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위법의 정점과 현대적 재구성
1930년대 초반 오스트리아는 정치적 격변과 더불어 문화적 위기 국면에 놓여 있었다. 1933년 독일에서 집권한 나치 정권의 영향력은 오스트리아에도 강하게 미쳤고, 이와 함께 이른바 '퇴폐 예술'(Entartete Kunst)에 대한 배제가 본격화되었다. 특히 아르놀트 쇤베르크(Arnold Schoenberg)를 중심으로 한 제2빈 악파의 음악은 독일 및 이후의 오스트리아 문화 정책에서 배척의 대상이 되었다. 쇤베르크는 1933년 파리를 거쳐 미국으로 망명했고, 그의 제자 안톤 베베른(Anton Webern)은 빈 인근 마리아 엔처스도르프에 머물며 점점 더 고립된 환경 속에서 창작을 이어갔다.
이 시기 베베른에게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Johann Sebastian Bach)는 단순한 역사적 거장이 아니었다. 그는 바흐를 통해 자신이 추구하던 음악적 질서의 선례를 발견했다. 베베른은 1932–33년에 행한 강연을 정리한 『신음악으로의 길』(Der Weg zur Neuen Musik)에서, 바흐의 대위법적 엄밀성이 쇤베르크 이후의 새로운 작법과 어떻게 연속선상에 놓일 수 있는지를 반복해 강조했다. 여기서 그는 바흐를 '형식의 완결성'을 구현한 인물로 제시한다.
1934년 베베른이 바흐의《음악의 헌정》(Musikalisches Opfer, BWV 1079) 중 〈6성 리체르카레〉(Ricercar a 6)를 관현악으로 편곡하기로 한 것은 이러한 인식의 구체적 결실이었다. 원곡은 1747년, 바흐가 프로이센 국왕 프리드리히 2세(Friedrich II)가 제시한 '대왕의 주제'를 바탕으로 작곡하여 헌정한 작품집에 포함된 곡이다. 〈6성 리체르카레〉는 단일 주제의 엄격한 모방과 전개를 통해 극도로 치밀한 다성적 구조를 이룬다. 베베른이 주목한 것은 바로 이 점이었다. 짧은 주제로부터 전곡의 통일성을 끌어내는 방식 말이다.
그는 편곡 작업에 착수하면서 단순한 악기 배치를 넘어선 '분석적 재구성'을 목표로 삼았다. 바흐의 원곡은 건반악기를 위해 기록되었지만, 베베른은 그 안에 숨겨진 6개 성부의 독립적인 움직임이 단일 악기의 음색으로는 온전히 드러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는 바흐의 대위법을 풀어헤쳐 현대적 관현악의 음색으로 다시 조립함으로써, 바흐가 설계한 구조적 골격을 투명하게 드러내고자 했다.
이 과정에서 베베른은 바흐를 '최초의 12음 작곡가'(erster Zwölftonkomponist)로 명명하며 대담한 해석을 전개했다. 그러나 이 표현은 역사적 사실의 선언이라기보다, 구조적 유비를 강조하기 위한 미학적 비유에 가깝다. 그가 주목한 것은 하나의 주제(Thema)로부터 전곡의 통일적 질서를 이끌어내는 바흐의 작법이었으며, 이를 12음 기법의 통합 원리와 연결 지은 것이다.
쇤베르크는 1950년 사후 발표된 에세이 「Bach」에서 이렇게 회고했다.
“Ich pflegte zu sagen: Bach ist der erste Zwölftonkomponist. Das war natürlich ein Scherz.”
(나는 바흐가 최초의 12음 작곡가라고 말하곤 했다. 물론 그것은 농담이었다.)
이 표현이 이미 1928년 무렵 쇤베르크와 베베른 사이에서 공유되고 있었음은, 베베른이 같은 해 바흐의 《전주곡과 푸가 내림마장조》(Präludium und Fuge Es-Dur, BWV 552)를 관현악으로 편곡하던 시기와 겹친다는 점에서 짐작할 수 있다.
