는 대통령 취임 직후부터 군사적인 준비는 전혀 되지 않은 상태에서 북진통일을 적극적으로 주장한다. 그런 와중에 여순 반란과 4.3항쟁 등에 대해 공권력을 활용하여 과격하게 진압함으로써 민심을 잃게 되었다. 그리고 625전쟁이 시작되었다.



북진통일을 제일 먼저 외치던 이승만은 가장 먼저 피난한 '제1호 피난민'이 되었다. 그는 경호원 2명과 자신의 와이프, 그리고 자기 자신만 데리고 대전까지 가게 되었다. 그러자 서울은 행정공백 상태가 되었고 국무령 및 국회의원 등 여러 주요 인사들이 1분 1초가 급한 상황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상태고 되게 된다.





%EB%8B%A4%EC%9A%B4%EB%A1%9C%EB%93%9C_(3).jpg?type=w966 보도연맹



이후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게 되었고, 한미 연합군은 북진을 하게 되었다. 그 와중에도 이승만은 오로지 자신의 불안한 정치적 입지를 다지게 위해서 반공정책'에 몰두한다. '보도연맹'에 가입한 인사들은 대거 학살한 것이다. 북한에 조금이라도 협조한 사람들 모두 죽인 사건인데.. 진작 웃긴 것은 이 사건에서 학살당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폭파한 한강 대교로 인해서 사람들이 피난하는데 실패했다는 사실은 일도 고려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오로지 권력을 위해서 살았다.




2. 남로당 출신인 박정희, 자신의 목숨을 구걸하기 위해서 동료를 죽이다.


dkwnA9HUu7mSInwQHGkxTgqihKzbEBBOWU6FdkuSSPXPlgEWTuBJ5joXSwt0-Q3-yWVSbA0lwe-A.jpg?type=w966 박상희



박정희의 형 박상희는 해방 이후 여운형의 조선 건국동맹에 참여했던 좌익인사였다. 그런 그가 대구 10월 항쟁에 연루되어 죽게 되자, 박정희는 남로당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리고 10월 여순사건이 발생하였고 그 관련 자들을 색출하는 과정에서 박정희가 체포되었다. 그는 그 주변의 남로당 인사들에 대한 사실은 자백하는 대신에 목숨을 구제하였다. 그렇게 그는 다시 군인으로 복직하게 되었고 625전쟁에 소장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이후 1961년 10.26일 군사정변에서 그는 다시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다. 이후 군사혁명위원회로서 군정을 총괄하였고, 이 기구는 이후 '국가재건최고회의'로 개편하였다. 그는 이후 공화당을 창설하였고, 1963년 윤보선과의 선거에서 승리하여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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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적 민주주주의'를 슬로건으로 내세웠던 박정희. 하지만 이후 65년 한일 수교를 맺음으로써 그의 슬로건을 깨지게 된다. 왜냐하면 일본에 대해서 식민 지배에 대한 사과는 일체 없이 무상 3억, 유상 2억의 원조 지원을 받게 된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유상 3억이 10년에 걸쳐서 이뤄진 것이란 점과 동시에 기존에 일제강점기 징병, 징용 등으로 인해서 피해 받았던 사람들의 개인 청구권을 소멸한다는 조건하에 받았기 때문이다. 이전 장면 정권이 23억을 요구했었고, 이승만 정권이 그냥 협상 자체를 거부했다는 자체만으로도 박정희의 한일협정은 얼마나 치욕스러운 것인지 알 수 있었다. 당대 박정희의 경우 정치적 안정이 필요했고 그런 과정에서 미국의 인정이 필요했다. 과거부터 미국은 한미일 안보체제를 중시했었기 때문에 박정희로서 미국의 인정을 받기 위해서는 이를 용인할 수밖에 없었다고 해도, 사과가 아닌 '독립 축하금'이란 개념으로 원조를 받은 건 치욕스러운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로 인해서 '민족적 민주주의'의 사망이란 슬로건을 내세운 6.3시위가 일어나게 된다. 이에 대한 박정희의 대답은 '계엄령'이었다. 어쨌든 박정희는 위의 자금과 그리고 결정적으로 베트남 파병에 따른 '브라운 각서'에 입각한 미국의 지원하에 경제 개발에 성공하였다. 어쨌든 간 그는 경제 발전을 이룩하겠다는 그의 취임 공략은 지켰던 것이다. 하지만 다른 것은 약속하지 못한다.


그는 1979년 '마지막으로 한 번!'이란 말과 함게 3선 개헌을 한다. 여기에 대해서 반대했던 김대중 민주당 후보는 이번에 박정희가 재임하게 되면 영구 집권을 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고 이는 실현되게 된다. 박정희는 3선에 성공한 이후 1972년 유신헌법을 발표한다. 유신헌법의 큰 골자는 아래와 같다.







1. 간선제(통일주체 국민회의)
2. 긴급조치권(헌법 정지)
3. 국회의원 임명권(1/3)
4. 의회 해산권



그냥 평생 대통령 하겠다는 뜻이었다. 국민주권 하의 국민을 대표하는 대통령이 아니라 왕이 되겠다는 선언이었다. 유신헌법 발표와 동시에 그는 계엄령을 내려 이에 반대하는 국민들을 탄압했고, 야당 대표였던 김대중을 납치하여 살해하고자 하였다. 말 그대로 그냥 왕이었다. 일명 유신헌법 이후의 시기(겨울 공화국) 그는 많은 민중 투쟁을 직면하게 되었는데, 그것을 폭압적으로 진압하는데 바빴다. 그리고 그 와중에 제2차 오일쇼크가 일어나게 되었다.



