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득권 구조와 인간 본성
기득권 개혁의 한계: 인간 본성과 반복 구조
기득권 구조를 해체하기 위해 제시할 수 있는 모든 방안은 합리적이고 제도적인 개선을 통해 공정한 생태계를 실현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러한 논의의 종착점에는 언제나 피할 수 없는 한계가 존재한다. 바로 인간 본성이다.
아무리 완벽한 제도를 설계하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운영자와 수혜자, 그리고 제도를 활용할 기회를 엿보는 사람들은 결국 권력을 사유화하고 정보를 독점하며 자원을 집중시키는 경로를 찾아낸다. 역사적으로 예술계의 권력 카르텔은 형태만 달리하며 반복되어 왔다. 인간이 존재하는 한, 그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첫째, 정보의 투명성 확보와 민주화이다. 악보, 연주 자료, 심사 기준, 지원금 배분 내역 등 핵심 정보를 공개함으로써 권력과 자원의 독점을 견제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은 언제나 정보를 사유화하고, 새로운 방식으로 은밀한 독점을 추구할 수 있다. 공식적 투명성이 높아질수록, 비공식적 정보 카르텔은 더욱 은밀하고 강력하게 작동할 위험이 존재한다.
둘째, 권력의 분권화이다. 단일 권력을 해체하고 대학, 앙상블, 평론가, 스태프 등 다양한 주체에게 권한을 분산시키는 것은 기득권 구조를 완화하는 중요한 조치이다. 그러나 분권화는 필연적으로 새로운 내부 연합을 형성할 가능성을 수반한다. 여러 주체가 권력을 공유하는 순간, 그들 내부에서 다시 자원과 기회를 독점하는 담합이 생겨날 수 있으며, 권력 집중의 형태만 달라질 뿐 본질적 문제는 사라지지 않는다.
셋째, 경제적 자원의 분산이다. 후원금, 지원금, 연주 기회 등 핵심 자원을 다양한 창작자와 단체가 접근할 수 있도록 구조화하는 것은 공정성을 높이는 핵심 장치이다. 그러나 인간은 여전히 경제적 이익과 경쟁 우위를 추구하며, 자원을 독점하거나 재분배 과정에서 새로운 불균형을 만들어낼 가능성이 존재한다. 따라서 자원의 분산만으로 권력 집중을 완전히 막을 수는 없다.
넷째, 실현 주체의 권한 확대이다. 연주자와 스태프 등 작품 실현에 직접 관여하는 주체에게 해석과 창작에서 일정한 권한을 부여하는 것은 그들의 전문성과 창의성을 존중하는 핵심 방안이다. 그러나 권한을 부여받은 연주자나 기술자가 새로운 형태의 권위 중심으로 자리 잡을 위험도 존재한다. 권력과 해석의 독점은 단순히 작곡가에서 다른 주체로 이동할 뿐, 본질적으로 권위 집중 문제는 반복될 수 있다.
다섯째, 정치 권력으로부터 예술기관 분리다. 정부와 정치적 이해관계의 개입을 차단함으로써 기관의 자율성을 확보하는 것은 기득권의 정치적 왜곡을 예방하는 방책이다. 그러나 예술기관은 여전히 내부 권력 구조, 인맥, 자원 배분 등에서 독자적인 카르텔을 형성할 수 있으며, 외부 개입이 없어도 기득권 집중이 발생할 가능성은 완전히 제거되지 않는다.
결국 모든 구조적 개혁은 인간의 한시적 노력에 불과하다. 제도를 만들고 개혁을 외치는 행위는, 그 제도가 결국 변질될 것을 알면서도 수행하는 시지프스적 노력과 유사하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점은, 예술은 인간을 위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결국은 인간이 있어야 음악도 있고 예술도 있다.
영원한 해답은 없지만, 개혁 투쟁의 과정 자체가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는 행위가 된다. 권력 카르텔이 다시 형성될지라도, 투명성을 확보하고 권력을 분산하며 연주자의 노동을 정당하게 평가하려는 노력은 그 순간만큼은 신진 예술가에게 숨 쉴 틈을 제공한다. 잠시의 공정한 환경 속에서, 창의성과 예술적 실험이 발현될 수 있으며, 이는 예술의 본질이자 인간이 상상과 표현을 통해 자유를 실현하는 통로임을 보여준다.
