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에 데뷔한 가수들의 건재 증명
2010년대의 마지막인 2019년이 저물어 간다. 시기와 상황에 맞는 키워드를 선정하여 각 키워드 별로 2010년대 가요계 전체를 리뷰하려 한다.
여덟 번째는 ‘20세기 가수들의 건재 과시’이다. 시대의 변화가 빨라지고 세대 간 간격이 세분화됨에 따라, 한동안 옛 음악을 듣는 것은 시대에 뒤처진다는 인식이 확장되기도 했다. 그러나 변화의 가속화에 대한 반작용으로 복고 열풍이 불었고, 옛 가수와 음악의 재조명이 이어졌다. 이 사이에도 음악적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은 베테랑 가수들은 변화한 모습을 들고 나와 대중에게 사랑받을 자격을 증명했다.
수많은 중견급 가수들 중에서도, 이른바 ‘짬에서 나오는 바이브’가 무엇인지 보여 준 20세기 데뷔 가수들을 중점적으로 살펴보자.
작사 · 작곡: 나얼 / 편곡: 강화성
정규 1집 "Principle of My Soul"(2012.09.20.)
1999년 ‘앤썸 Anthem’의 일원으로 데뷔한 ‘나얼’은 이후 ‘브라운 아이즈’와 ‘브라운 아이드 소울’을 거치며 레트로 풍의 알앤비를 한국에 정착시켰다. 전자음악의 전방위적인 혁명 혹은 침공은 알앤비 음악에도 영향력을 발휘했는데, 그 흐름을 온몸으로 튕겨내며 레트로 알앤비의 색깔을 지켜내고 있는 이가 나얼이다. ‘또 그거’라는 비판이 나얼과 브아솔을 끝까지 따라갈 기세이지만, 다양한 시도가 힘들어진 음악 환경에서 끝까지 장르적 기반을 지키고 퀄리티를 보장할 수 있다는 자체만으로도 분명 칭송받을 일이다.
‘김나박이’라는 식의 편협한 정의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분명 그렇게 불리는 이유를 나얼은 꾸준히 증명해왔다. <바람기억>은 특유의 고음 배치로 인해 노래방에서 꽤 오랫동안 인기를 끌었지만, 의도치 않게 자신의 고음을 자랑하는 모양새로 비치기도 했다. 그럼에도 <바람기억>은 쉬이 휘발되지 않았다. 삶과 사랑에 대한 고찰, 철학적 사유, 시적인 가사 등이 곡에 담긴 의미와 감성을 지탱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모두가 알앤비 보컬리스트로서의 나얼에 집중할 때, <바람기억>은 나얼의 음악적 기량과 사고의 깊이를 증명하며 오래도록 생명력을 얻었다.
작사: 최우미
작곡: 알렉산더 홈그렌(Alexander Holmgren), 칼 우트불트(Carl Utbult), 마티 도드슨(Marty Dodson)
디지털 싱글 "Bounce"(2013.04.16.)
본인은 진보적인 시도와 음악적 실험을 원했고, 회사에서는 대중을 아우를만한 성인가요 등을 주문했다. 이 넓은 간격을 전부 소화해버리면서 조용필은 ‘가왕’ 칭호를 얻었고, 순위제 프로그램과 공연 등에서 각종 기록을 갈아치웠다. ‘폭넓은 세대 포괄’을 대중가수의 중요 가치로 간주한다면, ‘조용필’만큼 그 가치에 가까이 다가선 가수를 다시 만나기는 힘들 것이다.
가왕의 칭호를 누려도 아무도 뭐라 할 수 없는 위상을 지녔지만 조용필은 대중의 예상을 깬 시도를 들고 돌아왔다. 심심하고 가볍다던 초기의 호불호를 기억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조용필을 향유하던 세대는 물론 그를 처음 접한 세대까지 어느새 <바운스 Bounce>가 입에 익어 버렸다. 선공개곡 <바운스>, 활동곡 <헬로 Hello>, 그리고 <걷고 싶다>를 비롯한 수록곡들은 ‘왕년에 잘나가던 60대 음악인의 거룩한 자기예찬’과는 거리가 멀었다. ‘음악적 꼰대’의 정반대 길을 걸으며 변화와 발전을 추구하는 가왕에게, 음반 가게 앞에 길게 늘어선 원조 오빠부대에게 젊은 세대는 일종의 경의를 표했다.
작사 · 작곡: 이효리 / 편곡: 이상순
정규 5집 "Monochrome"(2013.05.21.)