결국 이러한 인식은 쇤베르크가 제시한 12음 기법을 전통과 단절된 급진적 발명으로 보지 않고, 독일-오스트리아 음악사의 내적 연속성 속에 위치시키려는 관점을 반영한다.
1935년에 완성된 베베른의 관현악 편곡은 단순한 편성 변경이 아니었다. 그는 건반 위에 압축되어 있던 여섯 성부를 서로 다른 악기로 분산 배치하여, 각 성부의 음형과 음정 관계를 극도로 투명하게 부각시켰다. 이 과정에서 나타난 것이 이른바 '음색선율'(Klangfarbenmelodie)이다. 하나의 선율이 단일 악기에서 이어지기보다, 서로 다른 악기들 사이를 점처럼 이동하면서 음색의 변화 자체가 선율 인식의 핵심이 되는 방식이다.
'대왕의 주제'는 그 탄생부터가 하나의 도전이었다. 1747년 포츠담 궁정을 방문한 바흐에게 프리드리히 대왕이 직접 건넨 이 주제는, 당대의 통상적인 갈랑 양식과 달리 넓은 도약과 반음계적 진행을 포함하고 있어 푸가적 전개에 상당한 제약과 가능성을 동시에 제공했다. 베베른은 이 주제가 지닌 수직적·수평적 가능성을 현대적 시각에서 온전히 재발견해냈다.
'대왕의 주제'는 다단조(c minor)의 으뜸음 C에서 출발한다. 이어 단3도 위의 E♭로 상승하고, 다시 G로 진행하면서 일견 조성적 안정의 틀을 따르는 듯 보인다. C–E♭–G라는 배열은 다단조의 기본 삼화음을 환기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안정은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곧이어 등장하는 A♭와 B음은 급격한 긴장을 만들어내며 선율의 방향을 전환시킨다. 이러한 도약과 전환은 선율을 단순한 화성 분산형으로 남겨두지 않고, 지속적인 불안을 내포한 구조로 바꾸어 놓는다.
중반부에 나타나는 G–F#–F–E–E♭–D-D♭-C-B의 연속적 하행은 더욱 인상적이다. 이는 바로크 수사학에서 '파수스 두리우스쿨루스'(passus duriusculus)라 불리는 반음계적 하행 선형과 유사한 형태다. 통상 이 음형은 저성부에서 비탄이나 긴장을 표현하는 관습적 수단으로 쓰였으나, 여기서는 주제 자체를 구성하는 핵심 선율로 제시된다. 바흐는 전통적으로 베이스에서 발견되던 반음계적 하행을 상성부의 중심 동기로 끌어올려 대위적 전개의 출발점으로 삼은 것이다. 이로 인해 주제는 처음부터 강한 긴장과 복합성을 내포하게 된다.
베베른은 이러한 선율을 하나의 유려한 멜로디로 보기보다, 음정 관계들의 조직으로 이해했다. 각 음은 수평적 진행 속에서 앞뒤 음과 관계를 맺는 동시에, 수직적 맥락 속에서 다른 성부와의 간격을 통해 의미를 획득한다. 그는 1935년 관현악 편곡에서 이 관계망을 더욱 또렷하게 드러내고자 했다. 건반 위에 응축되어 있던 선율을 여러 악기로 분산 배치함으로써, 음과 음 사이의 간격, 반음계적 긴장, 도약의 대비를 청각적으로 분해해 제시한 것이다.
'대왕의 주제'는 분명 다단조를 중심으로 조직되어 있다. 그러나 선율 곳곳에 삽입된 반음계적 진행과 예기치 않은 도약은 중심 조성에 즉각적으로 안착하기보다는, 긴장을 지속시키는 방향으로 작용한다. 이로 인해 선율은 명확한 조성 내부에 있으면서도, 음과 음 사이의 관계가 전면에 부각되는 성격을 띤다.