이 순간의 노력은 단기적 성과를 넘어, 미래 세대 예술가들에게 지속 가능한 환경을 마련하는 초석이 된다. 우리가 기득권과 계속해서 싸워야 하는 이유는 승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답게 예술할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서다. 결과가 불확실하더라도, 우리는 무관심 속에 방관할 수 없다. 책임을 감수하고 목소리를 내는 순간, 우리는 예술과 인간을 동시에 지킬 수 있다.
부조리는 인간의 요구와 세계의 비이성적인 침묵 사이의 이러한 대면에서 태어난다.
경멸(반항)로써 극복되지 못할 운명은 없다.
시지프는 행복하다고 상상해야 한다.
L'absurde naît de cette confrontation entre l'appel humain et le silence déraisonnable du monde.
Il n'y a pas de destin qui ne se surmonte par le mépris.
Il faut imaginer Sisyphe heureux.
알베르 카뮈(Albert Camus) - 시지프 신화(Le Mythe de Sisyphe)
부끄럽기만 한 2025년
올해, 2025년이 음악계에 좋은 해였다고 우겨 볼 도리가 없다. 도덕적 공백 속 추악한 두 전쟁이 여전히 진행 중이며, 러시아 에이전트들이 서방과의 거짓 연대를 저버린 쉽지 않은 한 해였다.
미국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만이 푸틴의 예술가 사단에 맞서 굳건히 버텼다.
다른 기관들은 톱밥처럼 산산이 부스러졌다. 미국 공연 예술계의 성전인 존 F. 케네디 센터가 이사회 의장직을 꿰찬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손에 넘어간 뒤, 티켓 판매율은 절반으로 뚝 떨어졌으며 기부자들 또한 떠나가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과 밴스 부통령의 초상화가 로비 벽면에 올라갔고, 오케스트라에게는 보통 국가적 애도나 위기 사태에만 연주되던 국가를 모든 공연 시작 전 연주하라는 지시가 전달됐다.
예술의 자유? 바람과 함께 사라졌다.
영국 코번트 가든 소재 로열 오페라의 오페라감독 올리버 미어스는 초연 커튼콜 도중 팔레스타인 국기를 들고 있던 단역 배우를 무대 밖으로 끌어내려 했으며, 해당 배우가 다시는 로열 오페라와 일하지 못할 것이라 선언했으나, 제재는 노조의 압력으로 조용히 철회되었다.
가자 지구 전쟁에 대해 어떤 의견을 가졌는가와 상관 없이, 음악은 조직적인 정치 시위 앞에서 무력한 선전 전쟁의 부차적 희생양이 되었다.
다가올 새해에는 더 밝은 전망을 이야기하고 싶지만,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시카고 심포니에 새로 취임하는 음악감독도 예시다. 핀란드 출신의 클라우스 메켈레는 29세로, 젊고 매력적이다. 문제가 있다면 그가 이미 오슬로, 파리, 암스테르담에서 음악감독을 겸직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그중 두개는 내려놓는 중이지만, 메켈라가 도착할 때 쯤이면 시카고는 찌들고 위험한 상태일 것이다. 왜냐고? 이 젊은이의 취임에 그들도 당황했기 때문이다.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지휘자인 베를린 필하모닉의 키릴 페트렌코는 한 번에 두 개 이상의 자리에 앉는 법이 없었다. 유망주를 선택한 시카고는 막중한 대가를 치르게 될지도 모른다.
마지막 예시는 쇼팽 콩쿠르다. 이 콩쿠르의 우승은 눈부신 신예에게 돌아가거나 종종 이렇다 할 후보가 없을 때는 우승자가 나오지 않기도 한다. 그러나 올해는 결단성과 신예 발굴 양측 모두에서 기록이 깨졌다.
심사위원들은 점수를 그러모아 평균 중의 평균 또는 위원회에서 내정한 허수아비를 찾아냈다. 우승은 2018년 리즈 콩쿠르 우승자이자, 그 외 여러 콩쿠르에서 수상한 에릭 루에게 돌아갔다. 소름 끼치도록 놀라운 발견은 아니었고, 실망감은 명백했다.