2000년대 <텐미닛 10 Minutes>(2003)과 <유고걸 U-Go-Girl>(2008) 두 곡으로 고공행진하던 ‘이효리’에게는 트렌드 세터로서의 진보적 욕망과 가창력이라는 콤플렉스가 동시에 존재했다. 스스로 인정할 정도로 부족했던 가창력은 무대 위에서의 뛰어난 연기와 특유의 캐릭터 어필로 극복해나갔으나, 트렌드 세터로서의 진보적 욕망을 충족할만한 결과물이 꾸준히 나오지는 못했다. <겟챠 Get Ya>는 다소 뻔해서 실패했다. <치티치티 뱅뱅 Chitty Chitty Bang Bang>은 욕망과 콤플렉스가 뒤섞이는 바람에 곡이 난해했고, 수록곡 상당수가 표절 혹은 표절 의혹에 걸려 활동을 중단해야 했다.
복귀 선언 후 발매한 정규 5집 선공개곡 <미스코리아>는 가수로서의 기량 향상과 트렌드 세터로서의 욕망 표출을 모두 충족했고, 대중에게도 부담스럽지 않게 전달되었다. 간소화된 사운드와 헐거워진 구성 안에서 외적인 부담과 압박을 내려놓고 자기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는데, 곡에 담긴 ‘대화 의지’가 낮은 음역대와 허스키한 음색과 잘 어울려 히트를 기록했다. 단순한 표출 혹은 전시를 넘어, 대화와 교감으로 나아가기 시작한 ‘뮤지션’ 이효리의 행보를 집약적으로 나타낸 곡이라 의의가 깊다.
작사: 김이나 / 작곡: 박근태 / 편곡: 박근태, 옥정용
정규 15집 "Serendipity"(2014.03.25.)
작은 체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힘과 성량, 살짝 낮은 톤의 맑은 목소리, 그리고 곧게 뻗어나가는 창법과 중량감 있는 바이브레이션 등. ‘이선희’에게는 남다른 곡 장악력과 압도감을 바탕으로, 청중과 시청자를 감화케 하는 힘이 있었다. 여느 가수들처럼 초기에는 회사에서 시키는 음악을 했고, 이때에는 그의 폭발력이 극도로 부각됐다. 싱어송라이터로 선회한 뒤에는 힘을 빼기 시작했고 올드 팬들은 그의 변화를 민감하게 감지했지만, 힘을 뺀 그의 곡들 또한 여전히 함부로 따라할 수준은 아니었다. <라일락이 질 때>라든가 <인연 (동녘바람)> 같은 곡들을 쉽다고 할 수 있는가.
‘뜻밖의 재미/즐거움’의 의미를 담은 ‘세렌디피티’를 음반 제목으로 들고 나올 만큼 이선희의 데뷔 30주년은 특이하고 특별했다. 지난 30년을 적절히 자축하면서도, 그동안 쌓인 경륜과 완급조절을 바탕으로 다양한 시도들을 펼치며 안정과 변화를 모두 추구했다. 특히 활동곡 <그 중에 그대를 만나>에서는 싱어송라이터의 역할과 자부심을 살짝 밀어둔 채 온전히 가창에 집중함으로써 대중에 대한 접근성을 놓치지 않으려 했다. 지나온 인연들을 돌아보고 이를 ‘기적’이라 말하는, 과거와 현재를 모두 포괄하는 모습은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안겼다.
작사: 박효신, 김지향
작곡: 박효신, 정재일 / 편곡: 정재일
디지털 싱글 "야생화"(2014.03.28.)
약 4년의 공백기에 할 말이 쌓이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박효신’의 <야생화>에는 그간 트레이드 마크였던 특유의 울음도 찾을 수 없다. 수많은 사연과 감정을 쌓아 놓고 터뜨리는 대신 한껏 눌러 담는 쪽을 선택한 전략은 보기 좋게 적중했다. 힘을 뺀 자기 고백적 진술을 통해 자신의 ‘내려놓음’을 설득하고, 켜켜이 감정을 쌓아 올림으로써 청자가 곡에 스밀 수 있는 공간과 여지를 제공했다. ‘하얗게 피어난’ 한 마디로 게임 셋을 외치는 진성 팬들이 아니더라도, 박효신 특유의 휘몰아치는 감정과 울음이 취향에 맞지 않던 사람들까지도 포용할 수 있는 깊이와 넓이를 갖고 나타났다. 젊어 보이는 외견과 달리 어느덧 자신도 베테랑임을, 단순한 가창력의 범위가 아니라 음악 전반을 만들고 조율할 수 있는 음악가임을 <야생화>를 통해 새삼 다시 증명해냈다.
작사 · 작곡: 유희열 / 편곡: 유희열, 강화성
정규 7집 "Da Capo"(2014.11.18.)
