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의 힘, 김기란
큰일 났다. 백지에 깜빡이는 커서를 보며 막막했던 적은 처음이다. 자소서를 쓸 때도 이렇게까지 힘들진 않았는데,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보자. 어영부영 시간을 보내다가 4학년이 된 춘향은 1학기에 논문을 쓰라는 학과 공지를 보았다. 공지가 올라왔을 때까지만 해도 평온했다.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으니까 천천히 주제를 생각해 보자 했지만, 여러 바쁜 일에 휩쓸리다 보니 논문은 점점 후순위로 밀려났다. 그렇게 마감일을 미룰 때까지 미루다 2학기가 되었다. 개강을 해서 빈 벤치에 앉아 김밥을 먹다가 문득 위기감이 몰려왔다. 이제 진짜 논문을 써야 한다....... 사실 졸업논문이란 것이 그렇지 않나. 학사에서 전문 논문 수준까진 기대하지도 않으니 마감이나 잘하라는 글. 하지만 그렇다고 너무 막 썼다가 심사에서 탈락하면 졸업을 못 하게 되므로 어느 정도는 잘 써야 하는 글. 쓰면 통과될 것이란 사실은 알고 있으나 그럼에도 묘한 부담을 가지게 된다. 그래도 4년 동안 배운 내용을 바탕으로 마지막 글을 쓰는 건데 응당 잘 써야 하지 않을까 하는 사명감도 생긴다. 그래서 이 책을 읽기로 결심했다. 책을 읽다 보면 그래도 백지를 채울 수 있는 용기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아서. 결과부터 말하자면, <논문의 힘>을 선택한 것은 아주 탁월한 선택이었다.
글쓰기 수업은 대학교 필수 교양 과목 중 하나이다. 그러나 글쓰기 수업을 들으며, 과연 내가 글을 잘 쓰게 되었나 되물으면 그건 아니다. 1학년 때 듣는 교양에서는 과제하는 법, 자료를 찾는 법과 같은 기초적인 정보를 제공한다. 물론 이를 배우는 과정은 필요하다. 토대를 다지는 것부터 글을 쓰는 여정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글을 잘 쓰려면 기초를 가지고 꾸준한 집필의 과정을 거쳐 공사를 다져야 한다. 그런데 그게 쉽지 않다. 대부분은 논문을 쓸 때쯤의 연차가 쌓이게 될 때까지 그때 그 수준에 머물게 된다. 과제를 위한 짧은 글만 작성하며 현재에 안주하고 연습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다 논문을 써야 한다. 논리의 구조를 갖춘 전문적이고 긴 글을 준비가 부족한 채로 시작해야 한다. 결국 촉박한 마감의 늪에 빠져 눈앞의 백지를 채우기에 급급해지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작성해 볼 대학 시절의 논문은, 그렇게 마감되고 폐기된다. <논문의 힘>을 작성한 김기란 저자 또한 그러한 문제를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현직 교수로 활동하며, 그리고 그가 직접 논문을 작성하고 첨삭하며 이미 논문 쓰기에 관한 많은 고민을 안고 왔다. 축적된 경험이 잘 쓴 논문을 대량 생산하는 법을 알려주진 않았지만, 망한 논문의 길로 가지 않는 법은 알려주었다. <논문의 힘>에는 그런 팁이 담겨 있다. 잘못된 방향을 잡지 않기 위해 우리가 고려해야 할 사항은 무엇인지, 당신이 논문을 쓰기 위해 골머리를 안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꼬집는다. 홀린 듯이 책을 읽다 보니 주제가 정해졌고, 계획서를 작성했으며 이제는 본문 작성을 앞두고 있다. 어떻게 그게 가능했는지 궁금해지지 않는가.