바르샤바에서 우리가 목격한 것은,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그 집단적 두려움이 2025년 연말, 클래식 음악계를 무력하게 만든 주범이다. 부디 2026년에는 행복한 밤이 오길 기원하자.
우연히 다음 글을 접하게 되었다. 마치 엄청난 사건이 발생한 것처럼, 혹은 대단한 발견을 한 것처럼 과장되어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수백 년 동안 반복되어 온 일이었고, 충분히 예상 가능한 내용이었다.
최근 몇 년간 예술계에서 터져 나온 콩쿠르 심사 조작, 유명 지휘자의 다중직 문제, 예술 기관의 정치적 개입 등 일련의 사건들은 매번 언론을 통해 '충격적인 뉴스' 혹은 '예술계의 타락'이라는 이름으로 대중에게 전달된다. 특히 연말이나 특정 시기에 이러한 문제들은 마치 그 해에 새롭게 발생한 것처럼 특집 기사로 포장되어 쏟아진다.
예컨대 특정 저명한 비평가의 칼럼에서, 이러한 문제들이 마치 현재 예술계가 마주한 '새로운' 또는 '올해의' 아젠다인 것처럼 언급될 때, 우리는 역설적인 불편함을 느껴야 한다. 그가 언급하는 모든 문제는 사실상 수십, 수백 년간 예술계의 근본을 병들게 해 온 구조적 패턴의 단순한 반복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기득권층이 자신의 권력과 이익을 지키기 위해 자행하는 돈, 권력, 인맥의 삼각 카르텔은 어제, 오늘, 작년, 지난 세기의 일이 아니며, 이미 수많은 신진 예술가들과 비평가들이 지적해 온 고질적인 병폐이다.
이러한 피상적인 뉴스 포장은 두 가지 심각한 결과를 낳는다. 첫째, 문제의 본질인 구조적 반복성을 가리고, 사안을 몇몇 개인의 일탈이나 일회성 사건으로 축소시킨다. 둘째, 정작 이 구조적 문제로 인해 피해를 입고 있는 신진 예술가와 후속 세대의 목소리를 지운 채, 기득권층의 '뒤늦은 반성'이나 '이미지 세탁'에만 초점을 맞추게 한다.
마음 같아서는 글에서 더 강하게 비판하고 싶은 충동이 있지만, 그렇게 하면 본의 아니게 과장과 허구가 뒤섞일 수밖에 없어, 많이 순화시켰다. 예를 들어 '륄리가 프랑스 바로크 음악 전체를 쥐고 흔들었다'라고 표현하면 극적이지만, 팩트와는 다르다. 실제로 그는 궁정 음악 영역에서만 실질적 영향력을 행사했을 뿐, 프랑스 바로크 전체를 좌지우지한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카라얀 평전에는 푸르트뱅글러가 카라얀을 심하게 방해했다고 쓰여 있지만, 이것 역시 카라얀 개인의 주장일 뿐, 사실관계가 명확히 확인된 내용은 아니다.
한 예로, 대학 수업에서, 바로크 시대 코렐리의 경우 로마에서 활동했고, 당시 바티칸이라는 재정 후원자가 있었으며, 바소 콘티누오가 100명에 달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나 실제 기록에 따르면 최대치는 30명 남짓이다. 아마 교수님은 수업에서 코렐리 음악의 바소 콘티누오 특징을 강조하기 위해, 미원, 다시다, 연두, 치킨스톡을 한꺼번에 넣은 듯한 비유를 사용한 것일 수 있다. 혹여라도 학생들이 이를 그대로 기억하고 퍼뜨린다면(물론, 그 정도의 지적 능력이라도 있다면 이런 기득권 문제가 생기지 않겠지만), 사실과 다른 이야기가 전해지는 셈이다.
글을 읽는 누군가가 이런 표현을 사실로 받아들이면 잘못된 정보가 퍼지게 된다. 수많은 검증되지 않은 주장과 오류, 과장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최대한 정확하고 신중해야 했다. 부디 읽으면서 감정을 300% 이입해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