“음악도시”를 진행하던 시기의 ‘유희열’과 “케이팝스타” 시리즈 · “유희열의 스케치북”을 진행하는 지금의 유희열이 온전히 같지는 않다. 강력하고 견고한 매니아 팬덤을 형성한 ‘토이 감성’은 시간이 지날수록 대중과의 거리를 좁혀갔고, 음악 엘리트의 이미지는 점차 후배들과의 교류 및 후진 양성을 위한 음악적 멘토로서의 이미지로 바뀌어 갔다. 예능인 화 되어 가던 유희열의 음악가 이미지를 재정립한 계기가 “케이팝스타”와 “유스케”라면, 현역 음악인으로서의 입지를 재확인시킨 음반은 ‘토이’ 정규 6집(2007)과 정규 7집(2014)이다.
<세 사람>은 <좋은 사람> 10년 후의 버전으로 알려져 있다. 소극적인 남성상의 속 터지는 애절함, 객원 가수 괴롭히는 극악의 난이도 등은 여전히 토이 그대로였다. ‘김연우’ · ‘김형중’ 등 토이의 이미지가 강한 보컬들을 빼고 ‘성시경’을 내세운 것이 주효했다. 곡에 잘 어울렸고, 누구나 아는 보컬을 내세움으로써 보컬이 아닌 음악인들이 다소 보조적으로 인식되던 기존의 관념을 더 확실하게 깨뜨렸으며, 토이의 정체성을 무너뜨리지 않는 선에서 적절한 대중화의 접점을 찾아냈다.
작사: 박진영, 제시, 제이켠 / 작곡: 박진영
편곡: 박진영, 아르마딜로, 김승수
디지털 싱글 "24/34"(2015.04.12.)
멸칭이었던 ‘딴따라’는 어느새 그만의 고유 수식어로 승격되었다. ‘더 이상 사랑은 없다’든가 ‘놀 만큼 놀아봤다’며 그간의 ‘날티’나는 모습과 결별을 선언했을 때 오히려 대중은 미온적인 반응을 보였다. 설왕설래가 있긴 해도 ‘프로듀서’ 박진영은 어쨌거나 높은 곳에 있었지만, ‘댄스 가수’ 박진영은 다소 정체된 모양새였다. 이 흐름이 <어머님이 누구니>를 불러 일으켰다는 해석, 즉 ‘딴따라’ 박진영은 대중의 요구였다는 해석은 비약일까.
호불호와 설왕설래 속에서도 어느덧 대중이 박진영의 캐릭터와 능력에 대해 기대가 쌓인 모양이었다. <엘리베이터> · <그녀는 예뻤다> · <허니 Honey> · <스윙 베이비 Swing Baby> · <딴따라 블루스> 등으로 쌓은 발칙한 발상과 레트로 지향을 <어머님이 누구니>가 완벽히 계승했다. 동시에 다양한 악기들이 그루브를 뿜어내며 프로듀서로서의 기량 발전을 증명하고 청각적인 만족을 선사했다. 대놓고 신체 사이즈를 언급하는 이 곡이 비난받으며 파묻히기는커녕 음원 차트에 올라 승승장구를 거듭했다. 자기파과적 선정성 경쟁을 일삼던 걸그룹들이나 어설프게 야한 레퍼런스를 차용하던 일부 가수들 사이에서 대중은 ‘제대로 놀 줄 아는’ 가수와 노래를 원했던 모양이었다. 2015년에는 <어머님이 누구니>로, 2019년에는 <피버 Fever>로 박진영은 ‘살아 있’음을 다시 증명했다.
작사: 임창정 / 작곡: 임창정, 박성수
편곡: 임창정, 박성수, 김채림
정규 13집 "I'm"(2016.09.06.)
앞뒤로 서술된 가수들 중 다수는 시대의 흐름에 맞춘 변화를 선보여 주목받았다. 그러나 ‘임창정’은 여전히 그만의 전형성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고, <이미 나에게로> · <그때 또 다시> · <날 닮은 너> · <소주 한 잔> 등으로 이어지던 발라드 넘버는 복귀 후 <오랜만이야> · <나란 놈이란> · <흔한 노래> · <또 다시 사랑>에서도 그대로 이어갔다. 분초를 앞다퉈 변해가는 세상에서 변하지 않은 임창정의 색깔이 그리웠던 것인지, 대중은 놀랍도록 음색과 스타일을 유지한 임창정에게 열광했다. 영화배우로서의 신선도와 설득력이 떨어져가던 시점에 맞이한 전환기였다.