2차 오일쇼크의 결과, 한국의 수많은 기업들이 도산하게 된다. 박정희는 이에 대한 대책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과정에서 YH 무역이 도산하게 되었고, 임금을 받지 못한 여공들이 이에 대해 항의 시위를 하게 되자, 박정희는 강제해산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여공들이 야당 청사에 도움을 요청하게 되었는데, 진압 경찰들이 이 들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야당 청사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것을 본 김영삼 민주당 총재는 외신기자들을 불러 박정희의 독재를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하였다. 이에 김영삼 총재가 제명되자, 부산, 마산에서 박정희의 독재에 규탄하는 시위가 일어난다. 이에 대해 박정희는 유혈 진압을 계획하였고, 그것을 반대했던 김재규에 의해 총살된다.



박정희는 공과 과가 명확하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그의 삶의 여정들은 배신의 연속이었고 무책임의 연속이었던 것이다. 그는 민족을 배신한 만주 사관학교 생도였고, 자신의 동료를 배신한 남로당원이었으며, 민족을 배신한 한일협정을 체결했고, 동시에 헌정질서를 이반한 유신헌법을 발표한다.




3. 처음부터 존재 자체가 무책임의 연속이었던 전두환



전두환은 애초에 존재 자체가 반헌법적인 인물이다. 그는 1212반란 과정에서 최전방 부대인 2공수 부대를 끌어들인다. 그리고 쿠데타에 성공한다. 만약 그가 2공수를 끌어들인 사이 김일성이 남침했다면, 당시 군사력으로서 장담할 수 없는 국가 위기가 야기되었을 것이다. 오로지 자신의 탐욕을 위해서 국가의 안보따윈 저버린 무책임한 행위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후 광주에 공수부대를 보내어 광주에 민중들을 학살한다. 광주는 서울의 봄 당시 가장 평화적으로 시위했고, 이미 전두환이 광주에 공수부대를 보내기 전에 시위가 종결된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정치적인 이유로 광주에 공수부대를 보내어 무차별적으로 시민들을 학살했다. 권력자로서 국민을 보호하는 것을 우선으로하는 군인으로서 책임감이 일도 없는 행태였다.




4. 윤석열의 존재



윤석열 또한 존재 자체가 반헌법적인 무책임한 존재이다. 대선 토론 과정에서부터 그는 '전두환은 12.12쿠데타와 5.18학살 말고는 훌륭한 사람이다', '주 150시간을 하고 확 쉬게 해야 한다.' 라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였다. 그리고 행정 정부 구성에 대한 질문에 대해서 '내가 대통령이 되면 거기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다'라 말할 정도로 아무런 생각 없이 된 사람이다. 준비 없이 된 사람이다. 역시 그는 대통령이 된 이후에도 아무런 생각 없이 정치를 하였다. 그가 했던 주요 정치 이력들을 보면 아래와 같다.







1. 야당 대표 죽이기


2. 일본 후쿠시마 오염수에 대해 묵인


3. 홍범도 동상 철수


4. 일본의 독도 침탈 야욕에 대해 묵인, 더 나아가 용인하는 행보들


5. 친일적 뉴라이트 인사들 대거 등용


6. 일본의 라인 사태 묵인


7. 갈 필요 없던 'NATO'회의 가서 러시아의 반감을 일부러 삼


8. 굳이 반공 이야기함으로써 한국의 1교역국인 중국으로부터 반감삼


9. 출근 늦음


10. 이태원 참사, 김건희 양평 고속도로 의혹


11. 계엄령으로 내, 외환 조장하여 국망으로 가려 함


12. 명태균 게이트 등으로 국민의 힘이란 거대 정당의 인사 시스템을 망쳐놓음






미리 말하자면 난 철저한 반공주의자이다. 북한을 싫어하고(원한다면 김일성 개새끼 백번 넘게 할 수 있다.) 공산주의 체제 자체를 싫어한다. 하지만 냉정하게 봤을 때, 굳이 한국에 우호적인 러시아를 적으로 돌릴 필요가 있었던 것일까? 그리고 한국에 제1교역국인 중국에 대해서 적대적인 정책을 취할 필요가 있었을까? 반박하는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다. 우리가 제1교역국인 중국을 져버리고 대중 무역수지가 낮아질 때, 그 틈을 이용하여 일본이 대중 무역 수지를 높였고, 동시에 경제 성장을 이루고 있다. 왜 우리의 실리를 져버리는 외교를 택하는가.





%EB%8B%A4%EC%9A%B4%EB%A1%9C%EB%93%9C_(2).jpg?type=w966 라인 사태는 명백한 한 국가의 경제적 주권 침탈이다.



그는 애초부터 책임감 없는 인사였고, 오로지 권력만 탐내는 인사였다. 그는 초기 용산으로 대통령 집무실을 이전한다는 것에 대해 여론 조사 결과가 반대가 높게 나오자 '나는 여론조사를 의식하지 않는다'라 말할 정도로 그냥 안하무인인 인간이었다. 집권 초기부터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한 인사였으며 오로지 권력을 어떻게 오랫동안 누릴까만 생각한 인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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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무책임한 인사의 시작도 귀결도 '찌질함과 무책임'으로 결론난다는 것이 참으로 한심하다.



그리고 여전히 이 찌질한 인사를 지지한다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 슬프다.



%EB%8B%A4%EC%9A%B4%EB%A1%9C%EB%93%9C_(4).jpg?type=w966 서부지법 폭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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