베베른은 이러한 점을 특히 중요하게 보았다. 그는 『신음악으로의 길』에서 바흐 음악의 본질을 개별 음들의 상호 연관성, 그리고 전체를 지배하는 통일 원리에서 찾았다. 중요한 것은 특정 음의 위계라기보다, 모든 음이 하나의 질서 안에서 관계 맺는 방식이라는 것이다.
Bach baute aus einem Thema ein ganzes Werk auf, das in allen seinen Teilen durch dieses Thema zusammengehalten wird.
(바흐는 하나의 주제에서 전곡을 구축했는데, 그 모든 부분이 이 주제에 의해 하나로 결합된다.)
Jeder Ton hat seine Bedeutung durch seine Beziehungen zu allen anderen Tönen.
(각 음은 다른 모든 음들과의 관계를 통해 의미를 획득한다.)
Die Idee der Alleinherrschaft eines Grundgestalts ist bei Bach schon in hohem Grade entwickelt.
(한 형태의 절대 지배라는 아이디어는 바흐에게서 이미 높은 수준으로 발전해 있었다.)
주제 안에서 반음계가 차지하는 비중이 높아짐에 따라, 특정 으뜸음으로 수렴하려는 성질보다 음들 사이의 '간격' 자체가 중요해진다. 베베른은 이 반음계적 하행에서 12음 기법과 통하는 사고방식을 읽어냈다. 그는 편곡 과정에서 이 반음계적 구간들을 악기별로 잘게 쪼개어 배치함으로써, 조성이 주는 안락함을 걷어내고 음정 그 자체의 구조적 순수성을 부각했다.
이러한 독해는 바흐를 20세기 무조성의 직접적 선구자로 선언하는 것이 아니라, 조성 내부에서도 이미 모든 음이 상호 관계 속에서 의미를 획득하는 조직 원리가 구현되어 있음을 강조하는 해석이다. 핵심은 조성과 무조성의 대립이 아니라, 전곡을 하나의 원리로 통합하려는 사고의 연속성에 있다.
'리체르카레'(Ricercar)는 본래 모방 대위적 탐구를 뜻하는 용어로, 푸가와 밀접한 관계를 지닌다. 《음악의 헌정》의 〈6성 리체르카레〉는 여섯 성부가 치밀하게 교차하며 극도의 밀도를 형성한다.
베베른은 이 밀집 구조를 관현악 편성으로 전환함으로써 각 성부를 개별 음색에 분산시켰다. 그 결과, 건반에서 하나의 덩어리처럼 들릴 수 있는 진행이 서로 다른 악기의 색채 속에서 선명하게 분리된다. 이는 바흐의 대위적 조직을 해체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각 성부의 독립성을 극대화하려는 해석적 선택이었다.
베베른은 주제를 하나의 길게 이어진 선율로 다루기보다, 음정과 리듬의 결절점에 따라 세밀하게 나누어 파악했다. 세 음씩, 혹은 두 음씩 묶어 각기 다른 악기군에 할당한 것이다. 실제 편곡에서 선율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의 악기가 이어가지 않는다. 특정 음 또는 짧은 음형이 한 악기에서 제시되면, 다음 음은 다른 악기로 넘어가는 식이다. 표면적으로는 선율이 분절된 듯 들리지만, 청자는 각 음의 위치와 간격을 더욱 또렷하게 인식하게 된다.
이러한 배치는 흔히 '음색선율'(Klangfarbenmelodie)의 개념과 연결된다. 이 용어는 쇤베르크가 제시한 것으로, 선율의 연속성을 음높이뿐 아니라 음색의 변화 속에서도 인식하는 사고를 가리킨다. 베베른은 이를 더욱 급진적으로 밀고 나가, 하나의 선율을 여러 악기 사이에 분산시킴으로써 음색의 교체 자체를 선율 형성의 요소로 삼았다.