<내가 저지른 사랑>은 그 최고점에 섰다. 이제는 트렌드가 아니라 일상이 되어버린 레트로 지향의 발라드 판에서 임창정은 거부할 수 없는 색채를 지녔다. 그러나 그의 색채가 전형적일지언정 그의 삶 또한 20대의 그것이 아니기에 대중은 새로운 관점에서 그를 받아들일 수 있었다. 좌충우돌에 깨지고 망가지며 웃음과 눈물을 선사했떤 영화 속 임창정의 캐릭터들, 가수 은퇴와 이혼 등의 부침을 겪은 실제 삶의 맥락들이 곡 위로 겹쳐지며 새로운 서사와 서정이 담겼다. 비인간적이며 잡기 힘든 ‘스타’가 아니라, 삶의 어딘가에 있을 것 같은 ‘노래 잘하는 친근한 형’으로 자리잡은 그의 캐릭터는 여전히 친숙한 그의 음악에 설득력과 생명력을 더했다. 유독 고음을 좋아하는 한국 음악계의 고집스런 취향도 그의 성공에 한 몫 거들었다.
작사: 헤이즈 / 작곡: 헤이즈, 이승주 / 편곡: 이승주
정규 16집 "Between Us"(2018.10.22.)
한국 남성 가수의 발라드 계보를 논할 때 흔히 ‘변진섭’ - ‘신승훈’ - ‘조성모’ - ‘성시경’을 언급하곤 한다. 이 계보의 선두에는 ‘이문세’가 있다. 수많은 히트곡은 이문세를 떠올리게 하는 히트곡들인 동시에, 대중들이 이문세의 음악을 규정짓는 방식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이문세는 자신의 성과에 취하려 하지 않았다. 후배 뮤지션들과의 끊임없는 협업, 자신의 말을 빌려 “트렌드를 쫓는 게 아니라 트렌디한 가수가 되고픈” 노력은 꽤 오래 전부터 진행되어 왔다.
100여곡에서 10곡을 골라 음반에 담는 과정에서, 이문세는 ‘헤이즈 Heize’의 존재를 모른 채 <희미해서>를 선택했다고 한다. <희미해서> 속 이문세는 자기 주장 없이 곡 안에 오롯이 담기는 선택을 했다. 작곡가의 의도와 감성을 빨아들이고 이를 드넓은 시간과 경혐으로 변용하여 출력해냈다. 이는 역설적으로 가장 강한 자기 주장이 되었다. 헤이즈의 음악적 역량과 독보적인 색깔이 인정받은 장면인 동시에, 가장 트렌디한 가수의 곡을 선택하는 가수 이문세의 노력과 안목이 빛난 장면은 꽤 화제를 뿌렸다.
작사: 김현철, 박창학 / 작곡 · 편곡: 김현철
정규 10집 "돛"(2019.11.17.)
대학가요제 심사위원을 거쳐 현재에는 복면가왕 패널 등으로 훨씬 더 자주 언급되나, '김현철'은 <춘천가는 기차> · <그대안의 블루> · <달의 몰락> 등의 히트곡을 보유하고, 독보적인 감성과 장르적 기반을 무기로 소위 ‘천재’ 소리를 듣는 싱어송라이터였다. 소위 1등의 정체성을 갖는 가수는 아니지만, 자기 색깔을 구축하는 동시에 도전을 멈추지 않는 ‘부지런한’ 아티스트였다. 그런 김현철의 신보 발매가 이다지도 오래 걸릴줄은 몰랐지만, 아무튼 해 넘기기 전에 나왔으니 다행이라는 생각도 든다.
이른바 ‘뉴트로’(뉴 + 레트로, 복고의 재해석) 열풍에 가장 큰 힘을 받은 음악은 ‘시티팝’이었다. 그리고 한국에서 시티팝을 논할 때 김현철은 절대 빠질 수 없다. <위 캔 플라이 하이>는 펑키한 요소를 도입한 시티팝 장르의 곡으로, 김현철 음악답게 깔끔하고 정돈된 사운드가 특징적이다. 탄탄하게 악기를 쌓아 올리고, 완급조절과 깔끔한 사운드 조정으로 청각적 만족의 최대화에 집중했다. 소위 ‘절창’을 제거한 것은 간결하게 메시지를 전달하고 곡 자체에의 몰입을 유도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진취적인 가사와 희망적인 분위기에서는 월드 뮤직의 흔적이 보이기도 하는데, 데뷔 30주년에 맞춘 음반에서 지난 세월을 돌아보고 자축하기보다는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지’ 묻는 발상에 다시 한번 놀랐다. 얼마 전에 30주년 음반을 발매한 이승환처럼, 김현철의 30주년 음반 또한 ‘현재의 역동성’이 담겨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