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과 체력 사이에서, 에필로그
『오디세이아』에서 내게 가장 뭉클한 부분은 오디세우스가 아내 페넬로페와 다시 만나는 장면이다. 이제 두 사람이 여생을 알콩달콩 보낼 일만 남아, 얼마나 안도했는지 모른다. 꽃다운 시절 결혼해서 갓난아이를 낳자마자 트로이 전쟁에 불려 가고 이십 년간 헤어져 있었으니 이들의 해후는 갱년기 나이쯤 될 것이다. 나이를 봐서라도 고향 이타카에서 노년까지 평탄히 살림을 꾸려가야 했다.
그런데 만일 누군가가 오디세우스의 방랑벽을 부추겨 또 다른 항해를 떠나게 한다면? 아내 페넬로페는 얼마나 슬프고 화가 날까? 그녀의 성품이 아무리 차분하고 선량하다 하더라도 이야기를 꺼낸 그 동료를 향해 펄쩍 뛰며 분노할 것이다. 오늘날 같으면 이혼 사유에 해당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런 일이 벌어져 버렸다. 다행히 그녀의 생애 가운데는 아니지만.
사람들은 훌륭한 영웅을 가만 놔둘 수는 없나 보다. 그를 시간 여행으로 불러내어 그 성품에 걸맞는 제2의 모험을 출발시켰다. 13세기에 단테가 바람을 잡고, 바통을 이어 19세기에 알프레드 테니슨이 작전을 세워서.
배를 저어라, 줄지어 앉아서
소리치는 파도 이랑 만들며 가자. 나의 목표는
내가 죽을 때까지, 석양 저 너머로,
모든 서녘별이 자맥질하는 저 너머로 항해하는 것*
오디세우스가 제2의 항해를 떠나기에 앞서 결기를 다지는 시인의 문장은 대대로 후세의 사랑을 받아왔다. 졸업식 연설에서 혹은 인생 2막을 서술하는 여러 책에서 인용되며. 하지만 실제로 오디세우스가 떠난다고 생각하면 나는 아내 페넬로페의 심정이 되어 “아, 안 돼”가 튀어나온다.
그런데 『폐경의 역사』 서두에 인용된 테니슨의 시구(詩句)에서는 반대로 오디세우스 자신의 심정이 되었다. 오십 대의 모험을 마쳤으나 다시 떠나고 싶어 두근거리는 마음이.
기나긴 날이 저문다. 느린 달이 차오른다. 깊은 바다는 온갖 목소리로 신음한다.
오시게 벗들이여. 새로운 세상을 찾기에 그리 늦지 않았다네. **
젊은 날과 오십 세까지의 기나긴 날(낮)이 저물었으나 백세 시대 2막의 빛나는 삶이 느린 달처럼 차오르고 있다. 인생 후반의 깊은 바다가 험난한 목소리를 내고 있지만 충분히 새로운 도전을 할 수 있다. 그리 늦지 않았으니 나도….
아니나 다를까 우리 집에도 걱정하며 만류하는, 페넬로페 역을 하는 두 사람이 있다. 아들과 남편.
오십 대 초반 혹독한 갱년기 증상이 다스려진 후 이런저런 것을 부지런히 배우러 다닐 때 나름 나 자신이 뿌듯했다. 열심히 사는 모습이 자녀들에게도 본이 되겠거니 했는데 웬걸, 어느 날 막내가 저녁식탁에서 심각하게 이야기를 꺼냈다. 당시에 아들은 달리기를 시작해서 마라톤까지 뛰던 때다.
“엄마는 밑천도 하나 없이….”
“무슨 밑천?”
“체력도 없으면서 뭘 그리 배우러 다니세요? 운동을 좀 하셔야지~”
“운동하잖아? 수영도 하고.”
“그 쬐끔요? 근력운동도 하고 몸 좀 만드셔야 해요.”
둘째는 나의 약점을 귀신같이 알고 있었다. 얼마 전까지도 절인 배추였던 엄마가 뭘 배운다고 방방거리며 다니는 것이 위태롭게 보였나 보다. 그때 아들의 조언을 진지하게 받았어야 했다. 오십 대가 지난 지금도 육신의 힘이 별로 나아지지 않았는데, 그동안 노화가 진행되어 오히려 마이너스 수지타산일 수도 있다.
비록 잃은 것이 많지만, 아직 남은 것도 많다.
옛날에 천지를 뒤흔들었던 힘은
이제 없지만, 지금의 우리도, 우리인 것이다. *
시인의 표현처럼 이제부터라도 몸을 만들어서 시작을 하면 되지 않을까? 하는데.
현실주의자인 남편도 나의 다채로운 갈망을 위태롭게 본다. 어느 때는 요동치는 바닷물을 보여주며 만류하고, 어느 때는 환경이 가지치기해 주기를 바라며 가만히 기다린다. 침대보다는 말(馬) 위에서 죽고 싶다던 몽테뉴를 두둔했다가 혼쭐이 났다. 그렇게 객사(客死)를 바라면 어떡하느냐고.
그러나 다행히 나도 오디세우스처럼 ‘오시게 벗들이여’ 하고 부를 수 있는 우군이 있다. 늘 마음이 통하며 응원을 아끼지 않는 글벗들.
“지금이야, 무엇이든 괜찮아” ***
“꿈을 펼치기 위한 시간은 지금이다. 나중에가 아니라.” ****
"돌이켜 보면 진짜 좋은 때란 마음에 파동이 일어난 바로 그 순간이었다" *****
테니슨이 읊었듯 내 경험의 너머로 여행해 보지 못한 세계가 반짝이지만 그 가장자리는 다가갈수록 사라져 버리는 것 같다. 갱년기의 낯선 멜로디를 감당한 후(後) 또 다른 호기심이 꿈틀거리는 걸 보면. ******
현재 새로운 항해를 가로막는 풍랑은 내 몸의 형편이다. 홀로 여행도 해보고 싶고 흥미로운 운동도 시작하고 싶지만 어지러움 등이 주저하게 만든다. 건강의 눈치를 보며 가야 하리라.
그러니 나의 체력을 밑변으로 내 꿈과 식구들의 염려라는 두 선분이 각을 세우고 있다. 이 절묘한 삼각함수를 어떻게 풀어가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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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니슨 시선』 앨프리드 테니슨 지음 윤명옥 옮김, 지식을 만드는 지식 2020
**『폐경의 역사: 과학에서 의미까지』 수전 P. 매턴 지음 조미현 옮김, 에코리브르 2020년
***『지금이야, 무엇이든 괜찮아』 김정희 KONG 2021
****『나는 공부하는 엄마다』 전윤희 지음, 이지북 2021년
*****『부사가 없는 삶은 없다』 소위 지음, 채륜서, 2025년
******『중년의 위기를 맞은 로미오와 줄리엣』브리기테 히로니무스 지음, 유영미 옮김, 나무생각 2006년
# 대문의 그림: Carlo Caraceni <St. Cecilia & the Angel> 1610, oil on canvas 로마 바르베리니 미술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