나의 경험을 토대로 설명하자면, 춘향은 논문을 작성하기에 앞서 주제를 선정하는 게 가장 막막했다. 빨리 주제를 선정해서 빨리 글을 마감해야 할 것 같은데, 아직 주제도 선정하지 못해 신청서 마감일이 점점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걱정을 눈치챈 듯 저자는 화두에서 주제를 선정했다면 이미 논문의 절반을 작성한 것과 다름이 없다고 설명하며, 서론을 작성했다면 거의 완성한 것과 진배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도 논문을 빨리 쓰는 법은 없으므로 절차를 지켜 논리적인 서론을 작성하라고 단호하게 조언해주기도 한다. 따라서 우선 주제에 대해 천천히 생각해 보았다. 책에서는 지나온 시간을 되짚어보는 과정을 통해 주제를 찾을 수 있다고 한다. 내가 흥미 있게 들은 과목은 무엇이며, 어떤 내용이 궁금했는지부터 시작해야 한다. 나는 국문학도로서 고전 문학을 좋아하지만, 고소설이 현대 사람들에게 인기가 없다는 사실이 슬펐다. 그래서 고소설의 현대적 변용에 대해 이전부터 관심을 가졌었고, 흥미를 가지고 있었다. 이에 고소설을 변용한 유명 웹소설의 성공 이유를 텍스트 분석을 통해 살펴보기로 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책을 통해 도움받은 내용은 단순히 주제를 '고소설의 현대적 변용'으로 설정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지나치게 넓은 범주에 대해서는 저자가 풀어나가기도 힘들뿐더러 독자가 이해하기도 힘들다. 따라서 세분화된 주제를 선정하는 것이 중요한데, 이때 고려해야 할 건 새로운 연구로의 발전 가능성, 그리고 이 논문만이 가지는 연구 의의, 향후 연구 활용성과 같은 방향이다. 논문의 주제는 구체적이어야 한다. 한편으로는 나의 연구에 도움을 준 선행 연구를 존중할 필요가 있다. 완전히 새로운 연구란 없기 때문에, 우리는 존중을 토대로 글을 쌓아 올려야 한다. 주제가 명확해졌다. 어떤가. 나의 일화를 통해 책의 일부만 공개했지만 벌써부터 유익하지 않나. 이 외에도 연구 계획서를 작성하는 법, 인용과 주석을 다는 법과 같이 유용한 정보가 책 곳곳에 숨겨져 있다. 책이 점점 더 소중해졌다.
책이 나에게 도움을 준 점은 해당 사례 외에도 많지만, 이 이상 담는 것은 책 속 내용을 희석할 수 있으니 이만 줄이도록 하겠다. 정리하자면 이 책은 실용 작법서지만 딱딱하지 않고 부드럽다. 그렇지만 우유부단하지 않고 냉철하다. 이에 꼼꼼하게 글을 쓰는 법, 완성하는 방법을 소개하기 때문에 논문을 쓰기 위해 참고하는 사람이 책을 읽었을 때, 고민이 해결되기보다는 더 많은 어려움과 과제를 떠맡을 수도 있다. 또한 기초적인 내용이 아예 포함되어 있지 않은 것은 아닌지라, 이에 대해 이미 알고 있다면 일부 내용은 심심하고 고루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이유로 안 읽고 넘어가기엔 아까운 책이다. 특히 논문을 쓰고 있는 사람이라면 책을 꼭 읽었으면 좋겠다. 나도 글을 많이 써왔다고 자부했지만 부족한 점이 많았고, 이를 책을 통해 파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첫 논문 쓰기를 앞두고 있는 사람은 이 책을 읽으며 너무 겁먹지 않았으면 좋겠다. 책을 통해 틀린 길로 갈 수 있는 가능성이 줄어든다. 내가 맞게 가고 있는지에 대해 확신을 가질 때 조금은 수월하게 가시밭길을 헤쳐 나갈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친절하게 당신의 글을 인도해 줄 이는 책 말고는 없을 수 있다. 따라서 논문이 궁금한 자여, 책을 읽자. 우리 함께 이 책을 읽으며 논문을 완성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