따라서 이 편곡은 주제를 해체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내부의 음정 관계와 성부 구조를 청각적으로 투명하게 드러내려는 해석이다. 건반 위에서 여섯 성부가 응축되어 울리던 원곡과 달리, 관현악 버전에서는 각 음이 고유한 색채를 통해 독립성을 획득한다. 주제는 분절된 파편으로 흩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차원의 통일성 속에서 새롭게 인식된다.
'대왕의 주제'는 조성적 기반 위에 놓여 있으면서도 높은 반음계적 밀도를 지닌 선율이다. 바흐에게 그것은 대위법적 탐구의 출발점이었고, 베베른에게는 음정 관계의 투명성을 극대화할 수 있는 재료였다. 베베른은 이 주제의 난해함을 완화하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관현악 음색을 통해 각 성부와 각 음정 관계를 분리하여 드러냄으로써, 18세기 대위법과 20세기 음색 중심 미학이 만나는 지점을 제시했다.
베베른에게 바흐 편곡은 단순한 학습이나 경의의 표시를 넘어, '전통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음악적 해답이었다. 스승 쇤베르크와의 편곡 방식 비교는, 베베른이 추구한 분석적 접근의 성격을 가장 명확히 보여준다. 두 사람 모두 바흐를 깊이 존경했지만, 그 존경을 표현하는 음악적 언어는 정반대의 방향으로 나아갔다.
쇤베르크는 바흐의 《전주곡과 푸가 내림마장조》편곡에서 대규모 관현악단을 동원하며 후기 낭만주의적 색채를 덧입혔다. 금관악기의 화려한 울림과 타악기의 사용은 곡의 감정적 파고를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작용했고, 바흐의 대위법은 오케스트라의 거대한 음향 에너지로 변환되어 청중에게 서사적·정서적 인상을 전달했다. 이러한 접근은 바흐를 리하르트 슈트라우스(Richard Strauss)나 구스타프 말러(Gustav Mahler)의 계보 속에 위치시키는 낭만주의적 계승 방식과 맞닿아 있었다.
반면 베베른은 《음악의 헌정》 〈6성 리체르카레〉 편곡에서 오케스트라를 축소하고 각 음을 분절함으로써, 색채적 장식을 제거하고 구조적 논리를 극대화했다. 선율을 마디 단위가 아닌 음표 단위로 쪼개어 악기들 사이에 배치하며, 점묘적 방식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이를 통해 바흐의 음악에서 감정을 걷어내고 논리와 질서만을 강조하며, 과거의 거장을 현대적 시각에서 다시 읽어냈다.
두 작곡가가 공통적으로 기댄 '음색선율'이라는 개념도 적용 방식에서 극명하게 갈렸다. 쇤베르크는 음색의 변화를 통해 선율에 풍부한 표정을 부여하려 했지만, 베베른은 음색의 변화를 선율 구조 자체의 골격으로 삼았다. 음색이 바뀌는 지점이 곡의 논리적 연결점이 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쇤베르크의 바흐는 '풍성한 바흐'로, 베베른의 바흐는 '투명한 바흐'로 인식된다.
베베른은 이러한 편곡을 통해 12음 기법의 역사적 정당성을 확보하고자 했다. 바흐의 엄격한 대위법이 보여주는 경제성과 유기적 연관성이 자신의 음악적 추구와 연결됨을 증명하며, 긴 선율을 짧은 동기들의 연쇄로 재해석한 것이다. 이러한 접근은 후일 '총렬주의'(Serialism) 작곡가들에게 음악적 요소의 구조화에 깊은 영감을 주었다. 또한 편곡 자체를 비평적 행위로 삼아, 과거 텍스트를 현대적 관점에서 재해석하는 강력한 메시지를 던졌다.
결국 쇤베르크와 베베른의 대비는 단순한 표현 기법의 차이를 넘어, 전통에 대한 근본적 이해와 재정의를 보여준다. 베베른은 스승의 낭만주의적 접근을 거부하고, 바흐의 골조만을 추출하여 현대적 추상화를 완성했다.